올해 엔데믹 본격화로 성장을 기대했던 여행업계가 예기치 못한 거시경제 위기감으로 인해 눈치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과 중국 소비자들의 지갑이 닫히며 예상보다 관련 산업의 성장이 더딘 가운데 상저하고를 기대한 여행업계는 발 빠르게 움직이며 매출 증대를 위해 애쓰고 있다. 엔데믹이 다가오며 리오프닝 관련주로 주목받는 대표적인 산업은 여행 관련 업계다. 항공·호텔·여행 등 일련의 관련 산업은 코로나19 대유행 동안 완전히 움츠러든 채 긴 겨울이 끝나길 기다려왔다. 그리고 올해 들어 3년간의 겨울잠을 끝내고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여전히 매서운 꽃샘추위가 불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여행업계의 큰손, 중국의 경제 위기가 현재진행형이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애쓰는 다른 나라와 달리 중국은 벌써부터 경기 침체, 즉 디플레이션 공포와 맞서 싸우며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 상태다. 특히 헝다와 비구이위안의 연이은 디폴트 사태로 인해 부동산발 중국 경제 위기감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중국 정부의 적극적 개입만이 해결책이란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중국 정부는 자칫 무리한 정부 개입이 역효과를 낼지 우려하며 시장을 신중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 소비자들의 행보 역시 주춤하고 있다. 폭발적인 보복 소비를 기대했던 시장의 기대와 달리 실제 중국 소비자들은 임의 소비재, 필수 소비재 할 것 없이 절약 모드에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대표적인 소비 산업인 여행업계 역시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중국인들이 움직여야 산업이 살아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의 해외 여행을 기대했지만 해외는 고사하고 중국 국내 여행객들도 크게 줄어들며 관광업계의 위기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최근 11월 11일을 전후해 진행됐던 중국의 연말 할인 축제인 광군제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표로 실망감을 키우고 있다.
중국 1·2위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와 징둥닷컴은 올해 광군제에서 전년보다 매출이 증가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매출액을 밝히진 않았다. 실제 중국 경제 둔화 속 소비자들이 저가·필수·국산 제품 위주로 쇼핑을 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 둔화 속 중국인들의 소비 패턴이 할인 행사를 한다고 사는게 아니라 꼭 필요한 것만 구매하는 식으로 바뀌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소비 행태는 여행을 비롯한 리오프닝 관련 업계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내놓은 8~9월 방한 중국인 관광객 수는 52만 3600여명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5만 9779명과 비교하면 8배가량 높아진 수준이다. 엔데믹으로 중국 관광객이 늘어난 데다 중국 정부가 6년 5개월 만에 한국 단체여행을 허락하면서 기대감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중국인 관광객은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유커 특수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분석이다. 한국면세점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 9월 외국인 매출액은 1조804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1조6527억원)보다 오히려 34.6% 감소한 수치다. 여행객 자체는 늘어났지만 1인당 소비액은 크게 줄었다는 뜻이다.
호텔신라는 올 3분기 면세 부문에서 163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같은 기간 엘지(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를 대표하는 화장품 기업들의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32.4%, 8.2% 감소하며 체면을 구겼다.
반면 기존 중국인 여행객이 잘 이용하지 않았던 대형 할인점이나 편의점 매출은 크게 늘었다. 비씨카드사가 분석한 중국 유니온페이(은련카드)의 국내 소비 데이터에 따르면 2019년 중국인 카드 매출액의 63.1%를 차지했던 면세점 비중은 올해 절반 가까이인 35.9%로 쪼그라들었다.
반면 같은 기간 대형 할인점 매출액 비중은 1.3%에서 3.8%로 2배 이상 늘었다. 과거 매출 비중 상위 10개 업종에 들지 않았던 편의점 매출액 비중도 1.5%로 화장품 매출액(1.1%)을 추월했다. 면세점이나 백화점에서 고가품을 쓸어 담던 과거 중국인 관광객의 여행 패턴에 변화가 감지되는 것이다. 여행업계에서는 중국인 여행객 형태가 단체관광에서 개별관광으로, 싹쓸이 쇼핑에서 실속형으로 바뀌고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중장년층과 달리 개별여행을 선호하고 인터넷과 모바일에 능한 중국 내 MZ세대 여행객이 한국을 많이 찾으면서 소비 패턴에도 큰 변화가 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여행 큰손, 중국인들의 소비 패턴 변화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관련 업계에도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명품업계가 대표적이다. 명품업계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오히려 수혜를 받은 대표적 산업이었다. 여행이나 관광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휴가 대신 명품 구입 등으로 보복소비에 나서며 반사효과를 누린 대표적 산업이다. 루이비통, 디올, 펜디 등 주요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인수하며 세계 1위의 명품 기업으로 성장한 프랑스 명품 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는 지난해 26.7%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며 테슬라(16.8%)를 뛰어넘어 애플(평균 30%)에 근접하며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엔데믹이 본격화하면서 소비가 늘어나고 수혜를 입을 것이라 기대했던 명품업계는 올해 오히려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LVMH는 올해 처음으로 분기 매출 ‘200억유로’ 선이 붕괴되며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내년 전망은 더 부정적이라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LVMH가 최근 발표한 3분기 매출은 199억6400만유로. 전년 동기 대비 9% 증가했지만 업계에선 우려를 키우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글로벌 럭셔리 수요 감소로 LVMH 매출 성장세가 둔화됐다”며 “이번 실적은 명품 호황이 힘을 잃고 있다는 증거로 보인다”고 평했다. LVMH의 분기 실적이 200억유로 아래로 떨어진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다. 1분기에는 210억3500만유로, 2분기에는 212억600만유로를 기록했다. 증권업계는 3분기 LVMH가 205억~211억유로의 매출을 기록할 것이라 내다봤지만 실제 매출은 이보다 약 5% 이상 낮았다. 한때 ‘세계 1위 부자’ 타이틀을 따내기도 했던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그 자리를 일론머스크 CEO,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 등에게 빼앗겼다.
중국발 호재를 누리지 못한 여행업계의 위기감은 미국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여행객들이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찾아, 호텔에서 묵으며 밥을 먹고 물건을 사는 선순환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여행 자체를 떠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호텔, 관광업계의 성장 부진이 도미노처럼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10월 세계 최대 채권펀드 운용사인 핌코가 2억4000만달러(약 3200억원) 규모의 호텔 투자 포트폴리오를 포기하며 시장에 충격파를 준 바 있다.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대출금 등으로 인한 차입비용 부담이 나날이 늘어나는 가운데 호텔 사업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투자를 이어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핌코 부동산 펀드는 지난 9월 미국 텍사스주, 인디애나주 등의 호텔 20개로 구성된 포트폴리오에 대한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포트폴리오의 자산 가치는 2017년 3억2600만달러에 달했지만 코로나19 유행이 한창이던 지난해 12월 2억7280만달러로 16%가량 감소한 상태다. 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 엔데믹만 기다리며 버텨오던 호텔업계는 2023년을 본격적인 회복 원년으로 삼고 적극적인 투자와 영업 정상화를 준비해왔다. 하지만 엔데믹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경기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소비자들이 여행 대신 긴축이나 저축을 택하며 여행업계가 기대한 훈풍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상업용 부동산과 호텔업계는 금리 상승 여파를 버티지 못하는 분위기다. 미국 부동산 리츠(REITs) 회사인 애시포드는 지난 7월 19개 호텔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며 백기를 들었다. 파크 호텔&리조트 역시 지난 6월 샌프란시스코 최대 호텔인 힐튼샌프란시스코유니언 스퀘어 파크55에 대한 대출 상환을 중단하며 불안감을 일찌감치 드러냈다.
블랙스톤은 지난 4월 핀란드 사무용 부동산 포트폴리오, 브룩필드자산관리는 워싱턴D.C. 등 사무용 부동산 포트폴리오에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핌코 역시 올해 초에도 17억달러 부채가 있는 오피스 빌딩 포트폴리오를 포기하며 불안감을 노출했다. 그간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 퍼져있던 디폴트 불안감이 호텔 등 숙박시설로까지 옮겨붙는 상황은 현재 관련 업계가 처해 있는 어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평가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상황이 최악인 것은 아니다. 숙박업 및 호텔 산업이 고금리 여파로 인한 여진이 이어지고 있지만 여행객 자체가 완전히 줄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여행객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항공업계의 모습은 다소 분주한 모습이다. 철저히 수요 맞춤형 전략을 세워야 하는 항공업계에서는 현재 조금씩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비행기 증편과 신규 항공기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수요 확대로 인해 현재 항공편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즉 늘어나는 여행 수요에 비해 지속적인 항공기 제조 지연 및 공급 부족이 발생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세계 상업용 항공기의 절반 이상을 리스 회사들이 소유하고 있다 보니 최근엔 리스 요금 인상 이슈도 발생 중이다. 특히 최근 인플레이션 여파가 미치고 있는 항공업계 역시 요금 인상 등 소비자 전가 효과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비행기 리스 요금 인상 자체는 이러한 항공료 인상 효과를 부채질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잉사의 최신 항공기 737 맥스 8의 리스 비용은 최근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 월 약 36만달러에서 37만달러로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꾸준히 여행객 수요가 늘어나는 가운데 거시 경제에 대한 불안함이 해소된다면 본격적인 여행 관련 산업의 급성장을 기대하는 만큼 업계에서는 지속적으로 눈치싸움을 펼치며 수요 확대를 위한 물밑작업을 계속해나갈 방침이다.
실제 국내 여행업계에서는 이번 여름철 성수기 해외여행 증가 등의 영향으로 3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점을 주목한다. 국내를 대표하는 여행업체인 하나투어의 올해 3분기 누적 매출액은 2920억7600만원으로 688억2100만원이었던 전년 동기 대비 324.39%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전년 동기에는 누적 218억341만원 영업손실이 났지만 올해 3분기에는 132억1357만원 영업이익을 내며 1년 새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인 2019년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이 140억3157만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수익이 회복됐다는 점은 고무적이란 평가다. 모두투어 역시 올해 3분기 누적 매출액은 1331억334만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91.75% 증가하며 엔데믹 효과를 톡톡히 누린 것으로 분석된다.
3분기 여름휴가와 추석 황금연휴가 이어지며 해외여행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택하며 여행업계도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은 것이다. 관건은 겨울방학과 크리스마스 연휴 등이 이어지는 4분기 성수기 성적표가 어떻게 나올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경기 침체에 대한 불안감이 잔존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좋은 실적이 나올 경우 여행업계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기대가 너무 컸던 반면에 그만큼의 실적이나 매출이 나오진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 코로나라는 키워드 자체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업계 회복의 원년으로서의 의미가 크다”며 “내년부터는 눈치싸움을 끝내고 본격적인 여행 산업 성장 동력이 발생되길 기대되는만큼 업계에서도 더욱 준비에 매진해 회복을 위한 움직임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