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커다란 땅덩어리만큼 소비 문화도 특별하다. 대한민국처럼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잘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차량을 이용해서 장을 보거나 식료품을 사야 하고, 이왕 가는 김에 대량으로 구매해두고 쌓아두는 소비가 일반적이다. 미국에 픽업트럭 문화가 발달한 이유 역시 이렇게 많은 짐을 싣고 날라야 하는 특유의 문화 때문이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들여놓고 판매하는 만큼 재고 관리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의 유통업계에서는 어느 정도 재고 관리 비용에 여유를 두는 편이다. 또 하나는 바로 좀도둑 문제다. 미국은 매장이 크고 판매하는 품목의 양과 종류가 워낙 많아 좀도둑이 몰래몰래 이런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양말 하나, 음료수 한 병 , 빵 한 묶음 등 소소하게 훔쳐가는 좀도둑을 잡기 위해 유통업계에서 이를 확인하는 데 일반적으론 더 많은 비용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재고비용으로 손실액을 잡아두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제 그 심각성이 알면서 모른 척하기엔 눈덩이처럼 커졌다. 아예 전문털이를 연상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며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단 목소리까지 커지고 있는 상태다. 기업들은 특히 재고손실로 수억달러의 비용이 들고 있다며 자칫 기업의 위기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처럼 기업의 존폐 위기로까지 문제가 심각해지자 미국 소매업체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경비원을 추가하고 CCTV 등 감시장비를 대거 보완하고 있다.
미국 대표 종합소매업체 타깃은 투자자들에게 도난, 직원 절도 및 조직적인 소매 범죄를 말하는 업계 용어인 재고손실이 2022년보다 올해 수익을 5억달러나 떨어뜨릴 홈디포와 같은 DIY 소매점, 달러트리 등 미국식 천원숍 등 저가 매장은 올 1분기에 재고손실로 총마진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를 표한다.
신발 유통업체 풋락커는 전년 동기 대비 재고손실이 ‘상당한’ 증가를 보인 여러 소매업체 중 한 곳이 되었다고 언급된다.
실제 재고손실 방지 컨설팅업체 잭헤이스인터내셔널은 지난해 미국 소매업체의 80% 이상이 손실 규모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조사 응답자들은 좀도둑과 직원 절도로 체포자 수가 50% 가까이 늘었고, 훔친 물건을 회수한 비율이 70%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말인즉슨 1달러를 회수하면 8달러 이상의 물건이 도난됐음을 뜻한다.
리드 헤이스 플로리다대 교수는 “올해 소매업자들에게 좀도둑 문제는 이전보다 더 빈번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심각한 사안이 됐다”며 “이는 단순히 물질적 피해뿐 아니라 폭력적인 사건으로 인한 부가적인 피해와 정신적인 스트레스 피해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밝혔다.
전국 소매업체연맹은 소매업체들이 2021년 재고손실로 거의 1000억달러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소매업체들의 우려가 계속 커지는 가운데 그 문제는 더 심각해져 직원들에게 부상을 입히거나 고객들을 겁박하는 행위로 이어지는 지경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좀도둑이 급증한 이유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 이후 훨씬 더 나빠진 거시경제의 위기 탓이 크다. 미국 뿐 아니라 글로벌 거시경제의 위기감이 커지는 가운데 미국 안팎에서도 물가 인상의 부담이 크게 급증하며 소비자들의 지갑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또한 기업들의 허리띠 졸라매기가 강화되면서 기업발 정리해고도 만성화 됐다. 일자리를 잃은 실직자가 대거 늘어나면서 가계 소득의 감소와 이로 인한 소비 지출 감소가 연쇄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어려워진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소득이 불안정해지며 좀도둑 문제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좀도둑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자 아예 물건 판매를 막는 가게들까지 늘어나고 있다. 슈퍼마켓에서 비누, 세탁 세제, 치약, 면도기 등 생필품을 진열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워싱턴, 버지니아, 메릴랜드를 기반으로 하는 소매품가게 자이언트가 워싱턴 전체 매장에서 대형 브랜드의 미용용품 및 건강 관련 제품의 판매를 전면 중단했다. 특히 대형 브랜드의 생필품은 수요가 많아 불법 유통방식으로 재판매되기 때문에 좀도둑들의 집중 타깃이 되고 있다. 회사는 아예 자체 브랜드의 생필품만 판매해 좀도둑의 접근이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또 모든 고객은 매장을 나서기 전에 영수증 검사를 받아 혹시라도 모를 추가 피해를 막을 방침이다.
아이라 크레스 자이언트 대표는 “해당 제품들을 물론 판매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좀도둑 탓에 불가능하다”며 “판매대에 내놓기만 하면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해 결국 해당 브랜드는 판매대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워싱턴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이 같은 생필품 도둑이 기승을 부리는 상태다.
지난해 발표된 전미소매연합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유통업체에서 조직 절도는 전년 대비 26.5% 증가했다. 전체 손실의 절반 가까이가 이러한 좀도둑 문제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국적 유통체인인 월그린 역시 좀도둑이 성행하는 시카고 도심에서 반창고와 과자, 배터리 등 빈번하게 절도의 대상이 되는 품목은 별도 보관하고 온라인으로만 주문하도록 하는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아마존이 인수한 홀푸즈는 이윤 악화와 안전 문제를 이유로 샌프란시스코 매장을 철수하기에 앞서 술과 영양 보조제 및 고가의 제품은 직원에게 문의해 판매하는 방식으로 절도 방지를 시도한 바 있다.
회사 상품과 직원 보호를 위한 지출 증가도 예상치 못한 피해를 키우고 있다. 시장조사업체인 인슈렁스닷컴의 조사에 따르면 소매업체 종사자의 56%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보호 필요성이 대두되는 가운데 경영자 입장에서도 적극적 관리와 노동자 보호 사이에서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이에 유통기업들은 엔비디아, 레노버 및 인텔 등 IT기업 등과 협력해 도난물품 추적을 위한 태그 부착부터 재범자 및 무기 식별을 위한 AI 기반 보안감시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소매업가게에서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만큼 효과를 내지 못해 비용이 더 늘어나는 상황도 반복되고 있다. 올타뷰티의 스콧 세터스턴 CFO는 최근 “2023년에 접어들면서 상품 손실 완화 분야에 일부 투자했기 때문에 재고손실이 다소 줄어들 것으로 생각한다”며 “하지만 아직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만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기업 실적 개선의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좀도둑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자 아예 가게를 폐쇄하는 기업들도 속출하고 있다. 홈디포, 타깃, 달러트리 등 소매점에서 폭력과 좀도둑이 최근 많이 증가해 이윤 폭이 크지 않은 업체 입장에서는 일부 매장의 폐쇄를 검토 중이다. 온라인 쇼핑을 중심으로 생필품 구입 트렌드가 재편되는 가운데 위험을 끌어안고 무리하게 오프라인 매장을 유지하는 대신 아예 폐쇄하는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실제 월마트는 올해 들어 워싱턴을 포함해 시카고, 포틀랜드 매장 등을 수익 다각화 이유로 폐쇄했다. 매출 자체도 적을 뿐 아니라 재고 처리 비용이 막대하게 늘어나며 임대료 등을 감안해 아예 폐쇄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쇼핑몰 노드스트롬의 매장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폐장은 폭력 범죄가 계속 늘어가는 가운데 주 행정부의 법집행 부재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문제가 기업 차원에서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법집행기관이 관리할 문제라는 것이다.
잭헤이스인터내셔널 마크 도일 사장은 “특정 범죄의 비범죄화, 보석조치 개혁 및 진보적인 지방 검사가 절도 문제를 부추기고 있다”며 “이제 도둑들이 상점 절도를 낮은 위험에 높은 보상이 있는 활동으로 본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달러트리 최고경영자인 릭 드레이링은 “궁극적으로 상품 손실은 방어적인 판매계획, 상점 폐쇄 또는 지역 차원의 정부 조치를 통해 해결될 수밖에 없다”며 법집행기관의 적극적 행정력 동원을 조언했다.
물론 정부 당국에서도 이처럼 조직화되는 절도 문제를 근절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에릭 애덤스 미국 뉴욕 시장은 이달 초 “소매점 범죄를 종식하겠다”며 좀도둑 근절 계획을 발표했다.
소매업계 지원 법률 중 하나인 정보 소비자법도 지난해 미국 의회를 통과했다. 온라인에서 큰 규모의 판매자들을 감시해 범죄자들이 장물을 판매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기 위한 법안이다.
미국 상하원 위원회는 법 집행기관의 범죄집단 기소 권한 강화를 통해 업계를 지원하고자, 조직화된 소매상품 범죄 퇴치법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경영진들은 정부 및 경찰의 추가 조치를 요청하며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존 퍼너 월마트 미국 사업부 책임자는 “소매업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며 “법이 집행되어 지역공동체가 이 문제를 다시 통제할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