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명소라더니 이게 뭐야.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서 해가 보이질 않아요.”
오후 5시 반. 숙소에서 알려준 바로 그 시간에 삼포해변으로 나섰더니 온통 하늘이 뿌옇다. 날이 흐린 게 아빠 탓이라는 듯 초등학교 5, 6학년쯤 돼 보이는 아들의 말 속에 심통이 그득하다. 기온이 뚝 떨어진 한겨울, 어르고 달래 강원도 해변으로 아들을 이끈 아빠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마도 오늘 저녁 일몰, 내일 새벽 일출을 볼 심산이었을 텐데, 첫걸음부터 삐끗했다.
“날이 흐릴 거란 기상예보가 없었는데…. 내일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늘에 잔뜩 낀 구름을 누군가 후욱 불어 날리지 않는 한 내일 새벽 일출도 이미 물 건너간 상황. 그런데 여기서 잠깐, 9회 말 투아웃 만루 상황에 홈런이 터졌다.
“아빠, 저기! 저기 바다 위에 달 좀 봐요. 달이 해보다 더 커. 우와. 저렇게 큰 달은 처음 봐요.”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달이 둥실 떠올랐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40분. 불과 10여 분 사이에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보름달은 과거 그 어떤 달보다 매끈하고 잘생겼다. 이번엔 아빠 목소리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네 이름 한자에 달 월(月) 부수가 있는 거 알지? 그게 저 달을 가리키는 거야. 새해가 되면 일출을 보고 한 해를 기원하기도 하는데, 옛 선조들은 달을 보면서 기도하기도 했어. 자, 우리도 달보고 새해 소망을 빌어볼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아들이 달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되지 않게 해주세요!”
삼포해변에서 가진항까지 약 9.7㎞ 구간은 해파랑길 47코스다. 봄이나 가을에 서너 시간 남짓 걸리는 이 길은 여름이나 겨울엔 때로 네댓 시간이 걸릴 만큼 쉽지 않다. 날씨 탓이다. 무더운 여름엔 뙤약볕이 무섭고 한겨울엔 바닷바람이 매섭다. 그래서 1박 2일 코스로 일정을 잡는 이들이 많다. 숙소로 향하며 일몰을 감상하고 숙소에서 나서며 일출을 즐기는 방식이다.
지점별로 나눠보면 삼포해변→봉수대해변→송지호해변→송지호관망타워→왕곡한옥마을→공현진2리해변→가진항에 이르는 길인데, 반을 나눠 삼포해변에서 송지호관망타워까지는 오늘, 송지호에서 가진항까지는 내일, 이런 식이다. 물론 반대 방향으로 걸어도 좋다.
길은 가지런하다. 오르고 내리는 경사 없이 해변과 호숫가, 옛 마을을 걷는다. 누구 하나 말 거는 이 없어 걷다보면 언택트란 말이 떠오를 만큼 고즈넉하다. 삼포해변에서 봉수대해변을 거쳐 송지호 해안까지 이르는 길은 넓은 바다가 이어져 걷는 동안 눈이 시원하다. 간간이 해안가 소나무 숲에 나무데크가 놓여 반갑다.
바닷가를 걷다 도착하게 되는 송지호는 이곳의 둘레길만 따로 걸어도 좋을 만큼 코스가 훌륭하다. 둘레 6.5㎞의 자연호수인데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송지호 해변에서 길 하나 건너면 펼쳐지는 호숫가는 겨울 철새로 이미 장관이다. 4층 높이의 송지호관망타워에 오르면 호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저 멀리 청둥오리와 기러기 떼가 군무를 펼친다.
약 20만 평 규모의 송지호는 바다와 접해 짠물이 섞여 있어 도미와 전어 같은 바닷고기와 잉어와 숭어 등 민물고기가 함께 살고 있다. 잘 닦인 둘레길을 편히 즐길 수 있도록 자전거를 대여해주기도 하는데, 관망타워에 들러 물어보니 한겨울엔 쉬고 3월부터 다시 대여가 시작된단다.
송지호 둘레길을 걷다 만나게 되는 왕곡한옥마을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에 자리한 전통마을이다. 2000년 1월 7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는데, 마을 중앙의 개울을 따라 양쪽으로 가옥들이 분산 배치돼 있다. 한옥의 구조가 모두 달라 집을 비교하며 걷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왕곡마을은 오음산, 두백산, 공모산, 순방산, 제공산, 호근산 등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계곡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 덕에 6·25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마을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최측근이었던 함부열이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에 반대해 이 마을 근처에 은거했고, 그의 차남이 이곳에 정착하며 마을이 형성됐다. 이후 오늘날까지 약 600년간 그의 후손인 양근 함씨(강릉 함씨)와 강릉 최씨가 거주하고 있다. 전통가옥에서 하룻밤 묵고 싶다면 민박도 가능하다.
옵바위로 유명한 공현진해변은 일출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한겨울이면 공현진 방파제와 나란히 붙은 옵바위의 빈 공간 사이로 해가 뜬다. 매년 1월 1일 새벽이면 일부러 그 사이에 포커스를 맞춘 이들이 여럿이다. 운이 좋으면 송지호에서 날아온 철새 무리가 떼지어 나는 모습도 담을 수 있다.
코스가 마무리되는 가진항은 물회가 유명한 곳이다. 때마침 작업을 마친 어선이 들어와 어종을 살펴보니 양손을 합친 것보다 큰 싱싱한 쥐치가 펄떡거린다. 그 뒤로는 힘에 부친 듯 대방어를 양팔로 꼬옥 붙잡은 어부가 싱글벙글이다. 가진항 회센터에서 횟집을 한다는 한 사장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제주 방어 맛있다던데 여기 대방어에 비할 게 아니지. 저기 쥐치는 또 어떻고. 어디 물회 한 그릇 자셔야지?”
□ 고성 팔경
1경-건봉사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렸던 전국 4대 사찰 중 한곳으로 산라 법흥왕(서기 520년) 때 지어졌다.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와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 그 양쪽에 바라밀 문양의 돌기둥, 불이문 등이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2경-천학정
송림에 둘러싸인 기암절벽 위에 세워져 일출 명소로 알려졌다. 해안절벽과 수평선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3경-화진포
둘레 16㎞의 동해안 최대 자연 호수다. 해안선을 따라 걷는 응봉코스 정상에 오르면 바다와 호수의 조화가 아름다운 뷰포인트가 곳곳에 자리했다.
4경-청간정
관동 8경의 하나로 해안절벽 위에 세워진 중층누정이다. 노송길을 지나 정자에서 굽어보는 동해바다 풍광이 일품이다.
5경-울산바위
고성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경관은 기암절벽의 극치라 평가받는다. 겨울에도 절벽 아래를 둘러싼 푸른빛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6경-통일전망대
2019년 해발 70m의 고지 위에 34m 높이로 신축된 통일전망타워가 개관됐다. DMZ와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전망대에 서면 금강산이 지척이다.
7경-송지호
둘레가 약 6㎞에 달하는 자연호수다. 송림이 울창해 둘레길 산책이 유명하다.
8경-마산봉 설경
진부령 인근의 봉우리로 동해안 절경과 어우러진 설경이 늘 회자되는 눈꽃 명소다.
글·사진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