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아르노 LVMH그룹 회장이 호시탐탐 경영권을 노리고 있는 브랜드. 무려 6대에 걸쳐 가업을 잇고 있는, 올해로 176년 된 명품. 에르메스(Hermes)다. 이른바 청담동 스타일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에르메스는 켈리백과 버킨백의 유명세 외에도 수많은 일화가 명품업계에 늘 회자되는 브랜드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전 세계 주식이 곤두박질쳤을 땐 증권과 금융계의 화두가 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리먼 사태 당시 루이비통으로 유명한 LVMH그룹의 주가는 절반으로 떨어졌다. 구찌로 대표되는 PPR그룹은 3분의 1 수준. 하지만 에르메스의 주가는 오히려 상승했다.
중국의 경제 칼럼니스트 왕얼쑹은 자신의 저서 <명품시대>에서 LVMH가 성장이 정체된 유럽시장 대신 미국과 신흥시장으로 눈을 돌렸다면, 에르메스는 전략의 핵심을 프랑스 국내에 맞췄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적과 숫자를 보고 확장 전략을 편 타 브랜드와 달리 관광객보다 국내 고객에 주력해 주식시장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묵묵히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희소성의 가치를 중시하는 에르메스의 잇 아이템 중 하나가 시계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에르메스 시계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서며 독창적인 기술력을 더하고 있다.
마이애미 손목시계
1912년 에르메스의 3대손 에밀 에르메스의 딸들. 왼쪽부터 이본느, 자클린, 시몬느, 알린느 에르메스
스트랩에서 시작된 시계 제작
1837년에 설립된 에르메스는 당시 말안장과 마구 제작에 있어 탁월한 품질을 인정받는다. 가죽 분야의 명성은 설립 당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수작업 노하우는 20세기 초에 들어서며 벨트와 가방, 의류로 범위를 넓혀 발전하게 된다.
시계 스트랩(가죽 시계 줄)을 제작하던 에르메스의 시계는 1920년대 예거 르쿨트르, 위니베르살,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등 스위스의 명품 시계 브랜드와 협업으로 생산, 진행됐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1978년 에르메스 가문의 5대손 장 루이 뒤마가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스위스에 시계전문 자회사인 ‘라 몽트레 에르메스(La Montre Hermes)’를 설립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2003년부터 라 몽트르 에르메스는 스위스 플러리에에 위치한 ‘보셰 매뉴팩처 플러리에(Vaucher Manufacture Fleurier)’와 손잡고 하이엔드 기계식 시계 컬렉션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18세기부터 200년이 넘도록 기계식 무브먼트를 제조한 보셰 매뉴팩처 플러리에는 현재 스위스의 제약회사, 호텔 등을 소유한 산도즈 가족 재단이 75%, 에르메스 인터내셔널이 25%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엄격한 수작업 기준이 적용된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는 에르메스만을 위해 독점 생산된다. 그런가 하면 에르메스는 2006년부터 스위스 시계 제조사들에 스트랩을 공급하고 있다. 라 몽트르 에르메스에는 스트랩만 제작하는 공방이 따로 운영되고 있다. 가방이나 마구 등 최고급 가죽제품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스트랩은 다양한 가죽과 색상으로 제작되고 있다.
가죽 수작업 노하우와 시계의 완성
약 100년 전인 1912년에 촬영한 에밀 에르메스 가족의 사진을 살펴보면 왼쪽 두 번째 자클린의 손에 손목시계가 보인다. ‘포르트-어니용(Porte-Oignon·Porte는 문, Oignon은 양파라는 의미다)’이란 이름의 이 시계는 회중시계에 가죽을 감싸 손목시계처럼 착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에르메스 최초의 시계다. 이 모델은 한 세기 동안 이어온 에르메스의 모든 제작 노하우가 담겨 있다. 말을 타는 사람이 주머니에서 따로 시계를 꺼낼 필요 없이 손목에 착용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가죽에 중점을 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에르메스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가죽이다. 가죽을 다루는 기술인 새들러 스티치와 피복 제작법 등 수작업 노하우는 시계 아이템에도 그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가죽을 이용한 조각이나 에나멜링 기법을 표현한 시계 장식들은 에르메스 시계의 돋보이는 마무리다. 일례로 1935년에 출시한 ‘마이애미(Miami)’ 손목시계는 가죽이 다이얼 전체를 감싸며 시계를 보호하고 있다.
20세기 기술의 발달로 운송수단이 말에서 자동차와 기차로 교체되면서 승마 관련 사업은 스포츠, 레저 분야로 궤를 달리하게 된다. 에르메스는 ‘가방 시계(Bag Watches)’부터 스트랩을 교체할 수 있는 시계들을 내놓는가 하면 스포츠의 진동으로 기계가 영향을 받지 않도록 시계가 삽입된 벨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The Arceau Watch
지난해 테마를 ‘시간의 선물’로 정한 에르메스는 아쏘(Arceau) 컬렉션에 2개의 새 모델을 더했다. 케이스 위아래 비대칭을 이루는 (말을 탈 때 발을 딛는 등자가 연상되는)러그가 특징인 아쏘는 새로운 케이스 디자인, 자체 제작 무브먼트 탑재 등이 돋보인다. 1978년 에르메스의 디자이너 앙리 도리니가 디자인했다.
무브먼트의 받침이 되는 메인 플레이트는 원형으로 무늬를 낸 서큘러 그레인드(Circular-Grained)와 빗살무늬를 내는 새틴 브러시드로 처리해 광택이 은은하고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H형태의 패턴으로 장식했다. 지름이 34㎜인 여성용 시계 ‘아쏘 에퀴예르(Arceau Ecuyere)’는 보셰 매뉴팩처 플러리에가 제작한 무브먼트 H1912를 장착하고 있다. 에르메스가의 4대손인 자클린 에르메스가 손목에 착용한 ‘포르트-어니용’의 탄생 연도에서 차용한 것이다. 케이스와 스트랩의 소재에 따라 6개의 모델 중 선택할 수 있다. 1912년부터 2012년까지 에르메스 시계 100주년을 기념해 100개만 생산한 한정판이다.
Arceau Le Temps Suspendu Rose Gold
아쏘 타임 서스펜디드 모델에 로즈 골드 소재가 새롭게 추가됐다. 프랑스어로 ‘아쏘 르 땅 수스팡뒤(Arceau Le Temps Suspendu)’, 영어로 ‘아쏘 타임 서스펜디드’는 시계 기능을 멈추지 않고도 다이얼 위에 시간과 날짜 표시를 감출 수 있다. 에르메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능이다. 시간을 표시하는 기본 기능은 계속 수행하지만 버튼 하나로 시간이 멈춘 듯 보이는 추가 모듈을 얹었다. 착시를 일으키는 이러한 기술로 2개의 특허를 획득했다. 하나는 구조, 또 하나는 동작을 멈출 수 있게 도와주는 톱니바퀴다. 순간 동작 멈춤 톱니 구조의 모듈은 제네바에 자리한 아젠호(Agenhor)사의 시계 제작자인 장-마크 비더레이터가 고안해냈다. 무브먼트는 원형의 서큘러 그레인, 줄무늬의 꼬트 뜨 제네바 등으로 마감했다. 케이스는 기존 스테인리스 스틸에 이어 지름 43㎜의 골드 케이스를 추가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The Dressage Watch
2003년 앙리 도리니가 처음으로 소개한 드레사지(Dressage) 컬렉션이 보다 가벼운 느낌으로 현대화됐다. 베젤을 입체적으로 케이스에 부착해 가로가 1.5㎜ 더 커졌고 다이얼은 마치 부조처럼 도드라진다.
총 10개 모델인 드레사지 컬렉션은 보셰 매뉴팩처 플러리에에서 제작한 H1837 무브먼트를 장착했다. 8개 모델이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로 제작됐고 블랙 또는 오팔린 실버 등 2가지 다이얼 중 선택할 수 있다. 스틸 브레이슬릿 또는 매트 블랙, 아바나 앨리게이터 가죽 스트랩 중 선택할 수 있다. 로즈 골드 소재는 스몰 세컨드 모델이 2개다. 오팔린 실버 다이얼에 매트 하바나 스트랩 모델, 에르메스 탄생 175주년을 기념하는 매트 그래피트 컬러 다이얼의 앨리게이터 스트랩 모델이 있다. 이 모델은 175개만 한정 생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