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산맥(Monte)의 끝자락(Pied)이라는 뜻을 가진 피에몬테는 이탈리아 북서쪽 끝에서 서쪽으로는 프랑스, 북쪽으로는 스위스와 접하고 있다.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와 함께 이탈리아의 3대 와인으로 꼽히는 ‘바롤로(Barolo)’ 와인 산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 와인을 만드는 지역 토착 포도품종인 네비올로(Nebbiolo)는 구름, 안개를 뜻하는 라틴어 네불라(Nebula)에서 비롯된 이름이며 그만큼 이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바로 안개 낀 포도원의 모습이기도 하다.
밀라노 비행장에 내려 렌터카를 타고 2시간 정도 이동하면 피에몬테의 중심 알바(Alba) 마을에 도착한다. 기차여행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밀라노에서 기차로 알바까지 3시간 정도 이동해 알바 시내에서 차를 빌려도 좋다.
알바는 지역 중심도시라고는 하지만 인구 3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다.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마을에 작은 레스토랑이나 소규모 와인 숍, 식자재 전문 숍들이 늘어서 있다.
다만 이탈리아의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는 휴식시간이라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인상적인 것은 와인 숍뿐 아니라 옷 가게나 신발 가게, 심지어 유아용품을 파는 가게에도 쇼 윈도를 와인으로 장식하고 있다는 점. 와인 산지로 유명한 마을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란다.
바롤로 마을은 알바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정도 거리에 있다. 200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 중심부엔 중세 이전에 지어진 바롤로 성이 있다. 이 성 지하 1층은 바롤로 마을에서 생산되는 모든 바롤로 와인을 진열, 판매하는 숍이 있고, 1층부터 꼭대기까지가 와인 박물관이다.
바롤로 마을은 사보이 왕가의 주거지이자 1861년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고향이다.
이 때문에 바롤로 와인은 ‘왕의 와인, 와인의 왕’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피에몬테뿐 아니라 이탈리아 최고의 명품 와인으로 부상했다. 피에몬테는 맛있는 요리의 나라 이탈리아 전국을 통틀어 중세부터 지금까지 가장 부유한 곳이자 이탈리아 요리의 본고장으로 꼽히는 미식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세계 3대 진미라는 송로버섯 중에서도 가장 고급으로 치는 흰 송로버섯(White Truffle)과 고르곤졸라 치즈, 헤이즐넛 등이 유명한 최고의 식자재 산지이다. 피에몬테 공국 공주가 프랑스 왕가로 시집가면서 피에몬테의 식기와 요리사를 대동했는데 이 결혼 전에는 프랑스에 포크와 나이프조차 없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유럽에서도 이름난 미식의 고장이다.
송로버섯 축제가 열리는 10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는 전 세계 미식가들이 몰려들어 호텔이나 레스토랑 예약이 어려울 정도다.
바롤로의 명가들출판 재벌서 명품 와인 생산자 된 보롤리
보롤리(Boroli)는 피에몬테 지방의 명가(名家)이자 이탈리아 최대 출판기업 ‘데 아우스티니’의 회장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와이너리. 창업주 실바노 보롤리는 출판사 은퇴 후 고향인 피에몬테로 돌아와 고대 로마시대부터 최고급 포도 재배지로 알려진 포도원들을 사들여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롤로 와인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구하기 힘든 것으로 알려진 싱글 크뤼 포도밭에서 난 와인들이 뛰어나다.
대대로 여자가 귀한 가문에 태어난 첫 손녀의 이름을 붙여 만든 상큼하고 여성스러운 스타일의 ‘랑게 로쏘 안나(Langhe Rosso Anna)’, 창업주 자신의 네 아들의 건강과 우애를 축원하기 위해 ‘네 명의 아들’이라는 뜻을 붙인 ‘콰트로 프라텔리(Quatro Fratelli)’ 등 다양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바롤로의 4대 명문 알도 콘떼르노
가야(Gaja), 클레리코(Clerico), 비안키(Bianchi)와 함께 바롤로 4대 명문으로 꼽히는 콘떼르노 가문의 5대 후손인 알도 콘떼르노는 오늘날 바롤로 와인을 세계적 명품 반열에 오르게 한 혁신가로 유명하다. 부르고뉴의 최고급 와인 양조기법을 도입해 피에몬테 지역 토착 품종 포도의 개성을 잘 구현한 와인을 만든 것으로 이름이 높다. 얼마 전 알도 콘떼르노가 타계했을 때 와인스펙테이터 디캔터 등 와인 전문지는 물론이고 LA 타임스에까지 부고나 애도 기사가 실렸을 정도.
지금은 그의 아들들이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명품 와인으로 이름이 났지만 외국에 수출할 때는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자신이 생산하는 와인을 그 나라 문화와 어우러지게 한다는 철학을 가진 와이너리다.
오래 묵은 포도나무 고집하는 클라우디오 알라리오
클라우디오 알라리오(Claudio Alario)는 소규모 포도원의 모범과 같은 곳. 생산량은 적지만 50년 이상 된 포도나무에서 딴 포도로만 와인을 만든다. 포도원은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의 규모. 덕분에 클라우디오 알라리오는 매일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가꾼다. 로버트 파커가 와인을 시음하기 위해 직접 찾아와 맛본 후 90점 이상의 점수를 준 얘기는 유명하다. 화가이자 고등학교 미술교사인 친구와 함께 와인을 마시며 느낌과 분위기를 와인 레이블에 그려 넣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