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는 신사복을 분석하기에 가장 좋은 교과서다. <007 살인번호>(1962)와 <007 위기일발>(1963)은 50년 전에 제작된 영화지만 지금의 트렌드와 거의 일치한다. <007 살인번호>에서 제임스 본드에게 CIA 요원이 던지는 첫 인사말이 “그 옷 어디서 한 것이요?”다.
<007 위기일발>은 슈트를 입을 때 적당한 소매 길이까지 명확히 제시한다. 영화에서 호텔에 투숙하기 위한 서류를 꾸민 후, 내려놓았던 가방을 드는 제임스 본드의 소매를 자세히 보자. 재킷의 소매 길이가 짧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셔츠의 소맷부리가 튀어나와 있다. 이렇듯 슈트 상의의 소매 끝으로 셔츠 소맷부리가 약 1.5㎝ 정도 보이도록 입는 것이 적당하다. 반면 우리나라 남성들의 경우 재킷의 소매를 너무 길게 입어 손목을 덮는 일이 흔하다.
숀 코너리와 피어스 브로스넌이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서 평가받는 건, 반듯한 차림새에서 비롯되는 영국신사다운 면모에 있다. 실제 영국의 작위가 있기도 한 두 사람은 현대적 기사라는 첩보원에 걸맞게 어떠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신사적 매너와 위트, 그리고 무엇보다 옷매무새를 잊지 않는다.
영국 슈트는 격식을 우선하면서도 부드러운 균형미까지 갖췄다. 어깨에 얇은 패드만 넣어 전체적으로 남성 몸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 대체로 몸에 꼭 맞는 스타일이다. 이는 이전에 비해 몸에 달라붙고 허리선을 강조하는 최근 신사복의 패션 경향과 닮았다. 또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는 현재에 유행하는 좁은 폭의 넥타이를 매고 나온다. 이는 라펠의 폭과 넥타이의 폭, 그리고 셔츠 칼라의 높이가 같아야 한다는 신사복의 원칙을 철저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잘못 입은 슈트의 예는 우리나라 영화 <국가대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외국 입양아로 어머니를 찾아 유명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주인공 차헌태(하정우 분)가 입은 블랙 슈트가 바로 그것. 미국 국적자로 소개된 그가 입은 슈트는 사실 현지 미국인들이 입지 않는 스타일이다. 서양 사람들은 낮과 밤에 따라 슈트를 달리 입는 게 일반적이다. 아침 방송이라면 차헌태가 입은 슈트처럼 광택 소재는 적당하지 않다. 그렇게 빛나는 옷은 파티나 데이트 때 입는 것이 슈트의 상식.
더 엄밀히 따지자면 이 슈트는 색상부터 잘못되었다. 유럽 스타일에서 블랙 슈트는 장례식이나 이브닝 웨어 같은 특정한 경우에만 입는다. 일상적인 비즈니스나 데일리 웨어로는 입지 않는 것. 하지만 한국에서는 일상적으로 블랙 슈트를 입는 경우가 태반인데, 입을 때 입더라도 그 의미는 알고 입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술 더 떠 <7급 공무원>에는 최악의 패션 실수가 등장한다.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는 순간 각자의 상관이 전화를 하자 남성 주인공인 재준(강지환 분)이 러닝 위에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그러나 드레스 셔츠 안에는 러닝을 입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러닝(Running)은 그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운동 경기할 때 선수들이 입는 소매 없는 셔츠고, 드레스 셔츠는 속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서양에서는 드레스 셔츠 자체가 속옷의 개념이기 때문.
러닝을 입고 드레스 셔츠를 입는 사람들은 겨울에는 내복 대신으로, 여름엔 땀이 나서 러닝을 입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멋쟁이는 드레스 셔츠에 러닝을 입지 않아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다. 드레스 셔츠를 순면 제품으로 입으면 된다. 최근 들어 구김이 덜 가는 혼방 제품이 많이 나왔는데 효율성은 면 제품이 훨씬 뛰어나다.
클래식한 멋을 강조하는 베스트 패션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에서 폴 역의 브래드 피트는 베스트를 받쳐 입은 쓰리피스(Three Piece) 정장을 선보였다. 정통적 예장으로서 베스트를 갖춰 입는 쓰리피스 정장은 클래식 슈트의 기본으로 투피스 정장이 보편화한 현대에도 남성 패션에서 베스트를 빼놓을 수 없다. 옷이 많지 않아 멋 내기가 어렵다면 베스트를 활용해 보자. 격을 갖춘 쓰리피스 정장으로 품격을 높일 수 있고 캐주얼로도 패션에 변화를 줄 수 있어 다양한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다.
보통 베스트의 앞면은 슈트와 같은 옷감으로 만들고 뒷면은 슈트 안감과 같은 감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쓰리피스 정장에서 가장 화려한 패션으로 분류되는, 재킷·바지의 소재와 색깔이 다른 화려한 오드 베스트(Odd Vest)를 갖춰 입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베스트의 뒷면에는 품을 조절할 수 있는 벨트가 있고 수납 기능을 위해 허리 위에 2개, 가슴 부위 2개 등 모두 4개의 포켓이 있다. 중요한 것은 베스트는 몸에 꼭 맞게 입어야 한다는 것! 바지의 허릿단을 감추면서 슈트의 웨이스트 버튼, 즉 가운데 단추 바로 위까지 오도록 입어야 적당하다. 그리고 슈트의 단추를 채웠을 때 그 위로 베스트가 살짝 보이도록 입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보다 더 올라가면 타이를 너무 많이 감추게 돼 답답해 보인다. 또한 베스트 밑으로 셔츠나 바지의 허릿단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베스트의 목선은 셔츠의 칼라 끝을 덮지 않으면서 살짝 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야 그 멋이 제대로 산다.
그리고 베스트를 입을 때 맨 아랫단추는 보통 풀어놓는 게 격에 맞다. 이것은 오래 전 긴 길이의 베스트를 입었을 때 걷기 편하도록 아랫단추를 풀어놓은 것에서 유래했다. 베스트 안에 받쳐 입는 옷이나 재킷의 옷 문양이 겹쳐질 경우 서로 같은 색으로 조화시켜야 한다. 특히 문양의 크기는 바깥옷에서 안쪽으로 갈수록 작아지도록 배열하는 것이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아 세련돼 보인다. 이 패션을 ‘패턴 온 패턴 룩(Pattern on Pattern Look)’이라고 하는데, 원래 같은 소재와 색상으로 입던 밋밋한 의상 대신 이러한 패션을 처음 선보인 사람은 바로 남성 패션에서 최고의 멋쟁이로 통하는 윈저 공이다.
개성과 품위를 살려주는 서스펜더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성>(2008)의 회상 도입부, 마이클(랄프 파인즈 분)은 전라의 정부와는 대조적으로 상의를 걸치지 않은 서스펜더(멜빵) 차림의 중년 신사로 등장한다. 서스펜더 패션은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 강마에가 입어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서스펜더는 바지의 멋인 주름선을 우아하게 표현하는 좋은 소품이다. 바지의 선이 그대로 살아 있도록 해주는 동시에 앉으나 서나 길이를 일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어 슈트의 맵시를 멋지게 연출해 주는 것. 넥타이가 드러나는 액세서리라면 서스펜더는 드러내지 않으며 멋을 연출하는 액세서리다. 또 서스펜더는 벨트와는 달리 허리를 조이지 않기 때문에 몸의 순환작용을 원활하게 한다.
19세기 말 군인들이 군복 허리를 졸라매려 벨트를 사용한 후 현대에 와서 비즈니스 정장이나 스포츠 웨어는 벨트를, 예복에는 서스펜더를 착용하는 것으로 양분됐다. 특히 모닝코트나 디렉터즈 슈트, 이브닝드레스, 턱시도와 같은 남성예복은 서스펜더를 착용해야 한다. 벨트를 사용하면 허리 앞쪽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보여 최고의 예장의 선을 해치기 때문이다. 또한 상의, 하의, 베스트를 받쳐 입는 쓰리피스 정장에서도 벨트 대신 서스펜더가 기본이다.
매너 있는 신사를 나타내는 포켓칩
영화 - 색, 계
<색계>(2007)는 동양권 영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신사복 패션을 제대로 선보인 영화다. 양조위가 열연한 미스터 이는 그를 암살하고자 위장 침투한 막 부인(탕웨이 분) 앞에 넥타이와 포켓칩, 투 버튼 슈트 차림으로 그녀 앞에 다가선다. 그리고 거센 비가 몰아치는 상하이의 거친 날씨에 아무렇지도 않게 포켓칩을 꺼내 상대에 건네고 자신은 손으로 빗물을 툭툭 털어내는 자연스러운 매너를 보여준다. 이렇듯 포켓칩은 여성에 대한 신사의 배려이자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숙녀에게 오물이 묻었을 때 건네라는 뜻이다.
‘행커칩’ 또는 ‘포켓스퀘어’로도 불리는 포켓칩은 오물을 닦는 용도이기 때문에 면 소재면 충분하다. 시중에 나와 있는 넥타이와 같은 소재의 실크 포켓칩은 실용성이 떨어져 엄밀히 말하면 가치가 떨어진다. 고급으로는 흰색 린넨 소재에 가장자리를 손바느질로 마무리한 것이 제격이지만 그리 흔치 않다.
영화에서 양조위가 애용한 포켓칩 형태를 ‘TV 폴드(TV Fold 또는 Square-ended Fold)’라 하는데 아나운서가 반듯한 자세로 이야기하듯 비즈니스 슈트에 가장 잘 어울리는 포켓칩이다. 또 다른 포켓칩으로는 산 모양으로 손수건 자락을 펼친 ‘피크(Peak)’ 형태가 있다. 산의 개수에 따라 쓰리 피크, 투 피크 등으로 부르며 의전행사 같은 공식석상에 쓰는 포켓칩이다. 또 모양은 피크 폴드와 비슷하나 산의 개수가 제한 없이 펼쳐지는 ‘멀티포인티드 폴드(Multi-pointed Fold)’와 모서리가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페탈 폴드(Petal Fold)’도 있다. 마지막으로 볼록하고 자연스러운 주름으로 올리는 형태를 ‘퍼프트 스타일(Puffed Style)’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고 온화한 느낌 때문에 연인과의 만남이나 파티 같은 사교모임 때 어울린다.
<색계>에서 양조위는 TV 폴드 포켓칩과 함께 사선 넥타이를 즐기는데 정보 관료란 샤프한 캐릭터의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맨의 이미지를 주고 싶다면 한번쯤 따라 해도 좋을 아이템이다.
가을 신사의 상징 트렌치코트
추억의 흑백영화 <애수>(1940)의 로버트 테일러는 실내에서는 군 정장, 그리고 밖에서는 항상 코트 차림이다. 영화 속 장교로 등장하는 그가 입은 코트는 ‘트렌치코트(Trench Coat)’라 불리는 남성 정통 코트 중 하나다. 현대에 와서 가볍고 단순해진 어깨 견장과 허리 디자인 등 스타일에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 지금의 것과 비교하여 다를 바 없다.
군복은 남성 클래식의 큰 원류 중 하나다. 다양한 디자인으로 도시적 느낌을 주는 트렌치코트도 다름 아닌 군대에서 명명됐다. 1853년 영국의 아쿠아스큐텀은 비를 막아주면서도 부드러운 촉감의 방수천을 개발하여 크림 전쟁에 레인코트로 납품하여 당시로서는 대단한 효과를 보았는데, 완벽한 방수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후 토마스 버버리가 이를 보완하여 오랜 연구 끝에 개발한 것이 ‘개버딘(Gabardine)’이다. 개버딘으로 만든 코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참호 속에서 싸우는 보병용으로 개발됐는데, 이 참호가 바로 트렌치(Trench)였고 이 개버딘 코트가 바로 지금의 트렌치코트다. 토마스 버버리는 코트의 대명사인 ‘바바리코트’와 명품 브랜드 버버리의 창시자다.
영국에서 명품의 기준은 평생토록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얕은 유행을 좇는 것을 되레 수치스럽게 여기고 자신의 맘에 드는 몇 벌만의 옷으로 수선을 거듭하며 일생 동안 귀하게 입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고집하던 남성들이 영국 상류사회의 남성이자, 바로 영국신사다. 이들의 이런 오만함이 영국 명품을 낳았고 이런 명품의 진정한 스타일이란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체온 보호와 멋 내기가 모두 가능한 더블코트
영화 - 트와일라잇
<트와일라잇> 시리즈(2008~2009)의 배경이 되는 워싱턴 주의 작은 도시 포크스는 북유럽의 전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사시사철 서늘한 느낌을 준다. 로버트 패틴슨이 전편 <트와일라잇>과 속편 <뉴 문>에서 계절적 차이와 상관없이 계속 이어간 패션이 있는데, 바로 단추 많고 더블에다 깃 넓은 반코트다. 바로 ‘브리티시 웜(British Warm)’이라 불리는 코트다. 두터운 모직 제품으로 음습한 날씨에 몸을 보호하면서도 별로 멋을 가하지 않아도 남성미를 표출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이 코트는 영국 군인들이 전장에서 입은 것에서 비롯됐다. 전후 군용물자가 민간에 유통되고 군대 패션의 보편화란 일반적인 패션 경향을 따라 두루 유행한 패션이다. 현재에는 반코트의 한 종류로 분류되는 브리티시 웜은 원래는 양털로 안감을 달 수 있는 짧은 코트였지만 군 복식으로는 조금 길게 변형됐고 벨트를 달아 입기도 했다. 황갈색의 멜튼 울(Melton Wool)이 정통적이며 밤색의 가죽 단추와 어깨 장식이 특징적인 디테일이다.
일반적인 하프 코트(Half Caot), 즉 반코트는 이와 조금 다른데 길이가 짧은 것은 비슷하지만 형태는 더블, 싱글 등 다양하며 어깨 견장과 어깨 패드가 없거나 적다. 전문적으로는 ‘피 코트(Pea Coat)’라 불리는 일반적인 반코트는 어부의 옷차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슈트나 재킷 등 비즈니스 웨어로도 입지만 이 코트의 태생적 특징으로 스웨터나 셔츠 등 캐주얼한 옷과 함께 스포티한 느낌으로 입었던 옷이었음을 알아두자.
정통적인 멋과 실용성을 겸비한 체스터필드 코트
겨울영화 하면 떠오르는 <러브 스토리>(1970)에서 올리버(라이언 오닐 분)는 영화 내내 재킷과 바지를 달리 입는 ‘따로 갖춤(Seperated Combination Suit)’ 차림이다. 따로 갖춤은 같은 색으로 상·하의를 입는 일반 슈트보다 고급스러울 뿐만 아니라 캐주얼함을 겸비하기에도 제격이다. 영화 초반 올리버의 외출복은 가장 정통적인 스타일의 체스터필드 코트(Chesterfied Coat) 차림이다. 이 코트의 명칭은 당대의 패셔니스타이자 신사였던 영국의 체스터필드 백작의 이름을 딴 것이다. 색상은 회색 헤링본(Herringbone; 생선뼈와 같은 무늬)이나 검은색, 진한 청색, 베이지색의 무늬 없는 것이 정통이다. 싱글과 더블 두 종류가 있으며 깃 상단에 검은색 벨벳으로 품위를 더하기도 하는데, 원래는 전쟁에서 숨져간 전사자들을 위로하는 의미에서라고 한다.
부모님을 뵈러 가기 전 올리버는 예비 아내인 제니퍼의 피아노 발표회장을 나와 눈발 날리는 바깥에서 헤링본 무늬가 선명한 체스터필드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가는 클래식 오픈카 안에서는 또 다른 코트를 입는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코트는 두벌이 아닌 한 벌이다. 바로 안과 밖을 뒤집으면 달리 입을 수 있는 코트다. 가장 포멀한 체스터필드 코트를 실용주의적 캐릭터답게 효율적으로 입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