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는 타인의 의견이나 주장을 따르거나 보조를 맞추는 일이다.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인간은 모두 남의 말을 들으면 자기 생각을 덧대지 않고 일단 고개를 끄덕이려는 성향을 품고 있다. 집단의 규범을 존중하고, 공동체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려는 기질을 타고난다. <동조하기>(열린책들 펴냄)에서 캐스 선스타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인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동조 현상이 오늘날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동조는 집단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갈등을 최소화하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한다. 이는 진화 과정에서 인류가 자신들보다 더 빠르고, 더 강하고, 더 건장한 포식자들을 무찌르고 이겨낼 힘을 주었다. 그러나 동조는 위험한 힘이기도 하다. 안데르센이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풍자했듯, 집단 착각을 부추겨 공동체 전체를 미망에 빠뜨리기도 하는 까닭이다. ‘멍청한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옷’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나, 동화 속 사람들은 모두 멍청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서로 감시하면서 감탄을 터뜨린다. 한 아이가 웃음으로 진실을 알리기 전까지 말이다.
미국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의 ‘동조 실험’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밝혀냈다. 그는 흰 종이에 길이가 확연히 다른 선 세 개를 그은 후, 피험자에게 기준선과 같은 길이의 선을 고르도록 했다. 처음에 혼자 고르게 했을 때, 피험자들은 99% 이상 정답을 골라냈다. 그다음은 여러 사람과 함께 고르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틀린 선을 고르게 시켰다. 그러자 피험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슬그머니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따랐다. 선스타인은 말한다. “다수 견해에 동의하는 공개 진술은 오류일 수 있는 동시에 본심이 아닐 수 있다.”
동조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정보가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 행동을 이끄는 편향이다. 이럴 때 망설이며 눈치 보던 사람들은 타자의 판단을 최선으로 여기는 성향이 있다. 특히, 사람들은 의지가 강한 사람을 추종하곤 한다. 누군가 강하게 주장하고 소수라도 그를 좇으면,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지레짐작하면서 우르르 뒤쫓는다.
일단 다수 의견이 형성되면, 사람들은 그 의견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자기 생각이나 속내와 다를지라도 거기에 쉽게 편승한다. 평판에 민감한 까닭이다. 평판은 개인의 사회적 삶을 결정하기에 여간한 용기 없이 소속 집단에서 배제될 위험을 안고 반대 의견을 드러내긴 힘들다. 게다가 적대 집단이 있다면, 사실이나 진실은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 소속 집단이 틀렸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그 집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배신의 낙인이 오류보다 무섭기 때문이다.
이런 동조 현상이 심한 사회는 잘못된 길에 빠져든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에서 흔히 하는 토론 프로그램은 시각 교정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사전에 편 갈라 다투면, 외려 다양성을 훼손하고 극단주의를 부추긴다. 같은 의견을 반복하는 건 확증편향을 퍼뜨릴 가능성이 크다. 소셜미디어는 더 위험하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자주 의견을 주고받을수록 ‘집단 극화’에 빠져 극단적 견해로 치닫게 된다. “다른 사람이 당신 관점을 공유하고 당신 믿음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당신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일찍이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동조, 즉 다수 가치관을 무조건 따르려는 인간 속성을 ‘가축 떼 도덕’이라는 말로 통렬히 비판했다. “오늘날의 도덕은 가축 떼의 도덕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독립적인 정신을 품은 자들을 위험인물로 낙인찍고 배척한다.” 그에게 동조는 독창적 개인이 탁월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 거대한 장벽으로, 비범한 자를 하향 평준화해 범속하게 전락시킨다. 창조는 동조를 벗어나 낡은 도덕에 도전하는 데서 시작된다. “창조자가 되려는 이는 먼저 기존의 모든 가치를 파괴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높은 동조율은 비효율을 낳는다. 다른 의견이 없어지면 창조적인 생각도 사라진다. 덴마크 경제학자 브룩 해링턴은 주식 투자 클럽 연구를 통해서 동조 현상이 저성과와 연결됨을 알아냈다. 그에 따르면, 실적 좋은 클럽들은 수익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반대 의견을 활달하게 교환했다. 반면, 실적 나쁜 클럽은 사회적 유대 관계를 중심으로 굴러갔다. “이런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걸 이야기할 가능성은 작고, 반대 의견을 뭉갤 가능성은 컸다.” 표결은 대부분 만장일치로 나타났고, 공개 토론도 존재하지 않았다. 현실을 제대로 안 읽는데, 좋은 결과를 얻는 건 불가능하다. “대다수가 동조하고 천편일률적으로 사고할 때 사회는 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동조 현상을 차단하고 맹목에서 벗어나려면, 니체가 말하는 창조적인 인간, 즉 다른 의견을 품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애시의 마지막 실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세 번째로 애시는 한 사람은 올바른 선을 고르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린 선을 고르게 한 후, 피험자를 들여보냈다. 그러자 다수가 오답을 말하는데도, 자기 생각대로 정답을 고르는 피험자가 크게 늘었다. 다양성을 옹호하고 소수자를 우대하는 사회일수록 진실이 작동하기 쉽다. 선스타인은 이야기한다.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제도는 동조자들에게 반대자들을 보고 배울 기회를 보장한다.”
그런데 진실이 현실을 이기려면 누군가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동조를 거부해야 한다. 동조가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면,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진실을 우선하는 고결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법학자답게 선스타인은 누구나 마음에 품은 진실을 공개적으로 표출할 자유를 법으로 보장하고, 그 일로 인해 그 사람이 평판을 잃지 않도록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환경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이전에 먼저 주체의 실존적 변화가 필요하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자기 돌봄’의 기술을 익힘으로써 집단 동조에 저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돌봄이란 나를 다듬고 훈련하고 변형해 바라는 상태에 도달하게 만드는 실천을 뜻한다. 주체가 진실에 도달하려면 먼저 영성을 단련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거듭나야 한다. 이는 공자가 말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 즉 자신의 품성을 자르고 깎고 쪼고 다듬는 실천과도 큰 맥락에서 통하는 말이다.
푸코는 자기 돌봄의 기술로 살피기, 기록하기, 듣기를 제시한다. 살피기는 욕망을 절제하는 훈련을 통해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기록하기는 매일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읽고 행동한 것을 기록하면서 외부 지식을 체화하는 것이며, 듣기는 진리를 자기 삶의 준칙으로 삼기 위해 타인의 조언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 세 기술을 통해 자신을 꾸준히 단련하는 사람은 동조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하나의 독창적 예술 작품처럼 빚을 수 있다. 바깥의 견해나 의견, 외부에서 부여한 정체성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삶의 양식을 조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권력이나 집단의 위력 앞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좋은 삶은 이런 실존의 미학에서 나온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