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경제지식에 집착한 고용노동부의 무책임한 규제와 여기에 무한정 끌려가고 있는 금융위원회 등의 무관심 때문에 국민의 노후를 책임질 큰 축 가운데 하나인 퇴직연금 수익률이 극도로 저조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세금 같은 국민연금으로 수입의 상당부분을 뜯긴 뒤 퇴직연금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많은 근로자들의 노후를 위협할 소지가 있다. 이는 강제로 앗아간(?) 자금을 특정 부문에 밀어 넣는 꼴이어서 국가 전체의 자원배분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은행 증권 보험 등 퇴직연금사업자들이 공시한 지난해 퇴직연금 운용수익률은 거의 대부분이 국민연금 주식투자 수익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수익이 나지 않는 복지부문 운용까지 포함한 국민연금 전체 수익률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많은 회사에서 실적배당형(비원리금보장형) 퇴직연금 수익률이 기준금리에도 미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1% 미만의 저조한 성과를 낸 곳도 적지 않았다. 원리금보장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대부분 AA-급 회사채 유통수익률보다는 높았지만 은행의 신탁대출 평균금리보다는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매일경제 <LUXMEN>이 은행과 증권 생명보험 손해보험사 등 퇴직연금사업자들이 금융감독원에 공시한 2013년 퇴직연금 수익률을 집계한 결과 은행권 전체의 실적배당형 퇴직연금 수익률은 확정급여형(DB형)의 경우 평균 1.66%에 머물렀고 손보업계의 경우 이 수익률이 평균 1.25%에 불과했다. 특히 수협의 실적배당형 퇴직연금 수익률은 단위조합이나 기업들을 상대로 판매하는 DB형조차도 마이너스 0.25%를 기록해 전 금융권을 통틀어 유일하게 손실을 냈다. 또 같은 DB형 퇴직연금에서 광주은행이 0.7%, 기업은행 0.9%, 대구은행 0.93% 등으로 1%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수익률을 올리는 데 그쳤다.
생보업계의 실적배당형 퇴직연금 중에선 동부생명의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이 0.5%를 내는 데 그쳤고 IBK연금보험의 DB형 수익률도 0.54%에 머물러 가입한 기업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현행법상 퇴직연금은 기업이 직접 연금을 운용하다가 근로자가 퇴직할 때 확정된 금액을 지급하는 확정급여형(DB형)과 기업이 일정한 금액을 매년 금융기관에 지급한 뒤 근로자 개인이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 등이 있다. 또 운용상품에 따라 원금이 보장되는 상품에만 투자하는 원금보장형과 주식이나 주식형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하는 비원리금보장형으로 다시 구분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DB형이나 DC형 IRP를 막론하고 모든 퇴직연금은 가입한 기업이나 근로자 개인이 운용 수익률의 최종 책임을 지는 구조라 퇴직연금사업자인 취급금융기관은 수익률과 무관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DB형의 상당부분은 꺾기 형태로 기업이 주거래 금융기관에 가입하고 있는 실정인 데다 퇴직연금사업자가 추천하는 상품을 편입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실질적으로 수익률을 공시한 금융기관의 운용능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정부는 퇴직연금 도입 초부터 가입자에게 운용의 자율권을 주지 않고 퇴직연금사업자가 ‘퇴직연금 가입자의 투자성향이나 투자위험 등을 감안해 적립금 운용방법을 제시할 것’을 명문화했다. 저조한 실적의 도덕적 책임은 1차적으로 퇴직연금사업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업자들이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는 일을 등한시한 게 국민연금에 비해 형편없는 성과를 내게 만들었다.
국민연금에 턱없이 밀리는 퇴직연금
형편없는 퇴직연금 수익률의 근본적 책임은 고용노동부와 금융위에 있다. 그 이유는 국민연금 수익률이 말해준다. 지난해 국민연금은 주식 부문에서 8.48%의 수익률을 올렸고, 복지부문까지 합한 전체 수익률도 4.19%를 기록했다. 이에 비해 퇴직연금 수익률은 형편없다고 할 정도다. 15사가 참여한 은행권의 원리금보장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은 확정급여형(DB형)과 확정기여형(DC형) 모두 3.78%였고 개인형퇴직연금(IRP)은 3.55%로 집계됐다. 반면 실적배당형 퇴직연금의 13사 평균 수익률은 DB형이 1.66%에 그친 것을 비롯해 DC형이 1.80%, IRP는 2.18%로 아주 저조했다. 13개 사업자가 있는 증권업계의 원리금보장 퇴직연금 평균수익률은 DB형이 3.84%, DC형 3.62%, IRP 3.60% 등으로 나타났다. 증권업계의 실적배당형 퇴직연금 수익률은 DB형이 3.33%인 것을 비롯해 DC형은 3.5%였고 IRP 3.66% 등으로 은행권에 비해선 전체적으로 나았지만 역시 국민연금 수익률을 훨씬 밑돌았다. 역시 13개 퇴직연금사업자가 있는 생명보험업계도 원리금보장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이 DB형은 3.86%였고 DC형 3.73%, IRP 3.87%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실적배당형 퇴직연금 수익률은 DB형이 2.8%인 것을 비롯해 DC형 2.99%, IRP 3.27% 등으로 낮았다.
6사만이 참가한 손해보험업계의 수익률은 더 저조했다. 원리금보장 퇴직연금의 평균 수익률은 DB형이 3.79%, DC형이 3.66%, IRP가 3.81% 등으로 다른 금융권과 근소한 차이를 유지했으나 실적배당형 퇴직연금에선 DB형이 1.25%에 머문 것을 비롯해 DC형 2.65%, IRP 2.87% 등으로 저조했다.
427조원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자금을 굴리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운신이 둔할 수밖에 없는 국민연금이 비교적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데 비해 운신이 가벼운 퇴직연금사업자들의 수익률이 저조한 수준에 머문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강제로 연금 만든 정부 운용은 못하게 방치
전문가들은 퇴직연금 수익률이 이처럼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고용노동부 주도로 만든 퇴직연금은 애초부터 근로자의 수급권만을 강조한 나머지 수익률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이 초기에 제시한 퇴직연금 투자방법을 보면 이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지난 2005년 퇴직연금 출범 초기 금융감독원은 퇴직연금 설명 자료를 통해 은행의 예·적금을 1순위 투자대상으로 내세웠다.
이어 보험상품이나 상장주식과 투자적격채권 수익증권 등 유가증권, 기타발행어음이나 표지어음 등을 제시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인정할 수 있지만 유가증권에 대해서는 증권거래법상 유가증권이면서 위험성이 크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를 붙여 사실상 주식투자를 제한했다. ‘위험성’이란 단어 때문에 천편일률적으로 주식을 위험자산 취급하는 공무원들의 속성상 주식이나 주식형 펀드는 애초부터 관심에서 제외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은 실제 운용규정을 만들면서도 기업이 책임지는 확정급여형에 대해선 주식이나 주식형펀드를 30%까지 편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근로자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운용하는 확정기여형에 대해선 아예 주식이나 주식형펀드 투자를 금지했다.
이 때문에 퇴직연금은 은행권의 저금리 수신상품이나 보험사의 저금리 보험상품에 묶인 상태다. 이는 고용노동부가 집계한 지난 12월 말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에 잘 나타나 있다.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의 58.5%가 예·적금에 들어가 있고 국공채가 0.35% 보험상품이 32.5%, 펀드나 주식 등 금융투자상품 5.3% 기타 3.35% 등으로 기형적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매년 천문학적 자금 묶어버리는 정부
문제는 퇴직연금이 국민연금에 버금가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강제로 빼앗아 놓은 자금을 묶어놓는 정책이 경제전체의 자원배분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연말 기준 누적 퇴직연금 적립금은 84조2995억원으로 주식형펀드 설정액 83조2741억원(3월 17일 기준)보다 많았다.
연도별로 퇴직연금 적립금은 2006년 7567억원에서 2007년 2조7550억원으로 소폭 늘어나다가 2009년엔 14조247억원으로 급증했고 이후 2011년 49조9167억원, 2012년 67조3459억원, 2013년 84조2995억원 등으로 최근엔 연간 17조원 전후씩 늘어나고 있다. 경제에서 원활하게 돌아가던 대규모 자금이 갑자기 법에 의해 퇴직연금이란 그물에 걸려 은행예금이나 보험상품으로 묶여버리고 마는 셈이다.
기업이나 근로자 개인의 입장에선 이 같은 거대한 자금을 정부가 강제로 예금이나 채권 같은 수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상품에 묶어놓음으로써 정상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국민연금 수준의 수익률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이 자금에서 매년 날려버리는 기회비용은 수조원에 달한다. 무지한 공무원 때문에 기업과 근로자의 이익이 날아가 버리는 셈이다.
정부는 퇴직연금의 문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지난 2011년부터 DB형의 주식투자 한도를 늘리고 DC형에도 주식이나 주식형펀드 투자를 허용하겠다고 수없이 발표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실행에는 옮기지 않고 있다. 지난 2012년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을 개정해 놓고도 고용노동부의 고집에 막혀 구체화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12월 금융위원회가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에 대해 주식투자를 허용하겠다고 밝혔지만 고용노동부는 즉각 반박자료를 내며 전혀 검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금융위조차 퇴직연금 수급권자인 근로자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위가 지난해 12월 퇴직연금 주식투자 한도 확대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자료 역시 근로자를 위한 게 아니라 ‘자본시장의 역동성 제고 방안’의 하나로 다뤘을 뿐이다. 고용노동부나 금융위나 기업이나 근로자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이미 근로자들에게 지급해 자율적 운용을 허용한 확정기여형(DC)에 대해서조차 여전히 수급권을 내세워 아예 주식형 펀드조차 가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부가 퇴직연금을 쥐고 흔들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며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 중앙정부가 지난 3월초 공적임금(GRIF)의 수익률을 높이기위해 보다 공격적 투자를 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