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의 주력회사인 대한항공과 세 명의 오너 3세들은 2009년 4월 한진지티앤에스라는 회사를 세웠다. 대한항공이 25%를 출자했고 조현아와 조원태 조에밀리리(조현민) 등이 모두 똑같이 25%씩 나눠서 지분을 보유했다.
이렇게 설립한 한진지티앤에스는 2010년 10월 29일 삼성전자 등으로부터 4679대나 되는 PC를 한꺼번에 구입했다. 금액으로 35억5964만 원어치다.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회사가 이 많은 PC를 모두 쓸 리 만무했다. 사용할 곳이 정해진 임대용이었는데 이들의 회사가 업무를 대행한 것이다. 고물을 떼기 위한 거래였던 셈이다.
한 달이 약간 지난 그해 12월 3일, 이 회사는 대규모로 구입한 PC를 고스란히 금융회사인 맥쿼리파이낸스코리아에 팔았다. 물론 실제로 판 것은 아니다. 매각 후 재임차 조건이었으니 자금만 돌리고자 한 거래이다. 그런데 이후 정치권을 중심으로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사업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자 한진지티앤에스는 2012년 초 영업권 전체를 대한항공에 넘기고 해산했다.
#화승그룹의 화승알앤에이는 지난 2010년에 470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으나 계열사의 사업중단 손실이 667억4400만 원이나 발생하는 바람에 255억2300만 원(차후 314억 원으로 수정함)의 손실을 냈다고 발표했다.
이 회사는 그해 3분기 결산까지는 영업을 잘 해왔고 상당한 규모의 이익을 낸 것으로 공시한 바 있다. 회사 측은 갑자기 대규모 적자를 낸 데 대해 화승네트웍스의 미국 법인인 화승네트웍스아메리카의 잘못된 계약으로 대규모 손실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이 회사의 계열사 현황에는 화승네트웍스는 물론이고 화승네트웍스아메리카의 지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2007년 말 그룹 지분 현황을 보니 화승알앤에이는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화승소재를 통해 화승네트웍스 지분 66.67%를 보유했고, 35.88%를 보유하고 있는 화승을 통해 화승네트웍스 지분 33.33%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화승네트웍스는 화승네트웍스아메리카 지분 100%를 들고 있었다. 한편 화승알앤에이는 지분 35.73%를 보유한 화승인더스트리를 통해 화승 지분 47.92%를 보유하고 있어 이쪽으로는 네 단계를 건너 화승네트웍스아메리카의 지분을 일부 보유했다. 대충 계산해도 화승알앤에이는 당시 화승네트웍스아메리카의 지분 85% 정도를 들고 있었는데 손실을 즉시 공표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손실이 2010년 4분기에 발생한 게 아니란 점이다. 이와 관련해 화승알앤에이는 2011년 3월17일 감사보고서 정정신고를 냈는데 여기에선 전기 재무제표 수정을 통해 2009년 말 결산에 화승네트웍스아메리카의 손실을 반영했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지분구조를 통해 대규모 손실을 1년 이상 은폐한 셈이다.
기업들의 이런 행태가 지난 대선에서 정치권의 표적이 됐다. 당시 새누리당은 △경제적 약자의 확실한 권익 보호 △공정거래 관련법의 집행 체계 획기적 개선 △대기업집단 관련 불법행위나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엄격 대처 △기업 지배구조 개선 △금산분리 강화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민주통합당은 상생과 협력의 경제생태계, 재벌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 완화 등 14개항의 공약을 내세웠지만 정치적 표현은 재벌 규제에 집중했다.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 재도입 △지주회사 행위 규제 강화 △금산분리 강화 △재벌 총수 일가의 부당한 사익 추구 행위 근절 △재벌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 등 재벌 대책을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새누리당의 공약을 ‘짝퉁’이라고 비판하며 ‘경제민주화’의 선명성을 강조했다.
경제민주화는 정치적 구호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는 무엇이고, 경제는 또 민주화가 될 대상인가.
이에 대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민주화’가 정치적 구호였듯이 경제민주화 역시 정치적 구호의 하나라고 한다.
송옥렬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밖에서 보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서로 다른 얘기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데다 아예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논의조차 안 된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민주화가 우리 역사에서는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다”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민주화는 재벌그룹을 독재 권력처럼 인식하고 있는 데서 기인한 것인데 이는 문제의 인과관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인봉 경북대 교수도 “경제민주화는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용어”라고 비판했다. 다만 경제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국가주의를 강조한 데서 인본주의를 강조하는 국민 정서가 반영된 구호라며 이런 면에서 국민의 생활안정과 직결된 고용이나 물가 안정을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처럼 전문가들조차 관점을 달리하고 있는 개념이 경제민주화지만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분배나 복지 증진, 공정경쟁에 대한 요구는 이미 오래전에 제기됐던 것이고 또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반복되는 것이기도 하다.
실례로 분배문제는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 열기를 타고 크게 부각된 바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엔 상대적 박탈감이 표출된 반면에 이번엔 절대적 박탈감이 부각됐다는 점이다. 80년대 후반엔 전반적으로 경제가 안정돼 전 계층의 소득이 늘어나는 가운데 최상층의 소득 증가 속도에 비해 하층의 소득 증가 속도가 더딘 데서 갈등이 불거졌다. 그러나 최근엔 정부가 급등하는 물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데다 일자리마저 크게 줄어들어 저소득층의 실질소득이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순환출자 해소나 출자총액제한제도 등도 이미 10년 전에 제기됐던 이슈들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엔 재벌의 독과점 폐해를 견제하는 한편 기업의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순환출자를 인정했다. 노무현 정부에선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대기업의 투자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이유로 대폭 완화했고 이명박 정부에서 이를 아예 폐지했다.
그런 이슈들이 이번 대선에서 다시 불거진 것은 정치권에서 대기업 집단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게 수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부의 집중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일부 기업들이 부도덕한 행태를 보인 것도 빌미를 줬다.
결국 이번 대선에서 정치권은 국민적 요구의 본질을 제쳐놓은 채 정치적 선동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정부를 상대로 복잡한 분배문제를 따지는 대신 대중에게 호소력이 큰 구호를 주창하다 보니 본말이 전도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