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시절인 1979년에 제작된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Moscow Does Not Believe In Tears)>는 근사한(?) 제목 덕분에 국내 영화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국내에서는 소련과 수교를 앞두고 10년 뒤인 1989년에서야 비로소 상영됐지만 1981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을 만큼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영화는 3명의 여성 공장 근로자들 각자의 삶의 애환을 담고 있다. 영화 제목은 ‘성공을 위해서는 한가하게 울고있을 수 없다’ ‘절망(눈물)을 거두고 노력하면 빛이 보인다’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듯 하다.
난데없이 친숙하지 않은 소련(러시아)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지난 3월 4일 러시아 대선 직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당선자가 흘린 눈물 때문이다. 푸틴이 모스크바 크렘린궁 옆 마네쥐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자신을 뽑아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는 와중에 굵은 눈물방울이 오른쪽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전 세계 매스컴은 철권으로 여겨왔던 푸틴이 눈물을 떨구는 장면을 놓치지 않았고 이후 그 의미를 해석하는 데 분분했다. 작년 말 총선 후 불거져 나온 부정선거 여파로 곤란에 처한 현 상황이 떠올랐을 것이고 그래도 자신을 믿어준 국민에 대한 고마움, 러시아인 특유의 강한 애국심과 감성이 혼합된 눈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反) 푸틴 진영은 장기 독재에 대한 비난을 무마하기 위한 ‘정치쇼’라고 주장하면서 이후 집회에서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영화 내용과의 연계는 찾을 수 없지만 푸틴 눈물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푸틴은 여전히 냉전시대를 살고 있나
지난 5월 출범한 제3기 푸틴호(號)는 이렇게 우여곡절 속에 시작됐다. 푸틴의 집권 1기(2000~2004년)는 보리스 옐친의 지명과 형식적인 선거를 통해 2기(2004~2008년) 때는 ‘오일달러’에 힘입은 압도적인 인기로 당선됐던 것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푸틴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향해 거침없는 말을 쏟아낼 때마다 냉전 종식후 망가진 러시아인들의 자존심을 살려준 지도자로 여기게 했던 약발은 서서히 떨어지고 있다. 매스컴을 통해 종종 등장하는 ‘몸짱’ 푸틴의 모습은 더 이상 신선하지 않다. 이제는 많은 러시아인들이 여론조작을 위해 연출된 화면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
무엇보다 이집트, 알제리, 리비아 등 아랍권 국가의 장기 독재자들이 실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푸틴의 장기 집권에 대한 염증이 커지고 있다.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바꿔 잘하면 오는 2024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다. 총리로 있으면서 상왕(上王) 통치를 한 기간(2008~2012년)까지 포함하면 자그마치 24년이다. 소련을 통틀어 최장수 서기장을 지낸 이오시프 스탈린(31년, 1922~1953년)을 빼면 레오니드 브레즈네프(18년, 1964~1982년), 니키타 흐루쇼프(9년, 1955~1964년)를 뛰어넘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재집권은 소련 역사에서 보듯이 인물난이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다.
과연 푸틴은 시대에 맞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2000년 1월 병든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을 대신해 집권한 뒤 가파르게 솟아오른 기름값 덕분에 러시아의 정치·경제·사회적 안정을 이뤘고, 푸틴은 이를 기반으로 ‘강한 러시아’를 외치며 국제무대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이라크 전쟁, 이란핵문제를 비롯해 최근 시리아 사태에 이르기까지 국제현안에서 미국과 대결구도를 그리고 있다. 얼마 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민중 학살로 퇴진 위기에 처한 아사드 시리아 정권에 러시아가 약속과 달리 공격형헬기를 공급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을 견제하는 푸틴의 발언과 행보들, 또 나이가 들수록 국가보안위원회(KGB) 스타일의 표독함과 비밀스러움이 묻어나는 푸틴의 얼굴을 보면서 많은 이들은 푸틴이 아직도 냉전적 사고에 함몰돼있는 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푸틴은 작년 말 총선 부정 항의시위에 대해 “클린턴이 선거 불공정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시위대에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지난 2009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푸틴의 악의에 찬 발언은 잊혀지지 않는다. 미국 컴퓨터회사 ‘델(Dell)’의 마이클 델 회장이 푸틴의 기조연설 직후 공개적으로 “러시아의 정보기술(IT) 발전을 위해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는가”라고 묻자, 푸틴은 “우리에게 도움은 전혀 필요없다. 우리는 병자가 아니며 우리의 지적능력은 무한하다”고 답했다. 당시 델 회장이 러시아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어떠한 말투와 제스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푸틴의 발언은 러시아가 외국인 투자 유치를 촉구하는 마당에 좀 과도했다. 푸틴 역할의 한계론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임자인 옐친 시절의 혼란한 러시아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가 외치는 ‘강한 러시아’ 기틀을 마련하는 것까지가 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푸틴 이후에는 테크노크라트 같은 실무형이나 서방과 협력을 통해 러시아의 실질적인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화합형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인 연방보안부(FSB) 수장을 지낸 푸틴의 경력상 미국과 대립각을 쌓는 것은 궁극적으로 러시아 위상과 성장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소통이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반 푸틴 세력에 대한 집권 여당의 낮은 포용력은 향후 심각한 사회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최근 여당이 다수당인 국가두마(하원)가 집회법 위반자에 대한 벌금을 150배나 인상하는 수정안을 가결한 것은 한 예다.
주민 복지와 낙후된 지역개발로 민심 달래
푸틴과 러시아 정부도 변화를 인식하고 있다. 작년 말 총선을 기점으로 불 붙기 시작한 민심 이반을 달래기 위해 대선 공약도 복지에 관심을 두고있다. 교수, 의사 등 전문직과 경찰의 임금을 2배로 올리는 것을 비롯해 2자녀 이상 가구에 월 7000루블(27만원) 지급, 향후 20년내 일자리 2500만개 창출 등을 내걸었다. 날로 커지는 빈부 격차에 대응하기 위해선 내년부터 호화주택, 고급승용차, 요트 등에 일명 ‘사치세’를 도입하기로 했다. 혹자는 1990년대 무분별한 민영화로 국가자산을 헐값에 넘겨받아 막대한 부를 쌓은 올리가르히(과두재벌)들을 과세하자는 의견도 제기하고 있다. 어쩌면 빈부 격차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였던 러시아인들도 미국 월가 시위 등을 보면서 부의 불평등성에 대해 문제인식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부의 재편 문제는 단순히 개인 차원만이 아니라 지역 간 개발의 불균형성과도 맞물려 있다. 모스크바와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이상을 빨아들이고 있지만 극동과 시베리아 등 모스크바에서 멀어질수록 낙후된 상태에 놓여있다. 한마디로 ‘지역 발전 여부는 모스크바와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말로 정의된다.
푸틴은 2000년 부임 직후 지방에 대한 영향력 제고를 위해 전국을 7개의 연방지구로 나눴는데(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은 2010년 카프카스 연방지구를 추가) 모스크바가 속한 중앙연방지구와 기타 지역 간에 인구 외국인투자, 교역액, 산업생산 등 격차가 심각하다. 예컨대 대러시아 외국인투자의 경우 2009년 말 기준으로 전체 819억2727만달러로 이 중 중앙연방지구는 절반이 넘는 494억3582만달러(60.3%)에 달한다. 중앙연방지구 내에서도 다른 주(州)들에 비해 모스크바가 413억1689만달러로 압도적이다. 반면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시베리아연방지구(27억3252만달러)나 북한과 접경한 극동연방지구(79억7524만달러)로 러시아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같은 해 수출의 경우(CIS는 제외)도 모스크바가 1057억5140만달러인 반면 시베리아연방지구, 극동연방지구에 속한 지역을 전부 합해도 각각 228억9230만달러, 119억5050만달러에 불과했다.
지난 3월 미국 포브스지(誌)가 발표한 순자산 1억달러 세계 부호 가운데 러시아인은 101명으로 이들 중 79명이 모스크바에 거주한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는 전 세계에서 부자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됐고, 이들의 자산 총합은 러시아 전체 GDP의 30%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러시아 내부에서 일명 ‘올리가르히(신흥재벌)세’를 신설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 재원으로 개인 간 빈부 격차 해소는 물론 낙후된 지역개발에 활용하려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러시아 개발 박차
후진타오와 함께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그
러시아의 지역개발 후보지 중 최근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리는 곳은 극동연방지구내 연해주에 속한 블라디보스토크다. 러시아극동에서 하바로프스크와 함께 가장 큰 도시로서 면적은 561㎢로 대전광역시(540㎢)와 비슷하지만 거주인구는 약 58만명에 불과하다(대전은 152만명).
모스크바로부터 동쪽으로 9288km나 떨어져 있고, 시차는 무려 11시간에 달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한자로 ‘해삼위(海蔘威)’로 불린다. 이곳은 일제시대 러시아로 건너간 독립투사들의 주요 활동무대였고,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주둔해있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오는 9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장소로 눈길을 끌고 있다. 행사가 열리는 루스키 섬과 육지를 잇는 3km가 넘는 연륙교 건설을 비롯해 호텔, 컨벤션센터, 도로 등 인프라스트럭처 확충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이는 APEC 개최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를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해서 극동 지역개발을 가속화한다는 취지다. 물론 러시아 당국의 극동 및 시베리아 개발 계획은 소련 시절과 옐친 집권기에도 마련되기 했지만 구체적인 움직임은 APEC 개최 확정을 앞두고 시작됐다.
과거 극동 개발방안은 중앙정부 예산 지원이 부족해 실행력이 없었지만 ‘2013 극동발전전략’은 7000억루블(약 25조2000억원)이 넘는 막대한 사업계획을 세우고 이 중 중앙정부가 75%를 조달할 예정이다.
러시아 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극동러시아의 수도’로까지 여기며 중시하는 이유는 극동 개발의 기폭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중국발 안보 우려 때문이다. 극동 지역은 낙후된 사회기반시설과 불편한 생활환경, 일자리 부족 등으로 러시아인들의 이탈이 늘면서 중국에 텃밭을 넘겨줄 위기에 처해 있다. 극동연방지구의 전체 인구는 2009년 말 기준으로 644만여 명으로 계속 떨어지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속한 연해주 역시 2000년 212만여 명에 달했지만 2009년 말에는 198만여 명까지 떨어졌다.
푸틴은 올 대선 출마직전 러시아 신문인 ‘모스코프스키예 노보스티’에 기고한 글에서 “역동적으로 강화하는 중국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극동에서 불고 있는 중국풍(風)에 대한 우려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극동에서 중국의 위협 요인을 우려하기보다는 중국 바람을 활용해 미진한 극동 개발을 진척시킨다는 전략이다. 극동 지역에는 광물과 연료에너지 자원이 풍부하지만 경제구조가 자원 채취 분야에 편중돼 있다. 우리나라가 극동러시아 전체 수입액 가운데 사할린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2001년 45%에서 2008년 81%로 높아졌는데, 이는 결국 원유 같은 자원 수입이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연자원을 가공하기 위한 제조업과 운송을 위한 기반시설은 크게 부족하다.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러시아는 우리에게 에너지 확보기지로서도 중요하지만 개발이 덜 된 미지의 땅에 각종 인프라스트럭처 건설사업으로 뛰어들 기회가 무궁무진한 곳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국익과 관련된 남·북·러 가스관 연결이나 TSR(시베리아횡단철도)-TKR(한반도종단철도) 연결사업, 전력망 연계 등 3대 대형 프로젝트가 극동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개별 사업의 경우 나호트카 석유화학단지 건설, 블라디보스토크 및 하바로프스크 국제공항 현대화,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고속철도 사업, 블라디보스토크 곡물터미널 건설, 보스토치니 항만특구 건설프로젝트 등 우리 기업들의 참여를 요하는 사업들이 많다.
알렉산드르 레빈탈 극동연방지구 대통령 전권부대표는 “러시아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예전부터 정치적 갈등이 있어 극동 개발을 이들에게 내주는 데 불편함이 있지만 한국은 그런 염려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정서”라며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인 진출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실제 지난해 극동러시아의 대외교역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중국과 일본을 제치고 가장 높다. 블라디보스토크 KOTRA KBC(무역관)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극동러시아(연해주, 아무르주, 유대인자치주, 캄차카주 등 9개)와의 교역액은 전년(2010년)보다 50% 상승한 93억6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우리나라가 극동에서 수입한 규모가 80억달러로 많아 무역적자지만 극동 전체 교역 가운데 우리나라 비중은 27.6%로 중국(24.9%), 일본(22.9%)을 앞질렀다.
러시아 경제의 숙제, 자원의존 줄이고 경제통합 강화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를 풀어라!’
낙후된 지역개발과 함께 푸틴호의 경제분야 과제 중 하나는 에너지자원에 편중된 경제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2000년대 들어 금융위기가 가라앉고 고유가에 따른 호황을 맞았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자원의존도가 높은 후진적 경제구조를 타파해야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해왔다. 푸틴 역시 임기 만료를 앞둔 지난 2007년 국가두마 연설을 통해 러시아가 오는 2020년까지 세계 5대 경제강국에 진입할 것이라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당시 그 가능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부정적인 시각이 다수였다. 러시아의 높은 자원의존형 경제구조는 외부 변동에 취약해 안정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국제유가 하락 등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 러시아 경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변동성이 훨씬 커진다. 배럴당 국제유가가 1달러 하락하면 러시아 정부의 수입은 연간 14억달러가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에 따라 푸틴 3기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원의존형 경제구조를 탈피해 산업다각화를 이루는 것이다. 푸틴은 지난 1월 경제일간지 ‘베도모스티’에 기고한 글에서 글로벌 경제위기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변화된 환경에 대응하려면 러시아 경제구조의 다각화가 필수라고 지적했다. 푸틴은 이를 위해 특정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확보하는 것을 비롯해 △지속적인 민영화 추진 △‘스콜코보’(러시아판 실리콘밸리 조성와) 같은 혁신 프로젝트 시행 △내수시장 확대 △비즈니스 환경 개선 등을 내걸었다.
문제는 이런 계획이 얼마나 실행력을 갖는가 하는 점이다. 재정적자를 악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충분한 예산 확보는 물론 당국의 지속적인 개혁 의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미국 싱크탱크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앤더스 애스룬드 박사는 “러시아 정부는 현재 미국의 4분의 1 수준인 1인당 GDP를 2020년까지 절반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산업다각화와 같은 경제개혁을 뒷받침할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정치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2010년 7월 카자흐스탄, 벨라루스와 함께 ‘관세동맹(Customs Union)’을 출범시켜 이들 국가와 상품(재화) 이동의 차별을 없애고, 비가맹국에 대해 공동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올들어서는 이를 ‘단일경제공동체(CES)’로 발전시켜 국가 간 상품 관세 철폐는 물론 노동과 자본 등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보장하는 긴밀한 경제통합을 이뤘다. 이들 3개국은 서비스를 제외하면 사실상 하나의 내수시장이 된 것이다. 러시아는 이들 국가와 경제정책까지 상호 조율할 수 있는 ‘유라시아연합(EAU)’으로 발전시켜 여기에 다른 회원국들을 추가해 경제통합의 외연과 실질을 높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러시아와 여타 국가들 간의 경제적 격차가 커서 유럽연합(EU)과 달리 통합과정이 어렵고 그 효과가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루슬란 그린베르그 경제연구소장은 “통합의 걸림돌 중 하나는 CIS 국가들 간 경제 협력을 위한 잠재력의 65~70%를 러시아가 갖고 있다는 불평등성”이라며 “EU는 회원국들 간 주고받기를 통한 평등한 파트너십이 가능하지만, CIS 경제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러시아는 작은 국가들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일방주의 견제할 다극체제 구축 나서
푸틴 대통령은 취임후 첫 해외 순방지로 중국을 찾아가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형식상으로는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에 속한 카자흐스탄 등 6개국이 회원국으로 있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 참석에 맞춘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는 5월 중순 미국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를 보이콧하고 중국에 먼저 달려간 푸틴의 의중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췄다.
과거 냉전시절 양강 구도를 이뤘던 러시아와 현재 G2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중국이 또 한번 최고 수준의 우호관계를 확인했다는 데 주목했다.
이들 정상은 대형 여객기 합작개발 협정, 원자력발전 협력 협정 등 15건의 의례적인 협력 문건에 서명하고 양국 간 교역을 오는 2020년까지 2000억달러로 끌어올린다는 데 합의했다. 러-중 정상은 미국을 견제하는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목표로 삼은 공통의 화살은 미국임이 분명했다.
푸틴은 후진타오와 회담일에 맞춰 내놓은 중국 ‘인민일보’ 기고문에서 “러시아와 중국, 두 국가의 참여없이 양국의 국가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는 어떤 국제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국과의 협력, SCO를 기반으로 해서 이란 핵문제, 시리아 사태 등 국제 이슈에서 미국의 일방주의적 해결 방식에 제동을 걸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실제 러시아가 맺고 있는 여러 대외협력체 가운데 중국과 CIS 국가들이 동시에 회원국으로 가입해있는 것은 SCO가 유일하다.
당초 국경분쟁 완화를 목표로 ‘상하이-5(five)’라는 모임에서 출범한 SCO는 소련 해체 후 러시아가 CIS 국가들과의 통합을 위한 정책들 가운데 최고의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유럽 미사일방어(MD) 계획처럼 러시아의 생존권을 직접 위협하는 문제도 양국 간의 갈등을 키우고 있다. 푸틴 집권 1~2기에는 나토(NATO)의 동유럽 및 CIS 확대, 중앙아시아의 미군 철수 문제가 러시아의 생존을 위협했다면 3기에는 MD 문제가 대립각을 높이고 있다. MD는 터키에 레이더기지를,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요격미사일을 배치해 적성국인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한다는 취지지만 러시아는 자국이 MD 사정권에 놓인다는 이유로 반발해왔다.
이렇듯 미국의 대외정책이 러시아와 CIS의 이익을 침해할 우려가 큰 상황에서 러시아는 다극체제를 구축해 미국을 견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푸틴의 정치사상적 멘토로 평가받는 알렉산드르 두긴 박사는 “러시아의 대외정책 목표는 냉전식 외교를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다극체제를 유지해 러시아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