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속 여행의 제1조건은 사람이 붐비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이브 스루 여행이나 격리된 공간에서 여유를 즐기는 호캉스 등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장기화 속에 지친 사람들이 거리두기에 점점 소홀해지면서 인기 관광지는 인파로 북적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에 언택트 여행지 찾기가 마땅찮다. 이럴 때 우리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들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마침 한국의 갯벌이 15번째 세계유산에 선정됐다. 우리가 보유한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은 언제 봐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훌륭하다. 게다가 상당수가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언택트 여행지로 제격이다. 차제에 우리 역사를 다시 곱씹어 보는 계기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떠나보자, 국내 문화유산 여행길을….
석굴암 본존불상
▶석굴암
처음으로 들여다볼 우리 세계유산은 석굴암이다. 1995년 우리 문화재 중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한 번쯤 가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익숙한 명소다. 국보 제24호이기도 한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에 당시의 재상인 김대성이 25년에 걸쳐 완성했다.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정수를 담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건축, 수리, 기하학, 예술 등이 총체적으로 집약돼 만들어진 석굴암은 볼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석굴암을 직접 보는 기회를 가지면 꼭 우는 학생이 있다”고 할 정도다. 석굴암은 중앙에 본존불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주위 벽면에는 보살상, 천왕상 등 38구의 불상이 조각돼 있다. 애초에는 40구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석굴암이 뛰어난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건축기술 때문이다. 현대기술로도 이처럼 만들기 힘들다고 한다. 굴 전체가 수리,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비례를 이루는 것으로 연구 결과 밝혀지기도 했다. 때문에 석굴암은 알고 보면 볼수록 더 볼 것이 많고 느낄 감동도 많다. 석굴암이 자리 잡은 곳은 토함산 중턱으로 굴 한가운데의 본존불은 동해를 굽어보고 있다. 석굴암 자체도 뛰어난 예술품이지만 여기서 바라보는 해돋이도 일품이다.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
석굴암을 둘러봤다면 불국사가 기다리고 있다. 석굴암과 함께 영원한 단골 수학여행지이기도 한 이 두 곳은 지금도 경주 여행코스에서 빠지지 않는다. 최근 해외에서 랜선으로 떠나는 한국 수학여행지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불국사 역시 석굴암과 같은 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이상향으로 여긴 불국토를 현세에 구현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법흥왕이 어머니 뜻에 따라 처음 세웠고, 이후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중창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효심이 깊었던 김대성은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불국사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등이 이때 지어졌다. 불국사는 창건 이념답게 이승과 내세로 구분해 건축됐다. 비로전, 극락전, 대웅전이 있는 석단위의 공간이 부처나라이며, 석단 아래 공간은 이승이다. 이 두 세계는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등의 다리로 연결된다.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불국사도 곳곳에 손으로 다루기 힘든 화강암을 사용했다.
불국사도 임진왜란을 피해가지 못했다. 당시 기존 목조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현재의 불국사 모습은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시행된 복구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석굴암과 불국사 여행 시 감은사지, 문무대왕릉 등 인근 신라 유적지를 같이 둘러보면 기억에 남는 역사 테마 여행길이 될 듯싶다.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
▶해인사 장경판전
눈을 더 남쪽으로 돌려보면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합천 해인사가 기다리고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기도 한 해인사도 신라시대 때 처음 지어졌다. 해인(海印)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따온 것으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곳의 세계문화유산은 천년 사찰이 아니라 해인사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장경판전이다. 이곳에 그 유명한 고려 팔만대장경이 보존돼 있다. 팔만대장경이 약 800년 동안 훼손 없이 지금껏 보존돼 온 것은 바로 장경판전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풍, 방습, 실내 온도 유지 등 대장경 보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자연 상태에서 최적화되게끔 설계된 건물로 평가된다.
해인사 대적광전 뒤편에 자리한 장경판전은 경내 가장 높은 곳에 긴 담장을 두르고 있다. 남쪽의 수다라장과 북쪽의 법보전, 그리고 동사간판전과 서사간판전으로 구성되는데, 수다라장 입구까지 일반인의 접근을 허용한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세조와 성종 때 장경판전을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팔만대장경은 지금처럼 나라가 어지러울 때 만들어졌다. 지금처럼 전염병은 아니고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민심을 모아 항전의 의지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1232년 몽골군의 침입 당시에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던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자, 당시 집권층은 항전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 기간만 16년이다. 완성한 경판의 총 판수는 8만1258장에 달하는데, 중생의 번뇌와 관련된 8만4000개의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새겨진 글자만 5200만 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많은 글자 가운데 오·탈자가 없다고 한다. 초조대장경이 전란 속에서 타버리고 그것을 다시 판각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해인사가 있는 합천에는 팔만대장경 제작 과정과 의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대장경테마파크, 〈태극기 휘날리며〉 〈전우치〉 등이 촬영된 합천영상테마파크, 지역 캠핑 명소로 떠오른 황매산 등도 있어 다양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강화 고인돌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상징인 고인돌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한 것은 우리가 유일하다. 2000년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괸 돌로,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지석묘로 부르기도 하는데, 전북 고창과 전남 화순에는 이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다. 세계적으로도 이런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고창의 고인돌은 무려 1500기가, 화순의 고인돌도 586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형태 또한 다양하다. 고창의 고인돌 중에는 세계에서 유일한 탁자식을 포함해, 바둑판식, 개석식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자리 잡고 있다. 강화에도 고려산 기슭을 따라 160여 기의 고인돌이 집단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곳에는 길이 6.5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탁자식 고인돌이 있다.
또한 규모도 압도적이다. 지금까지 최대 규모는 무게가 280여t에 이르는 화순 대신리 고인돌로 알려져 왔지만, 올 7월 그 자리가 바뀌었다.
화순 고인돌
2007년 경남 김해의 구산지구에서 도시개발 사업을 진행하던 중 무게가 350~400t에 이르는 초대형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그동안 제단인지 지석묘인지 불분명해 최대 규모 고인돌이 맞는지 가려내지 못했지만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목관묘가 발견되면서 무덤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기원전 1세기 청동기 시대의 묘역이다. 당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이 무덤으로 고인돌을 만들었던 것을 감안하면, 구산 초대형 고인돌의 주인공은 생존 당시 상당한 힘을 가졌던 이로 추정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은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돼 있고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도 지정 배경에 한몫했다. 이들 고인들 주변에는 트레킹 길도 잘 조성돼 있고 고인돌 박물관도 있어 여유로운 고대사 산책이 가능하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고인돌을 스쳐 지나가듯 보지 말고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것들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덮개를 자세히 보면 구멍을 뚫은 자국(성혈)들을 볼 수 있는데, 고대인들이 별자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고창의 강촌 고인돌과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남두육성, 전갈자리, 오리온자리 등이 똑같이 새겨져 있다. 우리 고대사의 연결고리를 뜻하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고인돌 탐방의 매력이다. 고인돌 별자리는 이곳들에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남두육성은 여름철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궁수자리에 속하는 국자 모양의 큰 별 여섯 개로 복을 주는 좋은 별자리로 알려져 있다.
만장굴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제주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다. 해외로 떠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나마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제주의 세계유산은 우리나라 다른 세계유산들보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제주의 세계유산은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동굴계 등 3곳이다. 이곳들은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고인돌 등과 달리 세계자연유산이다. 이번에 선정된 갯벌도 세계자연유산이다. 문화유산보다 자연유산이 더 선정되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벵뒤굴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등 3곳이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지구의 화산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자체가 화산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을 감안하면 이곳은 그 정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은 방패모양의 화산체다. 한라산 정상부에는 화산활동의 결과물인 백록담과 조면암과 현무암이 분포한다. 성산일출봉은 제주도에 분포하는 360개 단성화산체 중의 하나다. 제주도 동쪽 해안에 거대한 고성처럼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바다에서 바라볼 때는 마치 왕관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름에서 보듯이 일출이 장관이다.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10만~30만 년 전에 거문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으로부터 만들어진 여러 동굴로, 이 중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등이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동굴은 만장굴이다. 벵뒤굴은 미로형 동굴로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통로의 형태를 보인다.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또 다른 이유는 제주도가 생물 다양성 보전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점도 한몫했다. 한국산 관속식물의 약 절반이 제주도에 자생하며 약 200여 종의 한국 특산종이 분포한다. 또 한국의 멸종위기종 및 보호야생종의 절반가량이 제주도에 분포한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신안 증도갯벌
▶한국의 갯벌
제주 화산섬에 이어 우리가 보유하게 된 두 번째 세계자연유산인 갯벌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익숙한 공간이다. 누군가에는 삶의 터전으로 누군가에는 체험의 장으로, 또 누군가에는 추억이 있는 장소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삶의 공간인 갯벌이 국제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는 특별하다 하겠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우리 갯벌에 대해 “지구 생물 다양성의 보존을 위해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서식지 중 하나이며, 특히 멸종위기 철새의 기착지로서 가치가 크므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라고 했다. 우리가 계속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고창 하전마을 갯벌
각종 개발 사업이 진행될 때마다 무분별하게 훼손된 갯벌로 인해 바다 생태계가 위협받는 일이 반복돼 왔다. 그 과정에서 갯벌을 토대로 살아가던 생물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때문에 갯벌의 자연유산 등재는 현대 문명사회 속에서 사라져 가는 갯벌의 가치를 일깨웠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환경이 중요한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이때 갯벌은 더욱 보존해 후대에 물려줘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이번에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서천갯벌(충남 서천), 고창갯벌(전북 고창), 신안갯벌(전남 신안), 보성-순천갯벌(전남 보성·순천) 등 총 4곳이다. 어느 곳을 가든 갯벌의 진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안동 하회마을 전경
▶하회와 양동의 서원
201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은 한국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곳이다. 이 두 곳은 조선 시대 양반사회를 대표했던 곳으로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하회, 양동 두 마을은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다. 단순히 형식적 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씨족마을의 구성요소인 종가, 살림집, 정자, 서원과 서당, 그리고 주변의 농경지와 자연경관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동시에 이와 관련된 많은 의례, 놀이, 저작, 예술품 등 수많은 정신적 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건물의 경우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저온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구조를 띠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들이 중시했던 유교 예법에 입각해 지어졌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때문에 동네에서 다양한 형태의 한옥의 사잇길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역사공부가 될 정도다. 조선 중기 이후의 다양하고 특색 있는 우리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다. 세계유산에 지정되기도 훨씬 전인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방문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띈 곳이다.
병산서원
안동에는 하회마을뿐만 아니라 병산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돼 있는데, 풍산 류씨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류성룡이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사후에 사액되면서 병산서원이 됐다. 하회마을에서 10㎞가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2019년 유네스코는 병산서원을 포함해, 소수, 도산, 옥산서원 등 전국 9곳의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는데, “조선시대 사상의 주류였던 성리학의 현장이 잘 보존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병산서원의 대표 건축물인 만대루에 오르면 노송, 백사장, 병산,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오며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다른 서원들도 자연 속에 녹아드는 형태로 지어져 서원을 방문하면 교육적 가치뿐만 아니라 심신이 힐링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양동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이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화성
남한산성은 국내 여러 산성 중 유일하게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 지점에 있는 산성은 과거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였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12㎞나 된다.
산성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 광해군 때였다. 기존에 있던 성터를 고쳐 쌓았다. 산성은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때 신라 문무왕이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문화재로 인정된 것은 16~18세기 한·중·일 3국이 산성 건축술을 서로 교류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 산성이 유사시 임시수도로 기능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라는 점도 한몫했다. 성 안에는 왕이 거처할 행궁을 비롯해, 관아, 창고 등이 들어섰고, 80개의 우물도 만들어졌다. 행궁은 252칸이나 됐다. 하지만 유사시 임시 수도 기능을 하기 바랐던 남한산성은 그 기대와 달리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당시 수도였던 한양을 버리고 피신해 결사항전을 다짐했지만 침략자였던 청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우리가 배운 삼전도의 치욕이다.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단합을 해도 모자랐지만 명분을 중시하는 주전파와 실리를 중시하는 주화파가 대립해 나라 혼란을 더 부추긴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일대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사시사철 등산객이 끊이지 않는다.
수원 화성
성(城)을 이야기할 때 수원 화성도 빼놓을 수 없다. 수원 화성은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수원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된다. 한국 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서양의 축성술을 참고해 건축됐다.
정약용이 설계한 화성은 그의 실사구시 이념이 녹아있다. 거중기를 고안해,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이 무거운 돌을 나르는 수고를 덜어줬고, 이로 인해 10년이 넘게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공사기간이 약 3년으로 크게 줄었다.
창덕궁 경내
▶종묘, 창덕궁
종묘와 창덕궁은 각각 1995년과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다른 문화유산들보다 국제적으로 보다 빨리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여기서 조선 역대왕의 제사, 즉 종묘제례가 진행된다. 현재도 매년 진행된다. 종묘는 건축학적으로 상당히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묘를 정면에서 바라보면 살짝 높은 곳에 있는데, 길게 수평적으로 뻗은 모습이 더해져 장엄함과 엄숙함을 동시에 풍긴다. 그렇다고 위압적인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절제된 분위기 속에 전체적으로는 검소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독특한 건축 형태 때문에 일각에서는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고, 그 이후에 다시 짓고 증축해 현재 태실 19칸으로 돼 있다.
종묘 전경
종묘 방문 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길 가운데 영혼을 위한 신로가 있다는 점이다. 영혼이 다니는 길이니 가급적 밟지 않는 게 좋다.
창덕궁은 조선 태종 때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왕이 거주하며 정사를 이끌던 곳을 법궁이라고 하고 궁궐 내 변고가 있을 때 머물던 곳을 이궁이라 하는데, 조선 왕들은 여러 이궁 중에서 유독 창덕궁을 좋아했다고 한다. 머무는 기간도 법궁인 경복궁보다 훨씬 길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연 친화적 건축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경복궁은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반면, 창덕궁은 산자락 등 주변 지형을 이용해 자연과 가깝게 지어졌다. 곳곳에 수령이 오래된 거목, 연못, 정자 등이 배치됐다. 특히 후원은 아름다운 정원의 대명사 격으로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전해져왔다. 연못인 부용지 일대는 비원의 백미로 꼽힌다. 창덕궁은 정사에 지친 왕들이 휴식하기에 제격인 곳이었던 셈이다. 문화재청은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 속에 포근히 자리 잡도록 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라고 설명했다. 후원은 예약을 해야만 볼 수 있다. 수도 서울 한가운데 있는 종묘와 창덕궁은 언택트 여행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 의외로 도심 속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