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 하나 해보지.’ 건배사를 제의받은 사람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운 좋게도 제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한 켠에서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술자리가 잦은 연말연시, 건배사 제의는 가장 듣기 겁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말이지만 건배사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짧은 몇 마디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센스와 카리스마를 어필할 수 있지만 부적절하거나 지루한 멘트는 흥겨웠던 술자리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된다. 건배사 하나에 술자리 분위기가 죽고 사는 것이다.
제안자의 품위와 인격이 묻어나는 건배사
술자리의 분위기는 물론 건배사에 따라 모임의 격과 제안자의 이미지는 크게 좌지우지된다. 부적절한 건배사는 그동안 쌓아왔던 좋은 이미지를 한 순간에 추락시키기도 하고, 크게는 사회적 논란에 휩싸이게도 한다.
얼마 전 경만호 적십자사 부총재 사건이 그 극명한 예다. 건배사로 ‘오바마’를 외쳤던 경만호 전 적십자사 부총재가 덧붙인 속뜻이 문제가 된 것이다. 미국 대통령의 이름에서 따온 ‘오바마’는 원래 ‘오직 바라만 봐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혹은 ‘오직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길!’ 이라는 뜻. 하지만 최근 말장난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라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친한 사람들끼리 모인 사적인 모임에서는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공식석상에서는 성희롱의 논란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한 멘트임이 분명하다. 변질된 오바마의 뜻까지 소개하는 과도한 친절을 보였던 경만호 전 적십자사 부총재는 결국 성희롱 논란에 휘말려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원래의 뜻이 변질된 경우는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이경숙 전 숙대 총장이 만든 건배사인 ‘진달래’도 마찬가지. 원래는 ‘진하고 달콤한 미래를 위하여’라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의미인데 ‘진짜 달라면 줄래’라는 저속한 속뜻으로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다. 종종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유치한 말을 남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건배 제안자의 품격을 깎아내리는 행위임을 기억해야 한다.
현정은 회장 “당당하게 신나고 멋지게 져주자!”
속뜻이 좋아도 어감이 나쁜 단어는 피해야 한다.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진취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만 건배 제의는 ‘성행위’로 해야 하는 경우가 그 예다. 남자들의 모임에서 우정을 다지고자 하는 ‘변사또’ 역시 마찬가지. ‘변치말자 사나이들아! 또 만날 때까지’라는 말의 앞 글자를 딴 건배사인데 술자리에서 큰 소리로 변사또를 외치는 모습은 자칫 경박해 보이기 쉽다.
반대로 어감과 속뜻이 좋은 말도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즐겨 사용하는 ‘당신 멋져’가 그 주인공. 건배사 자체만으로도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당당하게 신나고 멋지게 져주자’는 속뜻은 더욱 일품이다. 일반 사원이 외치면 파이팅이 부족하다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지만 기업 총수가 ‘멋지게 져주자’ 외치면 그 의미가 한층 특별해지지 않을 수 없다. 꽃 이름에서 따온 ‘해당화’도 있다.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란 의미의 해당화는 연말연시 어떤 술자리에도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건배사로 꼽힌다.
색다른 건배사를 원한다면?… 에피소드 활용
세 글자로 된 삼행시형 건배사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간단한 외국말이나 스토리형 건배사가 제격이다. 외국어를 이용한 건배 제의는 짧지만 신선한 느낌이 들어 좌중의 이목을 한곳에 모이게 하기 좋다. 보통 건배를 제안하는 이가 앞 단어를, 나머지 사람들이 뒤이어 뒤의 말을 외치는 식으로 진행하면 되는데 리드미컬하게 타이밍을 맞추면 술자리의 흥을 한층 돋울 수 있다.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는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나 ‘현재를 즐기자’는 뜻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는 아프리카 스와힐리어에서 따온 ‘하쿠나 마타타’ 등이 그 예다. 이미 잘 알려진 건배사에 싫증이 났다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활용한 스토리형 건배사를 시도해보자. 어린 시절 겪었던 재미난 일화나 유명한 명언 등을 재미있게 풀어 색다른 건배사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건배사의 어감이나 그 속에 담긴 의미도 중요하지만 건배 제의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키포인트는 좌중의 이목을 한곳에 모을 수 있는 목소리와 적절한 쇼맨십이다. 어정쩡한 시선 처리나 자신감 부족으로 잦아드는 목소리, 지나치게 긴 건배사는 한껏 고조된 술자리의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다. 함께 모인 사람들에게 고루 시선을 던지면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건배 제의를 하고, 선창을 할 때는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외쳐야 한다. 모임의 분위기에 따라 손을 높이 들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등의 가벼운 퍼포먼스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갑작스러운 건배사 제의에 등골이 서늘해진다면 스마트폰의 어플리케이션을 참고할 것을 추천한다. 여러 주류업체에서 재치와 위트가 가득 담긴 건배사를 소개하는 출시했다. 모임의 성격에 맞는 건배사를 미리 한두 개 정도 암기해 가면 급작스런 건배 제의에도 당황하지 않고 재치 있게 순간을 모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