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미쓰에이의 배수지는 ‘국민 첫사랑’이 됐다. 영화 <건축학개론> 이후 생긴 별명이다. 영화가 흥행한 덕이기도 하지만, 그 이미지가 남성들의 첫사랑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다. 긴 생머리에 청순함 그 자체였다고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이 술자리에서 “아마도 내 첫사랑은 수지와 비슷했던 것 같아!”라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했다. 주변 지인들도 “내 첫사랑이 꼭 그렇게 생겼던 것 같다”고 했다. 물론 말도 안 된다는 핀잔이 이어졌고, 또 검증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다수 남성의 머릿속에,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럴 것 같다는 이미지를 남겼다.
현실 속 수지는 <건축학개론>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수지가 웃을 때, 요즘 유행하는 ‘데헷’이라는 웃음으로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건축학개론> 속 서연보다 더 털털하고 수더분해 보였다. 예쁘긴 한데 친근하다. 역시 영화는 이미지다. 캐릭터 모습과 실제는 조금씩(혹은 많이) 다르다. 수지는 지난 11월 개봉한 영화 <도리화가>의 진채선과도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털털하고 수더분한 현실 속 수지
<건축학개론> 이미지로 사랑받았으니 이후 많은 영화사로부터 섭외가 들어왔을 것 같은데, 수지는 아니라고 했다. 한 이미지를 소비하기 좋아하는 충무로가 수지를 섭외하지 않았다고? 말이 안 된다고 하니, 수지는 로맨스 장르를 포함해 “몇 편 출연 제의가 들어오긴 했다”고 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소속사의 뜻이기도 했지만, “정말 이 역할이 하고 싶어서 미치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수지의 생각도 반영됐다. 영화 데뷔작인 <건축학개론> 이후 드라마와 가수로 방송 출연을 하긴 했으나, 이후 영화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NO!!”를 외쳤던 수지의 마음을 잡아끈 작품이 영화 <도리화가>였다. 수지는 이 영화를 만난 것에 대해 “운명 같다”는 표현을 썼다. 아쉽지만 영화는 참패했다. 그렇지만 <도리화가>는 수지의 새로운 도전이 인상 깊게 남는 작품이 됐다. “한복을 입은 수지의 예쁜 얼굴 보느라 영화가 안 보였다. 수지의 얼굴이 흥행에 독이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판소리라는 소재부터 쉽지 않은 이야기에 도전한 수지의 용기는 칭찬해줘야 한다.
물론 <도리화가>는 여성의 판소리가 금기시됐던 시기 소리꾼이 되기 위해 힘든 여정을 겪었던 진채선의 모습이 현실 속 수지의 과거와 교차되는 지점이 있는 작품이다. 수지 본인도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과거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울컥해 눈물이 났다”고 인정했다. 아무리 자신과 비슷하다지만 도전에 나서는 건 쉽지 않다.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도 많다.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돌아가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수지는 “무척이나 진채선을 연기하고 싶었다”고 웃으며 만족해했다.
흔히 아이돌 그룹의 연습생 시절은 혹독하기로 소문나 있다. 과거 명창이 되는 것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이돌도 그 비슷한 고행을 하지 않을까. 특히 요즘은 연습생 모두가 가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불화로 소속사를 떠나기도 하고, 소속사 대표가 문제가 있어 오래 고생만 한 뒤, 소년 혹은 소녀들의 데뷔는 무산되는 게 비일비재하다. 운도 따라야 한다. 수지는 “사실 힘들다거나 혹독하다고 느끼는 건 자기 하기 나름인 것 같다”며 “다른 회사에 소속돼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시스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회사에서 나는 혹독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인형처럼, 열심히 하라고 해서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끝까지 할 사람은 알아서 열심히 하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다른 이유로 데뷔를 못할 수도 있고요. 운도 중요하거든요. 누군가가 압박을 안 하는 게 더 힘든 일이죠. 실력이 늘지 않거나, 얼마 동안 열심히 했는데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끝이니 혼자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스스로 채찍질하는 독한 열정
영화 속 진채선이 폭우 속에서 명창이 되기 위해 악을 쓰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만난 적 없던 과거의 수지가 그대로 오버랩됐다. 수지는 웃었다. “저와 채선이는 독기와 오기가 있다는 점이 같아요. 전 스스로 채찍질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옛날에는 더 심했던 것 같고요. 연습생 시절 일기장에 쓴 글을 보면 ‘와, 내가 이런 글도 썼네?’라고 새삼 무서울 정도죠. 의지에 불타올라 이상한 걸 많이 써놨더라고요(웃음). 어떤 거냐고요? 음, ‘연습실 가장 오래 남아 있기’, ‘제일 먼저 연습실 가기’도 있었고, ‘내가 먼저 가야 했는데, 누가 먼저 도착해 있어서 짜증났다!’라는 글도 기억나요. 공개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하하.”
하긴 <도리화가>의 이종필 감독도 수지의 열정에 대해 “독하다”고 표현한 바 있다. 배우들의 연기 고충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이 감독은 스태프들로부터 “이 정도까지 하면 대부분의 여배우는 집에 간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감독은 배우들을 힘든 상황에 몰아넣었고, 수지는 그걸 또 독하게 버텼다. “발목이 잘리는 느낌까지 받았을 정도”로 추운 날 차가운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 끈기와 인내, 독기가 지금의 수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수지와 대화하면서 스승이자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의 수장 박진영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피디님(박진영을 지칭) 노래를 받고 녹음하기까지의 과정이 혹독하다고 할 수 있어요. 피디님은 0.1초 단위로 챙겨요. 정말 꼼꼼하시죠. 노래 가사 하나하나, 음 길이 하나하나를 다 점검하세요. 사실 녹음할 때는 힘든데 좋은 결과로 돌아올 땐 보람도 느껴요. 피디님보다 덜 혹독한 작곡가분을 만나면 나중에 결과물이 아쉬울 때가 있죠. 피디님의 방법이 짜증 날 수도 있지만 좋은 결과물이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박진영이 가수들의 노래는 꼼꼼히 챙기지만 연기는 다른 부분이다. 박진영이 수지의 연기까지 지도하진 않는다. 아마도 연기는 박진영이 한 수 아래일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해박한 음악적 지식을 쏟아내도, 연기는 박진영에게는 미개척 분야다. 몇 차례 박진영은 연기에 소질 없음을 드러냈다. 박진영이 연기에 대해 조언을 할 수는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자 수지는 “데헷”하고 또 미소 지었다.
▶관심 없던 연기에 제대로 꽂힌 이유
사실 수지도 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소질도 없었다. 노래와 춤이 좋았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가수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습생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노래와 춤에 애착이 갔다. 하지만 회사의 권유로 연기에 발을 들여놨고, 시간이 흐르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신세계를 만나고 더 행복해졌다고 할까? 수지의 꿈은 더 커졌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강해 처음 연기할 때는 재미를 못 느꼈어요. 지금은 재미도 재미지만 촬영 모니터를 보면서 ‘아쉽다.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더 괜찮아지겠죠?”
“연기가 재미있어졌다”는 수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연기 잘하는 배우가 수두룩한, 특히 연극 무대에는 무명 배우들의 감성 연기에 눈물 흘리는 관객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아이돌 출신 배수지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물었다. 그는 거리낌 없이 답했다.
“저도 감성이 풍부한 편인 것 같은데요. 가수도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죠. 그런 감성적인 면이 저만의 플러스 요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가수 활동이나 광고를 많이 찍어서 제가 어떤 이미지적인 게 강하다는 걸 저도 알고 있어요. 연기자로서, 열심히 보이는 수밖에 없죠.”
수지는 거침없이 답을 이어갔다.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닝북>에서 제니퍼 로렌스가 댄스대회에 나가기 위해 춤을 배우는 장면을 언급하며 “전문적으로 춤을 배운 것 같진 않은데 그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보이더라. 전문적으로,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감정이 잘 전달되면 예뻐 보이고 멋져 보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제니퍼를 보고 <도리화가> 속 진채선을 연기하기 위한 영감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조선 최초 여성 소리꾼 진채선이 된 감정을 연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로 들렸다.
이번에는 그 노력이 대중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지만 수지는 또 다른 연기로 팬들을 찾는다. 사전 제작돼 2016년 7월 방송 예정인 KBS 2TV 수목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다. 쉴 틈 없이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진짜 연기가 재미있긴 한가보다.
수지는 “계속 판소리를 배워보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1년여간 국악인 박애리 명창에게 배웠는데 그가 수지에게 “신동 같다”고 했단다. 수지는 조심스럽게 “아직 그분의 발끝에도 못 따라갈 수준”이라고 했지만 독기 가득했을 과거를 생각하면, 판소리를 갈고 닦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다 수지가 솔로로 국악 앨범도 내는 건 아닐까. 남자친구인 배우 이민호와의 이야기는 더 조심스러워했다. 남자친구 관련한 질문에는 횡설수설이라고 해야 할까, 말 잘하던 수지는 당황했다. “여전히 잘 만나고 있다”는 걸 소속사를 통해 공개할 뿐이었다. 하나 더, 3년이 지나긴 했지만 ‘국민 첫사랑’ 칭호에 대한 수지의 생각은? “좋은 수식어지만 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해요. 사실 제가 모든 분의 첫사랑 같이 생기지도 않았잖아요.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