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8일 인천공항에서 만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PSE) 교수는 여행가방 하나를 든 단출한 모습이었다.
프랑스 사람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맞아야 할지 긴장됐으나 그와 통성명을 한 후 마음이 다소 가벼워졌다. ‘글로벌 부유세’라는 무시무시한 담론을 제기한 사람치고는 온화한 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통성명을 한 후 그는 동행한 사람을 ‘내 아내 줄리아’라고 소개했다.
공항에서 오는 차 안에서 약간의 어색한 분위기 속에 얘기가 시작됐다.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는 그는 “며칠 안 되는 한국 체류 기간이지만 빠른 속도로 성장한 한국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피케티와의 첫 만남은 시작됐다.
피케티 교수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핫(hot)한 경제학자다. 그가 쓴 <21세기 자본>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그는 “지금까지 미국과 프랑스에서만 80만부가량 팔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의 책은 일단 쉽다. 경제학 책치곤 말이다. 요즘 경제학자들의 책이나 논문에는 항상 수식을 동원한 모델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의 책에는 이런 수학을 동원한 모델이 없다. 몇 페이지 읽다가 수식을 이해 못해 던져버리는 경제학 책과는 형식부터 다르다. 수식은 없지만 그의 책에는 수많은 그래프가 등장한다. 그래프도 역시 심플하다. 1800년대부터 2010년까지 국가별 데이터를 수집해서 그래프를 그렸다.
15년간 자료 수집해 책 내
피케티는 그의 책에 대해 “이 책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만 15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만큼 그가 만든 데이터와 이 데이터에 대한 설명은 방대했다. 가장 많이 나오는 그래프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상위 1%, 또는 10% 계층의 소득과 재산이 전체 소득과 재산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그래프다.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그래프는 한 국가에서 자산이 전체 소득의 몇배나 많은가 하는 것이다. 한 국가의 자산의 가치와 소득을 비교해 자산·소득 비율을 구해 그래프를 그렸다. 그가 그린 그래프를 보면 자본주의 경제에 놀랄 만큼 뚜렷한 경향이 존재한다.
우선 소득 불평등도는 자본주의 초기인 1870년부터 1910년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하다가 1910년부터 1950년까지는 감소한다. 하지만 이후 1970~80년대 이후에는 다시 뚜렷이 증가한다. 부의 불평등도 유사한 모양이다. 이른바 ‘U’자형 소득 불평등도 곡선이 도출된다. 다음은 한 국가의 총자산과 국민소득 간의 비율인 자산 소득 비율도 동일한 ‘U’자형 패턴을 보인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역사적 데이터 분석이 이처럼 뚜렷한 경향을 보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200년이 넘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그동안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했던 사실을 끄집어낸 것이다.
높은 자본수익률이 불평등 야기
피케티는 이같은 데이터 분석을 통해 자신만의 학설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경향이 뚜렷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보다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고 또 저축도 많이 한다. 그러다보면 자본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늘어나고 이것이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은 필연적이라는 게 피케티의 주장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도 파격적이다.
피케티는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상위 소득 계층에 대해 80%에 가까운 소득세율을 적용하고 거액 자산가들에게도 매년 최고 2%에 달하는 부유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파격적인 소득 불평등 해결 방안이 나오지 않으면 자본주의 경제는 불평등도가 계속 심화돼 정치적·사회적 불안정이 야기될 것이라는 게 그의 논리다.
그가 수집한 데이터를 통해 보여준 자본주의 경제의 모습과 그의 해법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향후 10년간 가장 중요한 경제학 책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로런스 코틀리코프 미국 보스턴대 교수는 “이론을 모르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극단적인 평가 속에서 피케티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그는 이같은 평가에 대해 “나의 연구로 많은 학자들이 논쟁을 벌이는 것은 좋은 일”이라면서도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 책을 진지하게 읽어봤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실제 제기되는 많은 비판이 피케티가 한 일보다는 그에 대한 선입견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실제 그를 만나보니 이같은 피케티의 발언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한 연구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300년의 역사적 자료를 통해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한 것”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그가 제시한 ‘글로벌 부유세’라는 해법에 대해서는 “국가별 시대별 특수성을 고려해 더 나은 정책을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분석보다는 그가 제시한 해법을 물고 늘어진다. 그것은 그에 대한 정확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실제 피케티는 “내가 제시한 대안에 대해서는 독자들과 앞으로도 함께 고민을 해봐야 할 부분”이라고까지 말했다.
그가 한국을 방문해 지난 9월 19일 매일경제 세계지식포럼 사전행사로 열린 ‘1%대 99% 대토론회 1부 : 피케티와의 대화’ 콘퍼런스와 각종 인터뷰에서 밝힌 한국경제 소득불평등에 대한 해법은 일방적인 ‘글로벌 부유세 부과’와 많이 달랐다.
교육은 불평등 해소에 기여
피케티 교수는 “한국에서는 지식 기반을 확대해 생산성을 높이고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유도하는 것이 소득불평등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교육 혁신을 통한 생산성 증대는 한국 내에서 소득불평등을 줄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진국과의 격차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모든 계층이 좋은 교육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공교육제도를 만들고 교육에 대한 기회가 공평하게 제공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금을 통한 불평등 해소 방법도 한층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피케티 교수는 “연소득이 1억, 10억, 100억원인 사람에게 같은 세율을 부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최상위 소득 계층에 대한 한계소득세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에 대해서도 누진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과세 표준을 순자산으로 할 경우 90%가 넘는 사람들은 세금 부과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울러 “인구 고령화는 성장을 정체시키고 상속 등을 통해 소득불평등을 확대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자신의 연구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혔다. 그는 “내 연구의 가장 큰 성과는 역사적인 데이터를 분석해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라며 “나를 좌파나 우파 어느 쪽으로도 분류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했다.
피케티 교수는 “소득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모든 국가와 모든 시기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정책은 없다”고 강조했다.
프랑스와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부유세를 통한 소득불평등 해소를 역설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교육과 지식의 확산을 강조해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또 선진국의 불평등 해소를 통해 전 세계가 동시에 거액의 자산가에게 부유세를 부과하는 ‘글로벌 부유세’가 금세 실현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 피케티 교수는 “전 세계의 모든 국가가 통일된 부유세 제도를 조만간 시행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금융제도를 투명화하고 조세 피난처를 줄이기 위한 국제 공조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계층 이동 가능한 사회 돼야
피케티 교수는 부유층과 저소득층 간의 계층 이동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내가 추구하는 바는 사회적인 계층 이동이 현재보다 역동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상속재산이 거의 없고 자신의 근로 소득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부를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최근 도입한 ‘기업소득 환류세제’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기업소득 환류세제는 기업들이 배당이나 임금지급을 하지 않고 이익을 과도하게 회사 내에 쌓아둘 경우 세금을 물리는 제도다.
피케티 교수는 “특정 기업이나 특정한 경우에 세금을 부과하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며 “모든 소득과 이윤에 대해 일괄적인 세율을 부과하는 제도가 보다 바람직하다”고 했다. 기업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기 위해서는 법인세 인상 등 보편적 증세를 통해 세금을 더 거둬들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특정 기업이나 개인을 겨냥한 세금제도를 만들어 놓으면 기업들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제도를 악용할 수 있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 연구대상은 이머징 마켓에 있는 국가들이라고 밝혔다. 피케티 교수는 “이머징 마켓의 데이터를 현재 수집하고 있다”며 “이들 국가가 미래의 연구대상”이라고 했다. 개발도상국에는 다른 소득불평등 해법을 제시할지 주목된다.
그는 부인에 대해서도 자랑할 만큼 다정다감한 모습도 보여줬다.
“내 아내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정치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라며 “현재 파리에서 함께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피케티 교수는 한국을 방문한 소감에 대해 “며칠 안 되지만 한국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라며 “다음번 <21세기 자본> 개정판을 낼 때는 한국에 대한 연구결과도 책에 넣을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토마 피케티는
1971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파리고등사범학교를 나왔고 런던대와 E.H.E.S.S.대학 대학원 두 곳에서 같은 시기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 초반 MIT 경제학과 조교수를 하다가 귀국해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 응용경제연구소 연구원,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경제학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프랑스 파리경제대학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