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대부 전길남 KAIST 명예교수 일본 게이오대 교수 | 선진국 가느냐 좌절하느냐 한국은 갈림길에 섰다
입력 : 2014.09.26 16:26:53
수정 : 2014.10.08 11:00:13
한국은 어떻게 인터넷 강국 정보통신 강국이 됐을까. 삼성, LG, KT 덕일까. 물론 이들도 어느 정도 기여는 했다. 그러나 한국의 인터넷을 세계 최고로 만든 이는 따로 있다. 바로 전길남 KAIST 명예교수다.
그는 미국을 제외한 그 어느 나라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인터넷을 개발했다. PC가 등장하기 한참 전인 1982년이다. 그런데 이 인터넷 영웅은 연구가 아닌 등산으로 먼저 국민훈장을 받았다. 그만큼 도전적 삶을 살고 있는 전 교수를 찾아 한국이 직면한 도전과제들의 해법을 들었다.
첫 훈장은 알프스 북벽 등반으로
서울 연구소라고 소개한 그의 서재엔 흰 눈 덮인 알프스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산은 그에겐 마음의 고향 같은 존재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녔는데 본격적인 등산은 중학교 때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후지산에 갔고 2학년 땐 북알프스의 하쿠바(白馬)를 다녀왔다. 오사카대학에 진학해 산악부에 가입했으나 사고가 많이 나는 바람에 등산 활동을 중지했다가 미국 가서 다시 시작했다.”
경상도 출신인 선친이 일본에 자리를 잡은 까닭에 1943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고등학교 때 진로를 고민하다 한국행을 결심한 그는 일본 대학만 갖고는 힘들다는 얘기에 미국 유학을 갔다. 일본서 트레킹만 했던 그는 거기서 정식으로 등반을 배웠다.
“UCLA에선 시에라(산맥)에 가기가 쉬웠다. 금요일 밤에 갔다가 이틀 등반하고 일요일 오후 돌아오곤 했다. 시에라클럽이란 등산환경단체에 가입해 암벽등반도 배웠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민간 연구소와 NASA에 근무하면서까지 그는 한껏 산에 빠져들었다. 1970년엔 휘트니마운틴에 올랐고 매킨리도 종주했다. 요세미티의 엘 캐피탄, 시에라 네바다의 노스 팰리세이드 등 유명한 봉우리들을 수시로 찾았다. 1979년 한국 정부의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에 따라 귀국한 그는 이듬해인 1980년 악우회 멤버들과 한국인 최초로 마테호른 등 알프스 3대 북벽을 올랐다. 한국 등반 기술이 세계 수준임을 확인한 것. 이 공로로 그는 국민훈장 기린장을 받았다.
70세가 넘은 지금도 그는 엄청난 운동으로 20~30대 청년 못지않은 복근을 유지하고 있다.
“하루 두 시간 정도 운동한다. 악착같이 한다. 대전 가면 1500m 수영을 한다. 보통 수영 한 시간, 등산 한 시간씩 한다. 적게는 하루에 두 시간, 많을 때는 4시간까지 한다. 우리 나이엔 체력 유지하는 것만도 하루 두 시간은 해야 한다.”
NASA시절 미국 본토의 최고봉 휘트니마운틴 정상에 오른 전 교수(뒷줄 중앙)
청소년에게 도전 가르쳐야
도전이 시의적절한 주제라는 그에게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도전을 가르칠지를 물었다.
“도전을 가르치는 데 한국은 일본 만큼 여유가 없는 것 같다. 사실은 미국이 잘하고 있다. 미국에선 통제된 환경(controled environment)서 도전하는 코스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20~30여 년 전 조카를 미국으로 불러 그런 훈련을 시켰다. 일주일 동안 훈련시킨 뒤 2~3명씩 팀을 짜서 낚시를 하는 등 식량을 구해 먹으며 2박3일간 나침반만 갖고 목적지까지 찾아간다. 매킨리나 아콩카과 정상까지 청소년들을 데리고 가는 프로그램도 있다. 일본도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으나 아직 미국 수준은 아니다.”
이제 한국도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다만 프로그램 만들 강사를 잘 키워야 하고 아울러 청소년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고 나면 못하게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그는 청소년 교육을 위한 아주 전향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청소년들이 20세가 되면 모두 외국에 내보내면 좋겠다. 선진국 후진국 가릴 것 없이 1~2년씩 해외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물론 국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1년 사용할 경비면 후진국 가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청소년들의 해외 경험이 있어야 나라가 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특히 이렇게 국제 감각을 쌓은 사람이 늘어나면 한국이 동북아 정세를 주도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82년에 한국 인터넷 개발
그의 전공으로 화두를 돌렸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을 개발한 이야기부터 궁금했다. “1979년 2월 말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의 제일 마지막으로 한국에 왔다. 그해 10·26 사태로 이 프로그램은 완전히 중단됐다. 힘든 시기였다. 막상 와서 보니 석유파동으로 난방도 제대로 못할 때였다. 그렇지만 정부가 제시한 지원 약속은 시스템화해 연구는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당시로선 시기상조였던 연구를 멋지게 성공시켰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에선 웬만한 조직은 컴퓨터를 많이 보유하기 시작했는데 한 컴퓨터에 있는 것을 다른 컴퓨터로 옮기질 못했다. 그걸 연결하는 연구도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대학들이 컴퓨터를 처음 도입하는 단계였다.”
미국을 제외한 어떤 나라도 하지 않은 연구에 나선 것이다.
1982년 5월 15일 전 교수는 데이터를 패킷 방식으로 교환하는 TCP/IP로 서울대 중형컴퓨터와 구미 전자통신연구소의 중형컴퓨터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 최초의 인터넷이 개통된 것이다. “대학에선 컴퓨터끼리 연결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된다는 개념으로 시작했는데 너무 일찍 시작했다. 조금 무리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아프리카 인터넷 전문가들과 함께. 전 교수는 개도국 인터넷 보급운동도 하고 있다.
NASA도 탐냈던 네트워크 전문가
전 교수는 원래 컴퓨터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으나 그것보다는 컴퓨터 연결하는 게 더 재미있어 네트워크로 바꿨다고 했다.
“고성능 컴퓨터 만드는 것보다는 몇 백대 몇 만대 컴퓨터를 연결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학위 후 미국의 한 회사에서 네트워킹을 연구했고 NASA에 들어가서도 우주선과 여기 컴퓨터와의 네트워킹을 연구했다. 쉽게 말하면 ‘사진을 찍어라, 실험을 하라’ 하고 위성에 명령을 보내는 것이다. 거리가 워낙 멀어 전파가 가는 데도 몇 시간, 며칠 씩 걸리는 네트워크다. 완전히 스타일이 달랐지만 그래도 어차피 컴퓨터를 연결하는 것이니 네트워크였다.”
한국 정부는 컴퓨터 국산화를 위해 그를 불렀다. 그런데 초기엔 그의 연구를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땐 다 반대했다. 왜 그런 걸 하느냐고 했다. 귀국 첫 해는 정부에서 연구과제로 선정하지 않아 돈이 안 나왔다. 다음 해에는 줬는데 1년만 하라고 했다. 1년짜리 프로젝트로 허용했지만 실제로는 (지원이) 1년도 안됐다. 다음 해엔 한국통신(KT)서 지원해줬다.”
이 대목에서 전 교수는 자신이 연구한 네트워크 중에서 쉬운 걸로 했는데 “결과적으로 선택을 아주 잘한 것 같다”고 활짝 웃었다.
“컴퓨터 네트워크 중 어떤 네트워크를 소개할까 고민했다. NASA서 연구하던 것은 제일 재미있었고 가장 최근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한국에서 써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전에 회사서 일한 적도 있는데 회사 내 웬만한 작업을 컴퓨터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별로였다. 그보다는 대학원에서 연구한, 웬만한 컴퓨터를 다 연결하는 것, 지금 말하면 인터넷인데 그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서 했다. 컴퓨터 개발하는 사람끼리 연결하는 게 필요하다고 억지로 주장해서 시작했다. 기술적으로 인터넷은 수준 높은 게 아니고 어찌 보면 제일 단순했다. 지금 생각하니 판단을 잘했다.”
운이 함께한 인터넷 강국
그는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되는 데는 운도 따랐다고 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연구에 참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그런 연구를 한다니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삼성, LG, 한국통신이 모두 함께했다. 전체가 되는 방향으로 갔다. 내가 믿음을 준 것도 있지만 처음부터 미국 유럽과 협력하면서 하니까 ‘아 여기 뭔가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 신기한 것은 그때는 대학교와 기업체 연구소가 다 협력하면서 했다는 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인데…, 그게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되는 계기가 됐다. 몇 해 전 3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우리하고 경쟁하는 나라들은 이제야 20주년 행사 하는데. 그만큼 새 분야는 언제 하느냐가 중요하다.”
인터넷을 연결하는 데는 라우터라는 장치를 사용한다. 컴퓨터끼리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컴퓨터와 라우터를 연결하고 라우터끼리 통신한 것을 다시 컴퓨터로 읽는 방식이다. 그런데 라우터를 개발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전 교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조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처음엔 미국 라우터를 사고 싶었으나 수출금지라 우리가 만들 수밖에 없었다.(사실 미국도 신형 라우터를 완성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서 쓰던 것은 옛날 네트워크 소프트웨어였고 최근 것은 아직도 개발 중이었다. 그러니 미국 국방부서 허가를 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그때 수입한다면 옛날 것밖에 없었지만 그것마저 수입이 안 됐다. 그래서 당시 미국서 인기 있는 미니컴퓨터(중형컴퓨터)를 받아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그것만도 우리나라에선 굉장한 거였다. 미국 컴퓨터를 가져와 원래 OS는 다 버리고 유닉스라는 완전히 다른 OS를 붙인 뒤 우리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붙였다. 뭐하는 거냐고들 했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자체적으로 인터넷을 개통했으나 초기엔 미국이 연결을 허가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연결은 그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다른 소프트웨어로 했다. 미국서 허가를 하지 않았다. 허가는 4년 후에 나왔다.”
어쨌든 이렇게 기술을 확보한 덕에 국산 컴퓨터가 개발되자 그걸 이용한 라우터를 개발했고 국내 기업들이 상용화하게 됐다. 다른 나라들은 전용 라우터 나오기를 기다릴 때 한국은 정보통신 시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개발 후 통신비 부담에 허덕여
전 교수는 이 대목에서 가난한 나라였기에 가슴 아팠던 비화도 들려줬다.
“인터넷 개발해 성공하고 나니 골치가 아파왔다. 성공했으니 써야 했다. 안 쓰면 시스템이 죽어버리니까. 그런데 쓰기 시작하니 경비가 많이 들어갔다. 그때 우리나라는 통신비 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쉽게 얘기하면 하루에 몇 시간씩 국제전화를 하는 격이었다. 그때 국제전화가 얼마나 비쌌나. 되게 억울했다. KT가 도와줘 겨우겨우 넘어갔다. 대학교수니까 그냥 열심히 쓰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서 소프트웨어도 가져오고 연구논문도 가져오고 온라인 게임도 가져왔다. 거기서 온라인 게임이 시작됐다.”
이게 한국이 게임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지만 당시엔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 돈으로 2000만원, 3000만원을 들여야 했다. 그렇다고 온라인 게임 시작하는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들이 열심히 하면 우리가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네가 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내는 게 이만큼이다. 쓰지 말라고는 하지 않고 알고서 쓰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온라인 게임 세계 제일이 됐다.”
학생들 내보내려 창업 장려
전 교수 제자 중엔 벤처기업인이 많다. 넥슨 창업자인 김정주 NXC 대표나 나성균 네오위즈홀딩스 대표, 한국 최초의 인터넷 회사 아이네트를 창업했던 허진호 크레이지피쉬 대표, 박태하 솔박스 대표, 리니지 게임을 만든 송재경 씨 등이 그의 제자다. 연구에 강했던 그가 벤처 창업을 장려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분야를 하는 회사가 없었다. 누군가는 시작해야 했다. 삼성이나 LG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미국, 일본이 반도체를 하니 우리도 해야 했다. 새로운 것은 벤처가 해야 했다. 졸업생을 내보내야 하는데 연구한 것을 활용하려면 선배들이 회사를 만들어야 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연구하는 인재와 벤처하는 인재는 다르다고 단언했다.
“능력 있는 학생들은 대학원에 가고 석사를 한다. 박사까지 가면 연구하고 논문 쓰고 해야 한다. 그런데 석사 중에 박사까지 하지 않고 나가는 학생들이 사업한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우리나 박사 벤처는 거의 없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이해진이나 김정주도 모두 그렇다. 박사 하는 머리와 회사 경영하는 머리는 다르다.”
둘 다 하는 것은 다 안되는 것 같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다만 벤처 기업이 성공하려면 박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구글은 둘이 했다. 스탠퍼드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했다. 그만둘 수 있어야만 벤처가 가능하다. 단 벤처가 성공하려면 굉장히 머리 좋은 박사가 필요하다. 그 차별화가 필요하다. 대학도 벤처 하려는 사람과 박사 하려는 사람 교육 방법을 차별화해야 한다. 스탠퍼드나 버클리는 그 조절을 잘 한다. 우리에겐 그게 숙제다.”
한국이 직면한 도전
전 교수는 지금 한국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삼성이 언제까지 넘버원을 지킬 수 있는가. 영원히 지키기는 어렵다. 휴대전화는 처음엔 모토롤라가 세계 최고였다. 그 다음은 애플이 최고였고 지금은 삼성이 최고다. 그러나 언제까지 하고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게 삼성한테는 엄청나게 힘든 도전과제다. 성공확률이 높지 않다. 모토롤라나 핀란드의 노키아도 그랬고. 애플만 겨우 어떻게 되고 있다. 삼성이 우리나라 경제의 10~20%를 차지하는데 잘 안되면 그게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할 것이다.”
그러면서 핀란드의 사례를 배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노키아가 망하고 나서 핀란드가 어떻게 했는지가 굉장히 좋은 케이스가 될 것이다. 그런 거 잘해야 한다. 핀란드처럼 할 수 있느냐. 그건 우리나라의 도전과제이다. 기술적으로도 그렇고 정책 레벨에서도 그렇고.”
결코 낙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앞으로 10~20년 동안 굉장히 큰 도전을 받게 될 것이란 얘기다. 그런 면에서 최근 보안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정한 시스코는 잘할 것 같다고 했다.
“하드웨어 자체는 PC와 마찬가지다. 라우터도 로핸드는 경쟁이 안 된다. 삼성이 저가 스마트폰에서 경쟁이 안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이엔드 역시 경쟁자가 있다. 제니퍼가 경쟁자다. 시스코가 시큐리티(보안) 간 것은 굉장히 현명하다. 잘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그게 안 되면 하이엔드나 로엔드 모두 안돼 계속 내리막길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런 타입의 대수습을 해야 한다.”
삼성뿐 아니라 한국 전체가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데 상황과 비교하면 절대로 좋은 게 아니다. 좋은 뜻으로 말하면 엄청난 챌린지다. 선진국으로의 챌린지다. 나쁘게 얘기하면 앞이 안 보인다. 한국은 지금 시험대에 놓여 있다. 잘 넘어가면 좋은 스타일로 선진국이 되는 것이고 안 되면 선진국 될 뻔했는데 가라앉는 나라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굉장한 리스트럭처링을 하거나 굉장한 리더가 나와야 할 것 같다.”
지금으로선 IT 빼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제일 앞서갈 만한 게 없다는 것. 대조적으로 중국은 잘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비행기도 만들고 우주선도 만들고 그런 수준의 나라다. 그런 것으로 미국과 경쟁한다. 거기서 많은 테크놀로지가 나온다. 우리는 중국 같이 생각해선 안 된다. 규모도 안 되고. 그보다는 핀란드나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같은 식으로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니치(틈새)를 찾아야 하는데 IT 빼고는 니치가 안 보인다.”
게임 쪽은 한국을 먹여 살릴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기간 성장 여지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게임은 성장 여지 남아 있어
“TV에서 K-pop이 아주 잘한다고 나왔는데 게임 수출은 K-pop의 10배 정도 된다. 해마다 2조~3조원이 된다. 그 분야는 그냥 게임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계속 늘어난다. 엔터테인먼트로 제일 잘하는 회사가 디즈니인데 디즈니에 도전할 차세대 엔터테인먼트로 봐야 한다.”
최근 삼성이나 LG가 경쟁적으로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발표하지만 하드웨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하드웨어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유저 인터페이스에서 결정된다. 사용자가 편하게 느끼게 하도록 경쟁해야 하는데 거기선 우리나라가 약하다.”
정부와 기업들이 한 방향으로 사물인터넷에 투자하는 데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고 했다.
한편 그는 장기적으로 본다면 대체에너지가 아주 중요한데 한국은 이 부문 투자도 너무 저조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원자력만 열심히 하고 그 외에는 화력발전소만 있다. 길게 보면 대체에너지 쪽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몇 십 년 후는 태양광이나 풍력 등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워낙 규모가 큰 분야인데 하지 않는다. 중국도 열심히 투자하고. 대체에너지가 굉장히 큰 분야인데 하지 않고 있다.”
한국 대학 선진국에 수십 년 뒤져
전 교수는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오고 미국에서 석·박사를 마쳤고 아직도 한국과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본 세 나라의 교육 수준이나 교육방법은 어떻게 다를까.
“일본이나 한국은 비슷하지만 미국은 많이 다르다. 특히 대학원 레벨은 아주 다르다. 미국 교수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교과서를 만들려고 한다. 일단 좋은 교과서를 만들면 세계에서 쓰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으로 코스를 가르치고 그걸 바탕으로 책을 쓴다. 우리와 달리 스케일이 크다. 우리는 겨우 그것을 번역하는 강의 밖에는 안된다.”
그는 특히 한국의 교육이 일본이나 미국, 영국 수준으로 가려면 수십 년에서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오사카대학은 내가 입학하기 전인 1950년대에 노벨상을 받은 교수가 있었다. 물리분야에서 받았지만 그래도 우리 대학에 노벨상 받은 교수가 있다는 게 우리에게 주는 프레셔(압박감)는 대단했다. 그 수준까지 연구를 해야 했다.”
한국은 아직 멀었다는 얘기다. 특히 최상위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연구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상당히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열심히 해서 노벨상이 나와야 한다는 풍토가 생겨야 하는데 여러 가지로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제자나 조카 중에 머리 좋은 아이가 있다면 어디로 보낼 것인가. 당연히 하버드나 케임브리지 보내려 하지 않겠나. 거기는 노벨상 수상자만 수십 명씩 있으니. 그런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은 벌써 지방대학 출신까지 노벨상을 받기 시작했다. 동경(도쿄)대나 경도(교토)대는 골고루 있다.”
이 문제는 교수들의 책임이 크다고 했다. 돈 때문만은 아니란 것이다.
“내가 1961년에 대학 갔는데 1950년대에 노벨상 받은 교수가 있었다는 것은 생활수준 때문이 아니다. 당시 일본의 생활수준은 형편없었다. 그런데도 수상자가 나왔다. 학교와 교수들의 태도가 중요하다. 기초연구를 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하고 조직적으로 그런 연구에 투자해야 한다. 이젠 무엇이 잘못인지 대답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한국의 대학들은 설 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학교도) 국제경쟁을 해야 한다는 걸 교수들이 명심해야 한다. 이것도 도전이다. 안되면 미국의 좋은 대학들이 한국분교를 만들 것이다. 가장 먼저 비즈니스 스쿨이 무너진다. 언젠가는 온다. 우리도 그 시기가 왔다.”
대학들이 기금을 지적하지만 산학협동 수준은 상당하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예를 들어 현대NGV라는 현대차그룹 인재육성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서울대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그렇게 가르친 사람들이 현대차에 취직한다. 그런 프로그램은 일본보다 낫다. 일본에선 묘하게 그런 걸 거부하는 풍조가 있다. 회사가 간섭한다고 생각해 기업서 연구비를 받지 말라는 풍조도 있다. 토요타가 화가 나서 미국에 대학을 만들었을 정도다.”
한국 보안 수준 너무 낮아
전 교수는 한국이 인터넷 강국답지 않게 보안을 너무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팸이 많다는 것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스팸 소스가 어느 나라에서 시작되는가이다. 두 번째는 그 스팸이 어느 서버에서 나오는가이다. 첫 번째는 별거 아닌데 두 번째는 아직도 많다. 외국에서 우리나라 서버를 통해 스팸을 보낸다. 우리가 관리를 잘못해서다.”
미국, 일본 등과 비교할 때 보안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는 그는 이것은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다른 나라에서 한국 서버를 경유해 스팸을 보내고 웜을 보낸다. 교통질서를 지키라고 하는 것처럼 인터넷에서도 질서를 지키게 해야 한다. 우리나라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사물인터넷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보안 투자를 늘려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전 교수는 컴퓨터 사용자의 수준을 높여야 하는 문제라고 했다.
“보안은 투자라고 하기보다는 수준을 높여야 하는 문제다. 우리나라는 너무 수준이 낮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수준이 굉장히 낮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나온다. 외국에서 앞으로 보안이 문제가 될 것이고 공격은 계속 늘어난다. 결국 보안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내가 볼 때 그런 게(웜이나 바이러스) 소프트웨어 불법복제와 같이 오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오피스 프로그램의 90% 이상을 불법으로 복제한다. 결국 컴퓨터 이용 수준 문제다.”
정부가 제도로 규제하기 어려운 부분이란 얘기다. 이게 사물인터넷 시대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했다.
“스마트홈이라고 하면 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것인데, 고등학생 수준이면 재미로라도 해볼(침투할) 것 같다. 그렇다고 스마트홈이나 사물인터넷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물론 자기들은 (보안을)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약하다. 그들은 한다고 하지만 그걸로는 안 된다. 한국 보안 수준 전체가 낮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하지 않으면 계속 고생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전길남 교수
1943년 일본 오사카 출생.
오사카대학 전자공학과, UCLA 석사, 박사(시스템공학), 미 록웰인터내셔널 연구원, NASA 추진연구소 연구원.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KAIST 교수, 베이징대 초빙교수. (현) KAIST 명예교수·게이오대 방문교수. 국민훈장 기린장(1980) 동백장(1997), 인터넷 명예의 전당 등재(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