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닝(李寧). 그는 중국 체육계에서는 독보적인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그의 종목은 체조. 우리에겐 가장 유명한 체조선수하면 루마니아의 다니아 코마네치가 기억되지만 중국에서는 코마네치가 리닝의 지명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스타 체육인이 많은 중국에서도 그는 아주 특별한 존재로 평가받는다.
리닝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2년 제6회 세계월드컵 체조대회. 체조 7개 개인종목 중 평행봉을 제외하고 종합과 마루운동, 철봉, 도마, 안마, 링에서 6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이다. 평행봉에서는 아쉽게 동메달을 땄다. 한 종목에서만 금메달을 따도 대단한 일인데 6개 종목을 휩쓸었다는 것은 세계 체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의 나이 19살 때였다. 육상으로 비교하면 한 선수가 100m와 200m, 400m, 400m 계주, 200m 허들, 3000m에서 동시에 금메달을 딴 셈이다.
체조와 육상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문가들은 체조 6개 종목을 휩쓰는 일은 앞으로 누구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리닝에게 ‘체조 황제’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1984년 미국 LA올림픽에서도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따냈다. 그가 1988년 서울 올림픽 참가를 마지막으로 체조선수로서 은퇴할 때까지 따낸 금메달 숫자는 무려 106개에 달했다.
1999년에는 세계체육기자협회로부터 권투왕 알리, 축구왕 펠레, 농구황제 마이클조던 등과 함께 체조계의 ‘20세기 세계 최고 운동선수’로 선정됐다. 체조라는 종목이 프로 리그가 없다보니 선수로서 그의 기록이 젊은 층들 사이에서 빠르게 잊혀져가고 있지만 다른 어떤 스포츠 스타보다도 큰 업적을 남긴 선수임에는 틀림없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마지막으로 성화를 넘겨받아 성화대에 불을 붙인 것도 리닝이었다. 그가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라는 사실이 재확인된 순간이었다. 당시 하늘에 매달려 성화를 들고 내려오는 퍼포먼스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리닝은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뒤 자기 사업을 준비해 1990년 드디어 스포츠 의류회사 ‘리닝체육용품’을 설립했다. 운동선수 출신인 그는 선수들이 착용하는 신발과 복장이 경기 성적에 미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전문가들을 동원한 철저한 연구를 통해 맞춤형 전문 스포츠 용품 개발에 주력했다. 회사 설립과 거의 동시에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중국 대표팀에게 의류를 협찬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스포츠 의류 브랜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도 중국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리닝 의류를 입혔다. 선수들의 가슴에 리닝 로고가 선명했다. 중국 선수들이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유명 해외 브랜드 유니폼을 입고 달리던 시대가 막을 내린 사건이었다.
브랜드가 어느 정도 알려지자 그는 품질과 마케팅 분야에서도 해외 브랜드에 뒤처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998년에는 중국 현지 기업 최초로 상품설계개발센터를 설립했다. 연구개발(R&D)에 사활을 걸겠다는 전략의 결과였다. 때로는 해외 브랜드에 비해 더 앞선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2004년 홍콩 중문대와 합작·생산한 운동화의 역학적 특성에 대해 운동생물역학 테스트를 진행한 것은 당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동시에 선수들의 발 형태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함으로써 상품 개발 능력을 획기적으로 제고했다. 맞춤형 신발을 보다 정밀하게 제작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춘 것이다.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능성 운동복과 농구화, 러닝화 등을 선보이고, 인종별 신체 특징을 반영한 제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는 품질만큼이나 마케팅과 홍보를 통한 브랜드 이미지 제고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다. 글로벌 브랜드가 독점하고 있던 국제 스포츠 시장에서 리닝체육용품을 알리기 위해 창업 초기부터 중국올림픽위원회와 손잡고 국제대회 스폰서로 참여했다.
2004년에는 홍콩 증시에 상장하면서 해외에 상장한 중국의 첫 체육용품 회사가 됐다.
2005년에는 미국 프로농구 NBA의 공식 파트너가 됐다. 덕분에 리닝은 2008년 12월 월드브랜드밸류연구소에서 개최한 월드브랜드밸류 대상 ‘중국의 가장 경쟁력 있는 브랜드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10년에는 중국 500대 브랜드 중 50위에 올랐다. 이 때 브랜드 가치로 142억5200만위안(약 2조3500억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굴지의 나이키를 제치고 중국 네티즌이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리닝은 이런 브랜드력을 기반으로 현재 해외 23개국에 진출했다.
리닝은 스포츠 마케팅 측면에서도 유명 브랜드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이 리닝 브랜드 의류를 착용하고 경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우사인 볼트의 라이벌이었던 아사파 포웰도 있었고, 여자 장대 높이뛰기의 최고봉을 지키다가 지난해 은퇴한 옐레나 이신바예바도 있었다. 이신바예바의 높은 점프력에 힘을 더한 것은 리닝의 신발이었다. ‘공룡 센터’ 샤킬 오닐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2007년부터 5년간 리닝과 스폰서 계약을 맺고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NBA 마이매미 소속의 스타 가드인 드웨인 웨이드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에반터너도 리닝과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한국 국가대표 출신인 박주영 선수가 한때 몸담았던 스페인의 셀타 비고 팀의 스폰서도 리닝이었다. 스포츠 스타를 앞세운 글로벌 마케팅에서 리닝은 나이키, 아디다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닝은 창업자 명성에 힘입어 사업 초창기부터 순항을 거듭했다. 회사 설립 10년 만인 1999년 리닝의 매출액은 7억위안(약 1150억원)에 달했다. 세계 1, 2위 브랜드인 나이키(3억위안)와 아디다스(1억위안)의 중국 매출보다 훨씬 더 많았을 정도다. 2000년에는 그보다 매출액이 39%, 순이익이 52% 증가했을 정도로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하게 성장했다. 2009년을 기준으로 할 때 리닝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나이키보다는 조금 못 미치지만 아디다스와 엇비슷한 14%에 달했다.
소비자 해외브랜드 선호로 위기
그러나 리닝에겐 중국인들의 소득이 높아지면서 소비여력이 커진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눈높이가 높아진 중국인들이 토종 브랜드보다 해외 브랜드를 선호하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리닝은 그 여파로 2011년부터 영업 실적이 눈에 띄게 부진해지기 시작했다. 2011년 상반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5% 떨어져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이 13%대에서 6%대로 급감했다.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설상가상으로 회사를 지탱해온 고위 간부 5명이 잇따라 회사를 그만두면서 사내 분위기가 더욱 나빠졌다. 리닝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소문이 시장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리닝이 각종 스폰서 활동을 줄이면서 브랜드 이미지가 나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 틈을 타고 중국 내 다른 토종 브랜드들의 추격도 무섭게 진행됐다. 해외 언론을 중심으로 리닝의 브랜드 정체성 위기론이 지적됐다. 리닝이 그동안 중국 애국주의에 힘입어 성장을 해왔지만 해외 브랜드 제품을 베낀다는 짝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정체 혹은 후퇴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었다. 리닝은 그동안 글로벌 브랜드들과 경쟁에서 잘 버텨왔지만 창조가 아닌 모방에 의존하는 한계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전문가들은 리닝에 대해 좀 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베끼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리닝은 글로벌 브랜드와 경쟁을 하면서도 사실은 중저가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했다. 제품의 포지셔닝이 어정쩡했던 것이다.
리닝의 로고와 슬로건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리닝의 영문 머리글자인 ‘L’자를 늘어뜨린 로고는 나이키 로고와 비슷하다는 비난을 샀다. ‘뭐든지 가능하다’(Anything is Possible)는 슬로건은 나이키의 ‘그냥 하라’(Just Do It)와 다를 게 뭐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리닝이 단행한 가격 인상 전략도 효과가 별로였다. 프리미엄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은 리닝의 품질이 나이키나 아디다스만 못해 불만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전통적인 리닝의 고객들은 다른 중저가 브랜드로 눈길을 돌렸다.
나이키의 본고장인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진출해 직접 나이키와 경쟁을 벌이겠다고 나섰던 무모함도 사세를 더 기울게 했다. 미국 스포츠웨어 분야 최고 전문가들을 영입했지만 미국에 있는 직원들부터 정리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하필 그때 미국 대표 유통업체인 풋락커의 자회사인 챔스에 납품 계약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러닝화를 온라인으로 판매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큰 문제였다. 신상품을 매장에서 확인하는 미국인 소비자들을 공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 철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리닝은 결국 2012년부터 대규모 감원 등 구조조정을 본격화했다. 규모가 크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브랜드에 더욱 집중하고, 규모가 작으면서 실적이 시원찮은 브랜드는 축소 조정했다.
한국인이 구원투수로 등장
이런 리닝의 구원투수로 한국인이 나선 것도 이채롭다. 2012년 8월 리닝 부회장으로 선임된 김진군 씨가 그 주인공. 김씨는 자신이 파트너로 있던 TPG캐피털이 2012년 초 리닝에 투자한 것을 계기로 이 회사에 참여했다.
그는 리닝이 실적 부진에 빠진 배경에 대해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했다.
“1990년대 중국 스포츠 의류 시장은 연평균 30%씩 성장했다. 그러나 매장 한 곳당 성장은 별로 없었다. 성장의 90%는 매장을 추가로 열면서 얻어졌다. 이제는 매장을 더 열 곳이 없다보니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됐다. 리닝도 마찬가지다. 성장을 추구하면서 영업점을 무작정 늘리다보니 재고가 늘고 현금 흐름이 나빠졌다. 매장을 정리하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리닝은 아직 흑자로 전환하지는 못했다. 다만 지난해 적자를 3억9154만위안으로 막아 2012년 19억8000만위안에 비해 손실액을 크게 줄였다. 매출액은 전년 대비 12.8% 떨어진 58억2000만위안으로 줄었지만 재고 물량도 많이 감소시켰다. 매장 수도 2011년 말 8255개에서 5915개로 줄였다. 몸집을 줄여 체질을 개선한 것이다. 리닝이 재도약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들려올 날도 멀지 않았다는 관측이다.
리닝은 ‘체육에서 시작해 체육에서 사용한다’는 정신으로 회사를 경영해왔다. 베이징 시가 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가장 열정적인 후원인 역할을 했다.
그는 공익사업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중화건강급행열차 자선펀드의 이사이자 대사로서 빈곤하고 낙후한 지역 백내장 환자들의 시력 회복을 돕고 있다.
상어보호행동에도 참여해 야생동물 보호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 운동선수 교육펀드를 창립해 운동선수의 직업 기능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리닝은 1963년 3월 광시장족자치구 라이빈 시에서 태어났다. 원적지는 광둥성 포산 시다. 그가 처음 체조를 접한 것은 6살 때이던 1971년. 광시장족자치구 체조팀에 들어갔다가 1980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 체조 선수로 발탁됐다. 20년간 체조 선수로서 누구보다 화려한 생활을 했던 리닝은 어느덧 그보다 긴 24년간 기업인으로서 살아왔다. 그가 지금 당장은 사업상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선수 시절 보여주었던 뚝심이 사업 재기에 큰 힘이 될 것으로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