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뒷동산…은 꽤나 멀었다. 가장 속도가 빠르다는 기차를 타고 새벽부터 댓바람에 내달렸지만 율산마을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 건 서울에서 출발한 지 7시간 만이었다. 그 마을 야트막한 산자락에 해산(海山) 한승원이 살고 있다. 장흥에서 태어난 소설가는 마흔 한 살에 상경해 십수년간 서울생활을 하다 20여 년 전 낙향했다. 그동안 <불의 딸> <포구> <아제아제 바라아제> <아버지와 아들> <해일> <시인의 잠> <동학제> <아버지를 위하여> <해산 가는 길> <초의> <원효> <추사> <사랑아, 피를 토하라> 등 수많은 작품을 썼고, 한국소설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 여러 상을 독차지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상은 그 길로 나아가면 잘되겠다고 박수쳐주는 것”이니, 1968년 등단 이후 근 50여 년간 많은 이들의 칭찬 속에 한 우물만 파온 셈이다.
득량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그의 집필실 ‘해산토굴’은 고즈넉했다. 사람의 인기척이 드문지 오솔길마냥 좁다란 입구 주변에 자주빛 사랑초가 흐드러졌다. 그 마당 한쪽의 3층 석탑과 상석(床石)으로 일행을 이끈 노(老)작가는 “여기가 내 무덤”이라며 엉덩이를 붙였다.
“장차 내 무덤이라고 만들어놨어요. 아들딸한테 화장해서 뿌리고 여기다가도 좀 해놓으라고. 이게 상석입니다. 소설가 임철우 씨가 미리 꽃을 갖다 놓는다고 상석 앞에 백합을 심어놨는데, 이게 해마다 나와요. 3층 석탑은 장흥 보림사의 3층 석탑을 축소해서 만들었어요. 이렇게 꾸민 지 벌써 15년이나 됐네. 내가 일흔 여섯 살이고 아내가 일흔 네 살인데, 늘 이별 연습을 합니다. 곧 떠난다고 생각하면 소중하지 않은 게 없어요.”
팔순을 바라본다지만 작가는 여전히 맑았다. 최근 석가모니 붓다(부처·깨달음을 얻은 자)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소설 <사람의 맨발>을 출간한 그는 “이 부도덕한 정글 같은 세상에서 왕자로서의 삶을 버리고 출가를 선택한 싯다르타의 정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며 먼 곳을 응시했다. 어쩌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당연히 듣고 싶은 마음도 깊어졌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일상과 현재로 이어졌다. 작가는 갖고 있는 것부터 제대로 고쳐 써야 한다며 간간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어요. 다 알고 있는 말인데 당하고서야 알게 돼요. 지금부터 외양간을 잘 고쳐야 합니다. 다시는 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금은 외양간을 고쳐야 할 때예요.”
뒤는 산이요 앞은 바다가 탁 트였네요. 경치가 대단합니다.
이 앞이 득량만이에요. 저 멀리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 소록도로 넘어갑니다. 아침이면 풍광이 더 살죠. 이 집필실을 해산토굴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곳에서 혼자 책 읽다 글 쓰고 산책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 냄새가 그리울 때도 있을 텐데요.
글 쓰는 걸 단체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읽고 쓰는 게 좋은 것이지, 만나고 얘기해봐야 다 쓸데없어요.
<사람의 맨발>을 출간한 지 보름 남짓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다작인데요.
지난해 <겨울잠 봄꿈>을 냈고, 올 3월에 소리꾼 임방울 선생의 이야기 <사랑아, 피를 토하라>를 냈어요. <사랑아…>는 사실 지난 9월에 내려던 것인데, 출판사 사정 때문에 늦춰졌어요. 그러다보니 책이 거듭해서 나오게 됐습니다. 내 나이가 일흔 여섯인데, 지금까지 글 쓰는 작가들이 드물어서 그리 보이는지도 모르죠.
작품 구상이 현재 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어요.(웃음) <사람의 맨발>도 5년 전부터 써왔던 것이고, <사랑아, 피를 토하라>는 더 오래됐네. 써놓고 다른 작업을 하다가 다시 그걸 꺼내 고쳐 나갑니다. 완결된 글을 1년 쯤 뒤에 다시 보면서 3개월간 고치는 식이죠.
그럼 이미 다음 작품도 집필 중입니까.
명년이나 출간할까 하는데, 거의 완결됐어요. 다시 고향 얘깁니다. 아버지가 남로당이었던 아들의 힘겨운 세월이죠.
인간만 살면 된다는 오만, 그게 싫어 낙향했다왜 소설가가 됐냐고 물으면 우문일까요.
난 청년기에 어떤 게 올바른 삶인지 몰라 방황이 많았어요. 그러다 소설가가 되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소설을 통해 어떻게 나를 가다듬어야 하는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가늠하게 됐습니다. 소설을 쓴다는 게 하나의 수도이자 수양이죠. 그래서 구도자적인 작품이 많아요.
흔히 소설가를 두고 쉽지 않은 길이라 하던데, 주위에서 반대는 없었습니까.
부모님은 법대에 진학했으면 했는데, 소설가가 된다니 완전히 대립했지요.(웃음) 9남매 중 차남이었는데, 그래도 소설가로 어린 동생들 키우고 가르치고 시집, 장가보내 분가시켰어요. 동생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했을 때 난 소설가이자 중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그때 모든 걸 접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17년을 살다가 쉰여섯 살에 낙향했어요.
당시에도 교직은 안정적인 직업이었을 텐데요.
사람들이 웃었지. 결혼도 했고 아들딸 셋이나 낳았을 때니 내가 봐도 무모했어요. 하지만 과감히 사직서 쓰고 상경한 건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선생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만 사는 게 소원이었거든. 소원풀이를 했지. 그때가 마흔 한 살이었습니다.(웃음)
작가는 슬하에 두 아들과 딸을 뒀다. 자식들 중 하나가 소설을 썼으면 했는데 큰아들 규호(필명 동림)와 딸 강은 이미 등단했고, 만화가인 막내 강인은 등단을 준비하고 있다.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최근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출간했다. 5·18 민주화 항쟁을 다룬 또 하나의 광주 이야기다. 큰아들이 출판사 ‘받침없는 나무’를 운영하고 있으니 가족이 모여 책 한 권 뚝딱 만들겠다고 하자, 작가는 손주 사진을 가리키며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마침 인터뷰 당일이 어버이날이어서 거실에 놓인 카네이션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40대에 찾은 제2의 도전이네요. 왜 굳이 서울이었습니까.
그 땐 광주에서 생활했는데, 문학을 하려면 서울에서 해야 한다더라고. 잡지사나 출판사가 모두 서울에 있으니 문학시장도 그곳일 수밖에. 40대…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을 그때 다 받았네.
어떤 이들은 정 없고 복잡한 서울이 싫다던데요. 이유야 어떻든 실제로 도심 외곽에 터를 잡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나 또한 여러 해를 서울서 보내면서 내 한계점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문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이 휴머니즘인데, 그건 인간주의에 대한 반성이거든. 그렇게 인간주의에 대한 한계를 생각하게 된 거죠. 식물이나 동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인간만 살면 된다는 오만, 그게 인간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려고 낙향했어요. 지금껏 서울서 살았다면 벌써 죽었을 지도 모르죠.
대한민국에는 구조적인 패악이 있다그렇게 고향인 장흥에 터를 잡고 원효, 다산, 추사, 전봉준에서 석가모니까지 인물소설을 냈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과거지만 현 시대의 사상이 종종 연상되는데요.
작가가 소설을 쓰는데, 그 시대에 왜 그 이야기가 필요한가란 당위성이 없으면 가치가 없어요. 왜 이 시대에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지 분명히 해야죠. 또 하나 살아간다는 건 나보다 나은 삶을 산 선인들을 공부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의 맨발>은 석가모니의 출가정신이 도드라집니다.
출가 이전이 싯다르타 그 이후는 석가모니지요. 탐욕을 버린다는 것 자체가 출가정신이에요. 수많은 탐욕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제대로 세상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함부로 살고 있거든. 함부로 사는 삶 때문에 이 세상이 더러워지고 무너집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무너져 내린 대표적인 예가 세월호 침몰 아니겠어요. 배의 안전을 도모하지 못하고 서로 잘 해먹는, 선박검사를 해야 할 사람, 배를 운영한 사람, 관료까지 서로 두루 잘 짜서 해먹는…. 그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못된 점이죠. 그러한 악(惡)이 누적되면서 사고가 발생했어요. 둘러보면 그런 것들이 참 많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납품비리도 구조적인 병폐죠. 서로 잘 먹고 잘 살기, 검사했지만 다 괜찮다고 넘어가버리는 행정편의주의 등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악입니다.
그건 자본주의의 병폐입니까. 대한민국의 악습입니까.
대한민국은 나름의 구조적인 패악이 있어요. 그걸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는 규제개혁을 놓고 대통령이 7시간에 걸쳐 끝장토론을 했다는데, 모든 규제가 다 암덩어리는 아니잖아요. 나쁜 규제는 풀어야죠. 그런데 나쁜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분위기를 타고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제까지 지키지 않고 넘어가는, 그런 적당주의나 편의주의가 문젭니다.
그것이 가장 큰 패악입니까.
그렇지. 수면에 가라앉아 있는 대한민국의 구조적인 패악이 언제 또 터질지 모릅니다. 위태위태하죠. 비단 해난사고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에나 이런 것들이 숨어있어요. 그게 터지기 전에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나 정신 차려야 합니다. 가령 경복궁 근처 학교 옆에 호텔을 짓는 문제도, 최근에 서울에 갔다가 그 터를 직접 봤더니 정말 학교가 바로 옆이더라고. 당연히 규제가 존재하는데 그 규제를 풀어서라도 호텔을 짓겠다는 것은 큰 건 용서해주고 작은 건 잡는 거 아닙니까. 규제를 풀겠다면 지켜야 할 규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는 못된 버릇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작은 거 하나부터 시작해야죠.
어떤 이들은 무서워할 어른들이 없어서 이 지경까지 왔다고 합니다.
어른이 없다는 건 경륜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자본주의의 논리지. 돈 많은 이들에게 힘이 있고 그들이 어른이라는 것이죠. 오죽하면 황제노역이 나왔겠어요. 돈 많은 이들이 권력을 갖고 있는, 말하자면 경륜을 갖춘 이라도 가난한 이들의 말은 먹혀들지가 않아요. 옛날식으로 말하면 못된 사회가 됐어요. 진리나 정의가 사라져버렸어요. 돈이 진리요 권력이라니. 깨어나야죠. 스스로의 삶을 냉철하게 성난 얼굴로 성찰해야 합니다. 우선 반성하고 새롭게 나서야죠.
후진국에 살면서 선진국 멋을 내고 있다일각에선 여전히 후진국이란 말도 나옵니다.
후진국일 만도 하지. 사실 그 사회는 우리가 1960~1970년대 라면도 먹지 못하고 살았던 시댑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먹을 게, 술이, 명품이 넉넉해졌어요. 기업이 수출을 잘한 덕에 굶는 사람들이 적어졌지요. 그런데 그뿐이에요. 왜 후진국이냐. 조선분야에서 최고라고 자부하던 나라가 20년 된 낡은 배를 수입까지 해 사고가 났어요. 비리가 전혀 없어야 할 군대에서 납품비리가 터져 나옵니다. 지금 생각난 것만 그런데, 이렇게 후진국 구조에 살면서 선진국의 멋을 내고 있어요. 그러다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상당히 나쁜 조건에서 살고 있음에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달콤한 자본주의의 환상이나 환혹에 취해서 깨어나질 못하고 있는….
진정 선진국으로 나서려면 어떤 점이 선행돼야 하는 겁니까.
그러려면 우선 국가 공무원이 깨끗해야 하고 기업이 윤리적인 의미에서 배부르게 해준 이들에게 사회 환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들은 세금을 더 내야죠. 오히려 부자감세라니. 그건 선진국의 모양새가 아닙니다. 나라 빚은 사정없이 많은데 그걸 체감하지 못하고 너무 건방지게 살고 있어요.
세월호 사건 이후에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마땅치 않다는 겁니다.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실종자 수습 과정을 보면 정직하지 못해요. 틈만 나면 감추려하고 변명합니다. 자기 얼굴만 챙기려고 하는데 그게 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어요. 그 현장에서도 높은 이가 온다고 떠들고 서두르는, 거기서도 권위라니 코미디 같은 일이죠. 지금 이 순간에 아이들에게 뭐라 한다는 게 섣부르긴 한데… 어른들 말 듣다가 죽었다고… 그렇지만 어른들 말을 들어야 합니다. 권위가 무너졌다고 어른들 말을 듣지 말라고 할 순 없어요. 그러려면 어른들부터 깨어나야지. 정말로 깨어 있으려고 분골쇄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그래도 그런 양심있는 어른들이 있으니 그런 분들의 가르침을 따라야겠지….
작가는 산책할 시간이 됐다면 상석에서 일어나 툭툭 먼지를 털었다. 오후 4시면 걷는다는 해변은 여닫이문처럼 육지쪽 물만 내보내는 수문이 있어 여닫이해변이라 불린다. 한국관광공사가 ‘가장 깨끗한 개펄이 숨 쉬는 아름다운 바닷가’로 꼽은 약 600m의 해변에는 ‘한승원 산책로’가 나있다. 장흥군이 집필실 아래 한승원 문학관과 함께 마련한 길이다. 그 길가에 우뚝 선 바위 30여 개에는 작가의 시가 새겨져 있다. 돌아오는 길에 그 중 한시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