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안 칼럼이 와?”
서울모터쇼가 열리기 전, 이안 칼럼(59) 재규어 디자인 총괄 디렉터가 방한한다는 소식에 자동차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그는 기아의 피터 슈라이어, 폭스바겐의 발터 드 실바와 함께 현존하는 세계 3대 디자이너로 꼽힌다. 재규어 본사가 있는 영국에 가서도 만나보기 힘든 그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은 기사 가치 그 이상이었다. 쇳덩어리에 불과한 자동차를 아름답게 가다듬는 자동차 디자이너를 ‘철의 마술사’라 부른다면 그는 더 나아가 생명을 불어넣는 ‘철의 마법사’로 여겨진다. 여기에 미국 포드, 인도 타타그룹 등으로 인수되면서 디자인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박물관에서 구경하는 차’로 치부되며 죽어가던 재규어가 다시 ‘포효’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1954년 스코틀랜드 덤프리스에 태어난 그는 영국 글래스고 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세계 유수의 자동차메이커가 선호하는 디자인 명문인 영국 왕립예술대학(RCA)에서 자동차 디자인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포드자동차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10여 년간 근무한 뒤 TWR 디자인을 거쳐 1999년 재규어 수석 디자이너로 온 그를 세상에 알린 건 영화 <007 시리즈>다. 영화에 나오는 애스턴마틴 V12 뱅퀴시를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재규어로 옮긴 그는 ‘물 만난 물고기’가 됐다. 그는 클래식 럭셔리카에 만족하며 정체돼 있던 재규어의 변화를 이끌어낸 디자이너로 평가받는다. 정글의 맹수 재규어처럼 영국 신사다운 기품과 함께 폭발적인 주행성능도 발휘해야 한다는 브랜드 아이덴티티인 ‘아름다운 고성능’은 그를 통해 확립됐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품위 있는 자동차로 평가받는 영국 브랜드 ‘재규어’는 그가 어렸을 적부터 꿈꿨던 곳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딜러들에게 직접 신차 브로슈어를 요청할 정도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는 14세 때 재규어에 자신이 직접 그린 디자인을 제출해 격려를 받았던 일화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브랜드라 재규어의 DNA를 잘 이해해 현대적으로 다시 해석하는 데 유리했다. 1968년 이후 차별성이 줄어들면서 정체된 재규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이사진을 설득했다. 사실 시간이 흘러 재규어가 전통적인 브랜드가 됐을 뿐, 설립 당시에는 현대적이었다. 현대적 감각을 되살리는 것이 나의 일이다.”
재규어도 그를 영입하면서 부흥기를 맞게 된다. 보수적인 전통에 매몰됐던 재규어에 현대적인 젊은 감성을 입혀 브랜드 이미지도 한층 젊어졌다. 나이든 사람들이나 타는 자동차라는 이미지도 한층 젊어졌다.
“아름다움과 성능은 대립하는 요소가 아니다. 차의 라인은 차의 움직임을 반영한다. 엔지니어링 요소들을 확실하게 잡은 뒤 모든 것을 포괄하도록 디자인하면 된다. 재규어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매우 긴밀하게 협업한다.”
그가 새로운 모델을 내놓을 때마다 업계와 언론은 극찬을 쏟아내며 열광했다. 그가 영화 <타이타닉>에 출연한 케이트 윈슬렛의 흠 없는 몸매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스포츠세단 XK는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럭셔리 자동차가 갖춰야 할 모든 기술력과 주행성능을 보여준다”는 극찬을 받으며 유럽 자동차 기자들이 주는 상을 휩쓸었다. XK가 자동차 업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 짐클락상’을 받고 영국예술학회의 ‘로열 디자이너’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9년에 내놓은 XF의 고성능 버전인 XFR은 질주 본능의 야수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는 브리티시 오토 익스프레스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뽑히기도 했다.
서울모터쇼에서 공개됐던 F타입은 ‘화룡점정’이다. F타입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카로 평가받는 E타입 이후 52년 만에 재규어가 내놓은 2인승 스포츠카다. XJ 및 XF의 강렬함과 C-X16 콘셉트카의 스포츠카 시그니처를 그대로 재현한 고유의 관능적인 곡선과 양 옆 그릴에서부터 시작해 차량 전면에 자리 잡은 하트라인 등 재규어의 독특한 디자인 요소를 새롭게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F타입이 공개되자마자 찬사가 쏟아졌다. 뉴욕모터쇼 올해의 차(월드 카 오브 더 이어) 조직위원회가 66명의 디자인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평가를 거쳐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을 갖춘 차에 주는 ‘올해의 차’로도 선정됐다.
“F타입을 완성해 가는 과정은 어떤 프로젝트보다 훨씬 즐거웠고 재규어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 꿈꿔 왔던 일이다. 절제된 선과 구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고 재규어 디자인이 갖고 있는 정수를 담으려 노력한 작업이 올해의 차 선정으로 결실을 맺은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재규어를 알리기 위해 찾은 서울모터쇼에서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곳은 기아자동차 부스다. 기아는 유럽 및 미국적 디자인 감각에 한국적 디테일을 가미해 성공적인 결과를 내고 있다는 게 그의 평가다. 그가 기아에 관심을 가진 또 다른 이유 하나는 RCA 동기이자 경쟁자인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자동차 디자인 총괄 사장 때문이다. 그는 현대, 기아 등 대중적인 브랜드들이 럭셔리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럭셔리 브랜드의 가치는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가격에 합당한 품질은 럭셔리 자동차가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요소다. 이를 위해 투자에 소극적이면 안 된다. 가격은 정해져 있지만 가치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의 나이는 59세. 그에게 이순은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디자인의 이치를 깨달아 시간이 오래 흘러도 사랑받는 디자인을 만들려는 새로운 시작점’이다. 재규어도 그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