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 반한 ‘한국의 고갱’ 최동열 화백…해발 5000m에 서면 편안 그곳은 내 평생의 작업실
입력 : 2013.05.03 17:58:38
“산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벙거지 모자에 청바지 차림, 바지 아래로는 등산화와 바람막이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등산 애호가 차림이다. 여기에 ‘산’ 얘기만 나오면 뭐가 그리 좋은지 수수하고 환한 얼굴로 웃는다. 미국 화랑가에서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는 최동열(62) 화백의 얘기다.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은 뒤, 20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은 대한민국 대표 예술가 중 하나다. 특히 그림 공부를 따로 하지 않고 화가인 아내의 작품 활동을 어깨너머로 보고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미국 평론가들은 그의 깊은 재능과 뜨거운 열정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산에 빠졌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산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작품 활동을 하는 곳이 해발 6000미터의 고산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열정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60세의 나이에 히말라야에서 삶의 또 다른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최동열 화백을 만나 작품만큼이나 강렬했던 그의 지난날을 들어봤다.
Nude & Annapurna 97x113cm Oil on linen 2012
대통령을 꿈꿨던 한국의 고갱
유년 시절 그의 꿈은 정치가였다. 경기고를 나와 대통령이 되겠다고 결심했단다. 그의 꿈에 영향을 끼친 이는 바로 할아버지였다. 최 화백의 할아버지는 1994년 갑신정변의 시발점이 된 우정국 사건 후 일본으로 건너가 관서대 법대를 나와 당시 3.1 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을 변호했던 우리나라 초대 변호사였다. 또 할머니 역시 유서 깊은 가문으로 <벙어리 삼룡이>의 저자인 소설가 나도향의 누나였다.
이런 집안에서 장손으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을 보냈던 그가 ‘대통령’을 꿈꾼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목표였던 경기고 진학에 실패하면서 인생의 나침반을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경기고 진학에 실패한 후에 곧바로 검정고시에 응시해 합격한 후 한국외대 베트남어학과에 들어갔죠. 근데 베트남 전쟁이 터졌어요. 그래서 17세에 지원입대 했죠.”
인생의 꿈이었던 대통령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목표였던 경기고 진학에 실패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간 그에게 전쟁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 1972년 교환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전쟁을 겪은 그에게 대학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질감이 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결국 공부를 그만뒀어요. 그리고 그냥 미국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죠. 저는 한국인들이 많은 LA가 아닌 미국의 동남부 지역에 있었는데, 주로 플로리다에서 생활했죠.” 공부를 그만둔 후 술과 여자,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금발의 미녀가 다가왔다. 바로 지금의 부인이다. “플로리다에서 클럽 문지기 일을 할 때였어요. 한 금발의 미녀 화가를 보고 첫눈에 반했죠. 그래서 그녀와 함께 멕시코의 인적 없는 바다로 놀러가서 한동안 지냈어요. 그렇게 인연이 돼 결혼을 했죠. 지금도 제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의 누드는 대부분 젊은 시절 아내의 모습이에요.”
결혼 이후 그는 부인과 캠핑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화가인 그녀를 위해 미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작품 활동을 도와줬다는 것. 실제 그의 부인은 결혼 당시 미국 미술계에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옛말에 ‘부부끼리는 닮아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당시에는 제가 글을 썼는데, 아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좋아 보였어요. 그래서 저도 아내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아내가 그리는 그림을 어깨너머로 보고 시작한 그의 그림 인생은 곧바로 평생의 업이 됐다.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1985년 전시회를 한 후 신표현주의 작가로 미국 미술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이다. 이때 얻게 된 별명이 바로 ‘한국의 고갱’이다. 이후 국내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대형화랑에서 초대전을 열어줄 정도였다.
히말라야의 작업실
해발5000m 고지에서 편안함을 느끼다
그는 주로 꽃과 여인을 소재로 작품을 그렸다. 이후에는 실크로드와 티베트, 네팔 등에서 벽화를 공부했다. 지금도 그의 작품에는 불교미술의 영향이 잘 드러난다. 그런 그가 2011년에는 히말라야로 들어갔다.
프랑스 파리에서 명성을 쌓은 후 미지의 세계였던 타히티에 매료됐던 후기인상파의 거장이었던 폴 고갱(Eugene Henri Paul Gauguin)처럼 그 역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히말라야의 고산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20년 동안 세계 각지를 다니며 그림을 그렸어요. 당시에도 원래 아내와 함께 인도를 거쳐 실크로드를 탐방하려 했는데 아내가 아프면서 히말라야로 왔죠. 그런데 히말라야에 오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어요. 그래서 아예 그곳에 터를 잡고 작업을 했죠.” 그는 네팔 시내에 터를 잡고, 안나푸르나와 칸첸중가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이 바로 지난 4월 선화랑에 전시됐던 <신들의 거주지-안나푸르나, 칸첸중가>에 소개됐다. “저는 해발 5000~6000미터의 고산지대로 올라가서 그림을 그려요. 사진을 찍어도 되지만 그 앞에서 그림을 그려야 사람들을 허락하지 않는 산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고산지대인 만큼 작업이 쉽지 않다. 추운 날씨와 거센 바람이 그의 작품을 방해한단다. 게다가 고산지대는 산소가 부족해 애써 그린 작품들의 물감이 잘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히말라야의 숨겨진 얼굴을 그리고 싶어 한다. 해가 떠오르기 전 설원 너머로 빛이 퍼지는 순간, 자연의 위대함과 편안함을 느낀다는 그는 “히말라야를 선택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며 다음번 작품을 위한 산행을 계획 중이다. “내 남은 평생을 바칠 작업실을 히말라야에서 찾았으니, 이제는 아픈 아내를 만나러 갈 생각이에요. 아내를 만난 후에는 다시 히말라야로 가겠죠. 이번에는 K2를 담을 생각인데, 나에게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