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4일 청와대가 장차관급 인사 9명의 명단을 발표하자 관가는 크게 술렁였다. 새 정부 주요 부처 차관 자리에 정통 관료가 아닌 정부·민간연구소 중진급 인사들이 대거 발탁됐기 때문이었다. 국방부 차관에는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이, 해양수산부 차관에는 손재학 국립수산과학원장이 이름을 올렸다.
국무총리 정책 보좌를 담당하는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에는 국책연구소인 한국개발연구원(KDI) 고영선 연구본부장이 전격 기용됐다. 심지어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자리까지 기획재정부와 금융위 내부 인사가 아닌 정찬우 금융연구원 부원장이 발탁된 데 이어 외청장 인선에서는 박형수 한국조세연구원 연구기획본부장이 통계청장 자리를 꿰찼다.
“부처 칸막이 없애라” 연구원 출신 장차관 대거 기용
지난 2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원 출신인 류길재 통일부 장관과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농촌경제연구원장),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해양수산개발원 해양연구본부장) 등 장관급 인사 발표에 뒤이은 2차 충격이었다.
고위 관료 간 ‘별들의 전쟁’이 벌어지는 요직에 또 다시 정통 관료가 아닌 정부·민간연구소 박사들이 배치되면서 관가는 박근혜 대통령의 ‘숨은 뜻’을 파악하는 데 분주했다. 반면 청와대는 늘 “박근혜 정부의 국정철학 공유는 물론 전문성과 업무 추진력을 갖췄는지를 고려했다”며 오직 전문성에만 인선의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술렁이는 관가는 물론 인선 발표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청와대 발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내외 경제·안보 위기 속 초대 내각에 공직 경험이 전무하거나 미약한 연구원 출신을 ‘전문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대거 기용한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장 기자들이 퍼즐을 맞추듯 청와대가 밝히지 않은 숨은 인사 키워드를 분석해 도달한 결론은 바로 ‘부처 칸막이’.
‘제 밥그릇’만 챙기는 관료들보다 유연한 사고로 통합·협업 플레이가 가능한 연구원 출신을 적극 기용해 부처 칸막이를 깨뜨리겠다는 박 대통령의 의지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었다. 실제 이 같은 분석은 박 대통령이 평소 강조해온 국정운영 방침이나 새 정부 국정철학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지난 대선에서 공약 재원조달 창구로 강도 높은 세출 구조조정을 예고한 상황에서 장차관 자리에 내부 인사를 등용할 경우 이 같은 목표를 실천하기가 어렵다.
수십 년을 한 조직에 몸 담아온 관료가 메스를 들고 조직 곳곳에 퍼진 비효율을 제거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부처 군살빼기 의지도 그렇지만 새 정부 국정 과제를 1개 부처의 단독 플레이가 아닌 2~3개 부처의 협업 사업으로 진행하라는 박 대통령의 일관된 입장도 연구원 출신 인사 기용에 적극 반영돼 있다.
부처 간 협업 플레이는 정부부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늘 박 대통령이 강조해온 사안이었다. 심지어 부처 업무보고 자체를 산업통상자원부·중소기업청, 국토교통부·환경부, 안전행정부·법무부 등 2개씩 묶어서 진행할 정도다.
이 같은 업무보고 패턴과 내부 관료보다는 전문성과 협업 프로젝트에 능한 연구소 출신을 기용한 인사 특징을 볼 때 박 대통령은 관료주의에 대해 상당한 경계 심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인사 원칙은 지난 2월 정부 경제컨트롤타워인 경제부총리 자리에 현오석 KDI 원장을 발탁하면서 일찌감치 예고가 됐다. 현 부총리를 비롯해 박근혜 정부 초대 내각에 기용된 장차관 인사 중 연구원 출신은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 9명에 이른다.
관료사회에서는 “과연 이들이 제대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지만 이는 현재의 청와대 인사 코드를 전혀 모르고 하는 얘기다.
앞으로도 부처 칸막이를 없애고 협업 플레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연구원 출신 중진급 인사들이 대거 박근혜 정부에 기용될 것이라는 게 청와대 내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연구원 출신 ‘인맥 창고’로 활용될 가능성
경제관료 출신이면서 오랜 기간 KDI 원장을 맡아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글로벌 경제 위기와 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진단과 평가, 대책을 마련할 적임자라는 평가다.
그는 부총리 내정 뒤 매일경제신문과 만나 “KDI가 고민한 바로는 우리 경제가 단기적으로 빨리 회복을 해야 하지 않느냐가 중요하다”며 성장잠재력 회복이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내비쳤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원 출신으로 한국북한연구학회장을 역임한 류길재 통일부 장관 역시 연구원 출신 장관으로 분류된다. 박근혜 대통령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박 당선인과 인연을 맺었다. 최대석 이화여대 교수, 윤병세 외교부 장관 내정자, 홍용표 한양대 교수 등과 함께 박 당선인의 통일·외교안보 정책기조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만든 주역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에서 고용노동부 수장이 된 방하남 장관은 이번 인사에서 가장 주목 받은 사람 중 하나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연구조정실장과 고용보험연구센터 소장, 노동시장연구본부 본부장 등 원내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고용과 노동의 연계를 강조한 고용·노동분야 전문가라는 그의 이력에서 박 대통령의 부처 협업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다. 정보관리실장, 지식정보센터장, 기획관리실장, 농촌발전연구센터장, 농업농촌정책연구본부장 등을 맡아 농촌 현장의 목소리와 현재 농업상황을 지식기반의 행정으로 발전시킬 적임자로 지목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 ‘조력자’로 알려진 최외출 영남대 교수가 이 장관을 직접 추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가는 물론 학계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은 1997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에 입사한 뒤 해양정책연구부 부장, 해양연구본부장을 역임했다. 대외적인 인지도가 높지 않은 데다 박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연도 크게 드러난 게 없어 내각 인사의 최대 이변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고영선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은 그야말로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잔뼈가 굵은 재정·사회 분야 전문가로 꼽힌다. 현 부총리에 이어 현직 KDI 출신 인사가 새 정부 장차관급에 발탁된 두 번째 기록이다. 1993년 초빙연구원으로 KDI에 들어온 이후 사회개발연구부장, 거시금융경제연구부장, 연구본부장 등을 거쳤다.
백승주 국방부 차관의 경우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등을 역임한 중도 성향의 국방정책 및 안보전략 전문가다. 52세로 역대 국방 차관 중 최연소이자 관료가 아닌 민간인 출신이라는 두 가지 기록을 세운 깜짝 발탁 사례로 회자된다.
손재학 해양수산부 차관은 수산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30년 가까이 수산·어업 분야에 근무한 정통 수산 관료이면서 연구원 출신 인사로 함께 분류된다.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자원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수산업과 관련 연구기관에서 두루 근무하면서 수산 정책 연구의 구심적 역할을 했다. 국립수산과학원장 재임 시절 세계 최초로 넙치 게놈 해독에 성공하는 등 탄탄한 연구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관료조직 효과적 통제 여부 가장 큰 과제
금융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한 정찬우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금융연구기관에서 서민금융 부문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가계부채 전문가다.
지난 3월 말 취임식 때 “타성에 젖은 칸막이가 부지불식간에 국민에게 불편을 주고 업무 비효율을 낳고 있다”고 일침을 가한 바 있다.
기획재정부와 함께 민생경제 회복의 중책을 맡았다. 국민행복기금 정착과 주가조작 근절대책을 최우선과제로 삼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첫 통계청장으로 임명된 박형수 청장 역시 대표적 국책연구소인 한국조세연구원 출신이다. 주로 기획재정부 1급이나 교수 출신이 임명되는 자리에 그가 낙점되면서 기획재정부 관료들이 적잖이 놀랐다는 후문이다.
46세로 정부 차관급 이상 인사에서는 물론 역대 통계청장 중 최연소다. 대학 졸업 후 한국은행에 입사해 외환관리부, 국제부, 조사국 등을 거쳐 조세연구원에서는 2011년부터 일했다.
이들 연구원 출신이 박 대통령과 교류를 갖고 요직에 기용되는 인맥의 보고는 역시 국가미래연구원과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등이다.
박근혜 정부와 청와대 장차관급을 비롯해 청와대 1급 비서관 등 요직에 등용된 120명의 활동 궤적을 보면 54명이 미래연·행추위·인수위 중 최소 한 곳 이상에 몸담았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미래연과 행추위를 모두 거친 인물이다. 백승주 국방부 차관은 미래연과 인수위 활동 경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외부 전문가를 적극 기용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인사 방침은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위험 요인도 존재한다.
협업과 전문성 원칙에 집착하다가 자칫 함량 미달인 인사가 장차관에 등용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관료 사회 경험이 미약한 연구원 출신 장차관들이 과연 경직된 관료조직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지 여부는 청와대가 안고 가야 할 가장 큰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