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mber]황금피켈상 받은 히말라야 전문가 김창호…간절함 클수록 정상에서의 희열도 더 크죠
입력 : 2012.12.28 14:18:39
수정 : 2013.01.08 17:36:06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던 지난 12월5일 아침, 김창호 대장(몽벨 자문위원‧대한산악연맹 이사)과 북한산으로 향했다. 그의 산 이야기를 듣기에 산보다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산에 대한 그의 열정에 비하면 북한산조차 밋밋한 듯했다. 그가 히말라야에 쏟은 노력은 라인홀트 메스너의 그것에 비견될 정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목숨 걸고 수집한 히말라야 정보
김창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히말라야 전문가다. 아니 이 정도 수식으로는 그를 절반도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목숨을 걸고 거벽을 오르고 수백 길 골짜기를 샅샅이 누비며 히말라야 전역의 정보를 꼼꼼히 기록했다. 세계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카라코람과 힌두쿠시에서만도 1800여 일 동안 탐사했다. 아니 목숨을 건 모험이란 게 적확하다. 장대 하나 들고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크레바스를 건너뛰며 히말라야의 온 천지를 훑었다. 추위와 배고픔 정도는 약과다. 테러범에게 잡혀 목숨이 경각에 달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파키스탄 쪽 탐사를 마친 뒤 2006년 후반부터 중국횡단산맥과 티베트, 네팔 히말라야 탐사에 나서 이쪽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그가 발로 캐낸 정보의 가치는 세계 산악인 대부분이 인정할 정도다. 김창호는 현재 독일 볼프강 헤첼의 히말라야 카라코람 연대기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등반에서도 그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이미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 가운데 에베레스트를 제외한 13좌를 16번이나 무산소로 올랐다. 낭가파르바트와 가셔브룸Ⅰ‧Ⅱ 등이 두 번씩 오른 봉우리다.
대학생 때 파키스탄의 거벽 트랑고 그레이트 타워(6284m)를 80여m나 추락했다 다시 오르는 등 16일 동안 매달려 자며 오른 것은 전설처럼 남아 있다. 2005년엔 낭가파르바트(8126m)의 루팔벽을 넘어 정상에 오른 뒤 뒤편 다이미르 벽을 타고 하산했다. 1970년 메스너 형제가 오른 뒤 35년 동안 아무도 못한 것을 그가 두 번째로 해냈다. 2008년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미등봉이었던 파키스탄의 바투라Ⅱ봉(7762m)을 세계 최초로 올랐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2년 그는 네팔에 남은 독립봉 형태의 가장 높은 미등봉 힘중(7140m)에 올라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네팔의 가장 높은 미등봉 최초 등정
지난 11월 9일 서울 가든호텔에선 아시아 산악인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2012년 황금피켈상아시아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날 김 대장과 안치영 대원은 중국의 ‘자유정신 지아지 원정대’와 공동으로 황금피켈상 아시아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황금피켈상을 안겨준 힘중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문산악인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봉우리다. 김 대장은 봉우리 위치를 찾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카라코람과 힌두쿠시 산맥 일대를 탐사해 한국 산악인의 파키스탄 진출에 도움을 줬다. 2006년 가을부터는 티베트 탐사에 나서 정보를 수집했다. 히말라야 산군 중 네팔의 정보는 많았기에 나머지 지역을 먼저 했다. 2008년 바투라Ⅱ봉을 오른 뒤 네팔로 눈을 돌려 의미 있는 등정을 할 미등봉을 찾던 중 2009년 마나슬루 정상에서 멋진 봉우리들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힘중이 있었다. 특히 올해가 한국 산악계의 히말라야 원정 진출 50주년이라 힘중을 가기로 했다.”
지난 2002년 네팔 정부가 신규로 등산을 허가한 몇 개 되지 않는(125개) 봉우리 중 페리히말 산군의 7000m급 4개는 그 전에 일본이 올랐고 마지막 남은 힘중을 그가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국내엔 자료조차 없었다. 등산이 허용됐지만 위치조차 명확치 않았다. 김 대장은 독일과 일본 미국의 지인들에게 부탁해 자료와 사진을 받아 겨우 위치를 찾아냈다.
힘중은 구글어스조차 위치를 잘못 기재하고 있을 정도로 미지의 봉우리였다. 6000~7000m급 고봉에 둘러싸인 데다 봉우리들 사이에 커다란 빙하까지 있어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게다가 높이 정보도 제각각이었다. 네팔 정부는 7140m라고 했는데 독일 지도엔 7092m, 일본 지도엔 7092.94m(7094m)로 나왔다.
4년여의 연구 끝에 정확한 봉우리 위치를 확인하고 구글어스로 벽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구상했다. 김 대장은 “등반은 체력만 아니라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노말 루트는 공개됐지만 다른 루트들은 공개가 안돼 90%는 책상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함께 오를 대원으론 안치영을 초청했다. 고 김형일 산악인의 후배인 안치영은 로체 남벽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정도로 신루트나 고난도 등반 경험이 많은 등반가였다.
한국에선 달랑 개인 짐만 가지고 갔고 식량은 현지에서 조달했다. 현지 준비는 네팔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밍마 셰르파에게 부탁했다. 밍마가 파키스탄의 산들을 오를 때 김 대장이 참여한 원정대가 도와줬는데 밍마는 그 보답으로 이번 원정을 실비로 지원했다.
원정대원 둘, 요리사와 주방 보조 둘 등 넷이 원정에 나섰다. 알파인 스타일이라 행렬도 단출했다. 등반에 필요 짐 4개에 말7마리가) 전부였다.
첫 과제는 벽(힘중) 접근이 양호한 베이스캠프를 찾는 것. 캐러밴 사흘째에 푸 마을에 처가를 둔 셰르파를 만났다. 그가 당초 목적지에선 벽 접근이 쉽지 않다며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덕분에 베이스캠프는 쉽게 정했다.
“진짜 설악산 가듯 떠났다. 베이스캠프 설치도 1시간 만에 끝냈다. 베이스캠프가 해발 4880m, 벽 밑은 6050m다. 정상까지 1100m가 남았다. 벽 밑에도 가지 못하는 팀들이 많다. 벽 밑만 가면 70%는 된다.” 김 대장의 설명이다.
실제 벽으로 가는 길목의 팡리 빙하가 문제였다. 삼단 빙하의 상단은 좋았는데 중단 쿠르아르가 녹아내려 위험했다. 돌아와 사흘을 쉬며 연구하는데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 녹아내리던 폭포가 얼어붙어 안전하게 됐다. 이틀에 걸쳐 벽에 가서 정찰을 했다. 남릉은 쉽지만 위험해 보였다. 톱날같은 암릉으로 등반보다 하산이 위험해 보였다. 남서벽에 튀어나온 기둥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위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낙석 위험이 없는 곳이라 가팔랐지만 선택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베이스캠프에서 문제가 생겼다. 솔라 축전지가 고장났고 위성전화가 불통이었다. 이틀에 걸쳐 마을까지 가 충전을 해왔다. 준비가 끝났다. 벽에서 이틀 등 3박4일 만에 다녀오자고 했다. 암벽 구간은 안치영이 선등했고 빙벽 선등은 김 대장이 맡았다. 서로 잘 하는 구간을 맡은 것.
첫날 바위 13피치, 빙벽 7피치 등 20피치를 올랐다. 세락 밑에는 마땅한 잠자리가 없었다. 400~500m를 더 올라가니 2인용 텐트 칠 곳이 나왔다. 6770m 높이였다. 그날따라 제트기류가 강하게 불었다. 너무 추워 잠을 설쳤다.
새벽에 김 대장이 선등으로 나섰다. 눈사태 위험이 있는 설빙벽 구간을 최대한 빨리 통과하려고 확보도 하지 않고 연등으로 올랐다. 3중화를 신었는데도 발이 시렸다. 얼마나 추웠는지 예정했던 등반선에서 벗어나 몸이 저절로 해가 비치는 쪽을 따라갔다. 바위 밑에서 처음으로 햇볕을 쬐며 몸을 녹였다.
물러서서 보니 1피치 정도(약 50m) 남았다. 어렵지 않은 칼날 능선이라 안치영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그가 초등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들보다 앞서 정상에 선 경험이 적었다. 그래서 그에게 전환기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안치영은 세계적 등반가 자질을 갖추고 있다. 이제까지는 뒤에서 확보하고 봐줄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김 대장의 마음 씀씀이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정상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칼날 능선이라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가까스로 사진을 찍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다행히 날씨가 맑아 마나슬루에서 다울라기리까지 모두 보였다.
급히 한 피치를 하강해 숨을 돌렸다. 그때서야 바람 때문에 GPS를 꺼내 정확한 고도를 측정하지 못한 게 생각났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클라이밍 하강을 해 내려왔다. 다음에 누군가 가더라도 처음 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흔적을 최소화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락피톤과 슬링 몇 개를 남겼다. 닷새 만에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이번 원정은 자비로 했다. 등반에 1만5000달러, 트레킹에 3000달러가 들었다. 결혼 직후 간다니 모두가 만류했던 것. 지난 5월20일 식을 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선배들은 욕심이 지나치다고까지 했다.
그런데도 흔쾌히 승낙한 부인이 김 대장은 더없이 고마웠다.
“가장 큰 후원자는 아내였다. 흔쾌히 승낙하며 비용을 마련해줄테니 다녀오라고 했다.”
무게와의 전쟁서 이기다
김 대장은 빠른 등반을 위해 짐을 최대한 가볍게 꾸렸다. 보통 등반엔 9~11mm 로프를 쓰지만 그는 무게를 줄이려고 7mm 다이니마 50m, 6mm 케블라 60m를 가지고 갔다. 텐트 1kg, 침낭 1kg, 아주 작은 버너와 가스 반통 등이 전부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옷의 라벨을 떼고 나무 숟가락을 가져갔을 정도다.
“한 마디로 무게와의 전쟁이었다. 고소에서 동작을 원활히 하려고 내의와 패딩 아우터 하나씩만 입고 갔다.” 그 얇은 옷으로 닷새 동안 히말라야의 강추위를 이겨낸 것이다.
그가 히말라야로 부른 트랑고 타워
대학 때 원정한 트랑고 그레이트 타워와 가셔브룸Ⅳ(7925m)의 아름다운 기억은 그의 인생을 돌려놨다.
“대학 마치고 잠깐 일을 했다. 그런데 술 한 잔 하고 누우면 너무나 그리웠다. 여유가 있을 때 가려면 50~60대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파키스탄은 내가 일해야 할 곳이었다. 너무 좋은 곳이었다. 히말라야 선구자들이 미래에 좋은 등반을 펼칠 플레이 그라운드는 파키스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때는 한국에 자료가 없어 내가 제공할 수 있겠다는 개인적 만족감에서 시작했다. 카라코람만 다 보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섰지만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비자며 입산허가 등 걸림돌이 한둘이 아니었다. K2를 아우르는 발토로 빙하 입산허가에만 1주일이 걸렸다. 갔다 와서 또 다른 봉우리 허가 받고 그러면 한 달에 한 곳밖에 갈 수 없었다. 그런 절차를 빼려고 가이드와 짐꾼 없이 혼자 다니기로 작정했다.
K2원정대의 차를 얻어 타고 들어가 한 달 동안 돌아다니다 마을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졌다. 빈혈이었다. 갈 때 만난 마을 주민이 깜짝 놀라며 얼굴을 보라고 했다. 20kg의 짐을 지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한 달을 돌아다녔으니 체중이 엄청나게 줄었다.
그 때부터 식량을 현지화 했다. 주민들이 캔 감자와 밀가루를 얻고 양치기에게 치즈를 얻어 돌아다녔다. 야크 똥으로 불 피우는 법도 배웠다.
식사는 매일 수제비였다. 밀가루 반죽해 넣고 감자와 야채 썰어 넣고 끓이면 되었다. 양 조절은 물로 했다. 아침엔 야크 똥 태워 차 한 잔 끓여 마셨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은 수제비로 채웠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돌아다니다 마을로 내려와선 하루에 3kg까지 고기를 먹으며 체력을 비축했다. 푹 쉬며 사흘 정도 엄청나게 먹으면 체중이 회복됐다. 카라코람은 빙하라 양치기가 없어 매달 그러기를 반복했다. 돈도 없었고 규제를 넘으려니 어쩔 수 없었다.
시내에 내려와선 버스로 다녔다. 1루피(10원) 때문에 현지인과 싸우기도 했다. 짜타피 2장과 현지 요쿠르트 1잔으로 한 끼를 해결했다. 10루피도 안 되는 돈으로 한 끼를 때웠다. 귀국 항공권은 끊어놨기에 현지에서 마지막 돈이 떨어져야 귀국했다.
한 달 정도 험한 길을 돌아다니면 옷은 누더기가 됐다. 돈을 많이 들고 다니면 위험해 시내에 나와 조금씩만 찾아서 썼다. 한국으로 말하면 속초 정도 되는 곳까지 나와 돈을 찾은 뒤 다시 오지로 들어갔다. 조금 더 돌아야 하는데 돈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읍내까지 와서 돈을 찾아 다시 가니 마을 사람이 자기에게 얘기하면 빌려줬을 텐데 왜 그랬냐며 역정을 냈다. 그 만큼 현지인들과 친해졌다.
한 번은 중간에 내려왔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허가 받지 않고 간 외국인 2명이 사망하는 바람에 경찰에 불똥이 튄 것이다.
파수(Pasu)에서 롯지를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왜 가지마라는 데 갔냐”며 잡혀가면 안되니 자기가 경찰과 밥 먹는 동안 도망가라고 했다. 그 할아버지가 경찰을 불러 식사하는 사이에 도망쳤다. 마을로 갈 수도 없어 다시 산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간 곳이 와키족 양치기집이었다. 거기서 바투라Ⅱ봉 뒤쪽을 답사했다. 그 때는 바투라Ⅱ봉 등반은 생각도 못했다. 2002년에 바투라Ⅱ봉 남동쪽을 원정했고 2004년에 남서쪽 원정을 했다. 그 사이에 2003년엔 파미르의 딜리상사르(6225m)와 힌두쿠시의 아타르코르(6109m) 하이즈코르(6105m), 카라코람의 박마브락(6150m) 등 네 개 봉우리를 세계 최초로 그것도 단독으로 등정했다.
2004년에 다시 가니 주민들이 만류했다. 얼마 전 3명을 쏴 죽인 범인들이 그 곳에 있다고 했다. 그래도 가겠다니 그러면 현지인을 동행하라고 했다. 주민 한 명을 데리고 이틀을 가니 깨끗한 옷 입은 세 명이 보였다. 그들 옆에서 텐트 치고 머물었는데 동행한 현지인이 신발 같은 것을 잘 보관하라고 했다. 그래서 텐트에 침낭 등을 놔두고 중요한 짐만 챙겨 탐사를 나갔다 오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면서 화약 냄새가 풍겼다. 3명이 총을 들이대며 끈으로 묶었다. 총으로 머리를 쿡쿡 찔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입술은 바싹 탔다. 카메라며 안경까지 빼앗겼다. 그러다가 셋이 나란히 서서 총을 들었다. 죽었구나 생각했다. 총을 쐈는데 죽지 않았다. 그때서야 그들을 봤다. 그들 가운데 누가 사람을 죽였는지 알 수 있었다.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가치만 달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총을 겨누더니 떠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며 줄을 풀었다. 징그럽게 웃던 범인이 몇 발짝 가다 돌아섰다. 다시 죽이려나보다 했는데 안경을 던져놓고 갔다. 어지러웠던 모양이다.
담배를 피워 무니 그때서야 세상이 보였다.
그들이 또 올지도 몰라 숨어서 내려왔다. 새벽에 빙하가 흐르는 흙탕물을 떠서 마시고 마을 쪽으로 가니 경찰 20여명이 출동했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얼마 뒤 범인들이 체포됐다. 한 달 반 정도 재판이 진행됐다. 왔다 갔다 하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진술 때 판사에게 그들을 용서한다고 했다. 이슬람법은 용서가 법보다 우선이지만 다른 죄가 컸기에 모두에게 이 언도됐다. 재판이 끝났지만 카메라 찾는데 사흘이 더 걸렸다. 다행히 필름 두 통이 살아 있었다. 그 사진이 나중에 바투라Ⅱ봉 등정 때 요긴하게 쓰였다.
아프간 국경선 근처에선 잡혀갔다가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한창일 때라 국경 지킴이들은 지켜야 했고, 나는 나대로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산등반은 그것보다 편했다. 그렇게 매일 20~30km씩 1800여일을 다녔다.
2008년 학교의 지원으로 바투라Ⅱ봉(7762m)을 세계 최초로 올랐다. 첫 답사 후 8년 만이다. 등정 후 베이스캠프에서 혼자 많이 울었다. 생명을 위협했던 범인들도 떠올랐다. 그 사건이 자극이 돼 끝까지 하게 됐다.
바투라Ⅱ봉은 유럽에선 초등 경쟁이 심했던 곳이다. 원정대에선 나만 경험이 있었고 모두 학생들뿐이었다. 그래서 최석문(노스페이스 소속)과 함께 하자고 했다. 학생들과 함께 가야해 로프를 깔았다.
30년 잡고 인도 히말라야 탐사할 것
김 대장은 14좌 가운데 하나 남은 에베레스트를 2013년에 무산소로 오를 계획이다.
“최근 일본에 다녀왔다. 몽벨 본사에서 프로그램을 지원해 카야킹과 자전거 산행을 했다. 탐험을 좋아하니 에베레스트 등정 때 자전거와 카야킹을 가미해 하고 싶다.”
이후 고산 거벽에 도전하여 신루트를 개척하고 남은 미등봉도 오를 생각이다. 그는 이제까지 7000m급 2개, 5000~6000m급 5개를 세계 최초로 올랐다. 한국 산악인이 오른 미등봉의 절반 이상을 그가 오른 셈.
그렇지만 수평여행(탐사)에 주력할 방침이다. 이제부터는 인도 히말라야가 대상이라고 했다.
“사실 돌아야 할 곳은 인도가 가장 많다. 30년간 돌아야 한다. 인도는 물가도 싸고 입산료도 적정하며 미등봉도 많이 남아 있다. 도로가 좋아 접근성도 뛰어나다. 접근이 불편한 파키스탄과 대조적이다. 중국은 입산료가 너무 올라서 가기 어렵다. 네팔이나 파키스탄은 시기에 따라 입산료를 깎아주기도 한다.”
인도 히말라야 탐사가 끝나면 김 대장은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전역을 돌고 또 완벽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첫 인물로 남을 것이다. 그는 기록의 중요성을 트랑고 그레이트 타워를 갈 때 처음으로 인식했다고 했다.
“참고 자료는 모두 해외에 있었다. 한국에도 그런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니는 게 너무 좋지만 그의 행복은 가족의 아픔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신경성 당뇨를 앓고 계신다. 아들 때문이다. 아내도 잘 다녀오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가슴 조리고 있을 게 뻔하다. 히말라야에서 내가 아는 선후배 한국 산악인 35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그 가족들의 아픔을 안다. 내 행복과 가족의 아픔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그러면서 적어도 그곳에서 영면한 사람들을 잊지는 말자며 말을 맺었다. 고미영 김형일 박영석, 오희준, 이현조 등 ….“형일이 형 1주기에 일본인 다니구치 케이가 추모하러 왔다. 우리도 그들의 이름이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창호의 리스크 관리 비법
“준비 철저히 하되 계획은 물 흐르듯 유연해야”
수많은 고산거벽을 올랐으나 김 대장은 이렇다 할 큰 사고를 겪지 않았다. K2 오를 때 셰르파 하나가 실족해 사고를 당한 게 유일한 아픔이다.
그는 철저한 준비와 유연성을 리스크 관리의 첫째로 꼽았다.
“계획은 물 흐르듯 유연해야 한다. 우선 책상에서 엄청난 연구를 한다. 출국하기 전 90% 이상 연구하고 현지에서 또 수시로 계획을 수정한다. 한 가지를 고집하는 게 아니라 그 산에 맞춘 준비를 한다. 산은 바꿀 수 없으니 나를 바꿔야 한다."
그가 얼마나 유연성을 강조하는지는 자신의 경험조차 완전히 믿지 않는데서 잘 나타난다.
“경험이 도움이 되지만 현지에서 판단해야 한다. 세락이 무너져 내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번 갔다고 이번에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위험하면 돌아가야 한다. 어제 괜찮았다가 오늘 위험할 수도 있다. 과거 경험이 모두 맞지는 않다.”
낙석이나 크레바스, 바람 등이 산마다 다르기에 그만큼 유연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 유연성은 사실 누구보다 진지하게 산을 연구하는데서 나온다. 책상에서부터 산과 교감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만큼 산에 다가가기에 그는 대부분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알파인 스타일 등반이나 금기시까지 하는 단독등반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인다.
“알파인 스타일 등반은 빨리 갔다가 오기에 위험에 노출되는 기간이 줄어 오히려 안전하다. 특히 세락 구역은 언제 붕괴될지 모르므로 빨리 지나갔다가 오는 단독등반이 위험에 노출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리스크 관리는 나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산에 맞추는 것이다. 방법은 산에 있다.”
감당키 어려운 위험은 피하라고 한다.
“로체남벽에선 낙석이 엄청나게 떨어지는데 그것은 등반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이 아니다. 작은 돌 하나라도 치명적이다. 그런 감당하지 못할 위험은 안한다. 리스크가 크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어려운 것도 극단적이라면 리스크가 될 수 있다.”
파트너와의 협력 역시 리스크를 줄이는 중요한 요소다.
“바위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빙벽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면 피한다. 힘중에 안치영과 함께 간 것은 그가 혼자 능력으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함께 오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는 특수부대 훈련을 받을 때 강한 고통의 시간을 겪어봤다. 사람들은 힘들면 남 욕을 한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혼자 걸어봤기에 남을 욕하지 않게 됐다. 내가 하려고 왔으니 그게 너무 좋다. 혼자 등반하면 체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게 고민이었는데 갔다 와서 맞장구 쳐가며 얘기할 사람 있는 게 얼마나 좋은가. 혼자 다녀봤기에 둘이 있다는 게 좋은지를 안다. 있는 것 자체가 좋은데 왜 싸우나. 옆 사람이 더 좋은 것 선택하게 하면 되는데….”고행 끝에 득도한 것 같다.
정상의 맛 서본 사람만 안다
그는 “정상에 서는 것은 등반가의 업이다”라고 한다.
“중간에 되돌아온 사람들은 정상에 서는 게 의미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마라톤에선 단 1m만 안가도 인정하지 않는다. 등반도 마찬가지다. 정상에 선 사람들은 극도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거의 살아서 돌아온다. 내려가서 해줄 얘기가 얼마나 많겠나. 그런데 중간에 돌아선 사람들은 오히려 사고 확률이 높다. 거벽 등반은 중간에 가다가 올 거면 아예 가지 않는다. 밀어붙이면 끝까지 간다. 중단하는 것은 버릇이 된다. 다음은 없다. 산은 기다린다고 하지만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다.”
정상의 섰을 때 기분은 “그 산에 가기 위해 얼마나 애절했는가에 비례한다”고 했다.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고 쳐다보고 노력했나, 그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나. 그래서 일단 정상에 오르면 열정은 다 탄 연탄재와 같다. 곧바로 또 다른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 열정 때문일까. 김 대장은 한국 산악인 중에서 등정 확률이 가장 높다. 자의로 간 것은 모두 성공했다. 다른 원정대의 사고를 수습하거나 다른 원정대를 배려하느라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에서 철수한 것 외에는 신루트 아닌 곳에서 돌아선 적도 없다.
단독등반으로도 그는 여러 차례 정상에 섰다. 5000m급은 단독등반이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파미르에 하나(6225m), 카라코람에서 하나(6150m), 힌두쿠시에서 2개봉(6109m, 6105m)을 단독으로 올랐다. 저녁 먹고 출발해 해 뜰 때 등정하고 다음날 저녁에 내려오곤 했다. 그 성과를 제출했다면 황금피켈상은 벌써 받았을 것이다.”
김창호 & 그의 생각
1969년 경북 예천 생. 서울시립대산악회.
-강원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의 산악인들과 함께 원정을 했다. 그들 모두와 친분이 강한 것도 그의 매력이다.
-등반가이자 산악 연구가, 탐험가다. 정에 필요한 자료를 받으려고 근처 여관에 며칠 씩 묵는 산악이이 있을 정도로 그는 엄청난 자료를 갖고 있다. 카라코람 힌두쿠시 중국횡단산맥 티베트 동부 자료를 냈고 네팔 자료도 곧 낼 것이라고 했다.
-다른 금기는 없지만 어머니 꿈에 나타나는 것만은 지킨다. 카라코람서 혼자 돌아다닐 때 어머니 꿈에 자꾸만 바닥으로 들어가는 것을 어머니가 불러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얼음 빙하를 장대 하나 들고 다닐 때였는데 아무래도 이상해 나왔던 게 맞아떨어졌다. 카라코람 마지막 코스였는데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가 있을 것 같아서 나왔다가 나중에 힌두쿠시 쪽으로 들어가 그곳 탐사를 마쳤다.
-한국 산악인 중 최고 체력으로 꼽힌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 2학년까지 핸드볼을 했고 권투도 했다. 체력은 어릴 때부터 길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체력 안되면 정상 안보낸다. 등반은 걷는 데서 시작한다. 잘 올라가는 것보다 잘 내려오는 게 중요하다. 등반 하다 보면 날씨가 나빠질 때쯤 정상에 설 가능성이 높다. 그 상황에 걸리지 않으려면 빨리 내려와야 한다. 김 대장은 대부분 정상에 서면 그날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온다. 그 체력이 돼야 정상에 보낸다.
-탐사 경비는 가족 지원과 잡지 원고료로 충당했다. 산 관련 잡지에 카라코람 탐사기를 연재하며 받은 50만 원 정도의 고료가 수입의 대부분. 그중 30만 원을 외국 자료 구입에 썼다. 차비가 없어 서울에선 대부분 걸어 다녔다. 그때 한강 다리 긴 줄 처음 알았다고.
-원정 못지않게 캐러밴을 즐긴다. 보통 원정대는 일정에 쫓겨 빨리 돌아오나 그는 원정 뒤 주변 탐사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가 신루트를 많이 가는 비결이기도 하다.
-인간은 한계가 있다고 한다. 고산등반은 누구다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타고 나야 한다.나는 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