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반기는 품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느릿하게 걷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십수년 전 TV CF에서 ‘탱크주의’를 이야기하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온화한 얼굴은 여전했다. 가르마 없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나 푸른 선이 체크로 앉은 짙은 회색 싱글이 세련된 디테일을 살려주고 있었다.
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만났다. MIT공학박사 출신으로 대기업 회장, 경영대학원 교수, 장관, 자문위원, 이사장 등의 직함을 두루 거친 그는 2009년 2월부터 미술관 관장이란 명함을 새롭게 얻었다. 그의 행보를 놓고 미술계에서는 파격이라 했고 일부에선 장관까지 지낸 이가 실장급 감투를 썼다며 화제 삼았다.
2년 동안 국내 미술계와 세계 미술계를 잇는 가교 역할에 충실한 그는 할 말이 많았다. 그만큼 그 동안 해온 일이 결실을 맺고 있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산적해 있었다. 듣고 풀어야 할 말들은 많았지만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도 있었다. 최근 불거진 소장품 분실사건이 그랬다. 2년여 전 미술관 수장고에 근대화가 주경의 누드 드로잉 1점이 사라진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후 국립현대미술관은 상부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지시로 특별감사가 진행 중이다. 배 관장이 취임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보도되기 전까지 관장이 이 사건을 보고 받지 못했단 사실에 수장 관리시스템의 허점이 지적되고 있었다. 배 관장은 “현재 감사기간이라 공식적인 코멘트를 내긴 어렵다”며 “충실히 감사를 받은 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미술관 측은 “도난 사건이 아니라 분실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미술계도 세계화가 절실하다
“미술관에 들어서곤 공부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일본을 넘어 중국이 부상하고 있어요. 미술계도 마찬가집니다. 한국의 미술은 세계시장에서 아직 미약하죠. 제 생각에 세계화를 위해선 정체성을 찾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배 관장이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미술계 인사들을 만났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한국의 미술은 어떤 것이냐?”였다.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시아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이 재차 던져지곤 했다.
“아시아에서 중국과 다른 것, 일본과도 다른 것, 그것을 한국의 것이라 했습니다. 처음에는 추상적인 정립이었는데 지난 2년 동안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했어요. 그 첫 결과물로 새로운 미술관을 지으면서 이게 한국적인 미술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건축계가 모두 나섰죠. 그 중 1등을 선정해 현재 건축 중입니다.”
배 관장이 말한 새로운 미술관은 내년 11월 서울 종로구 소격동 옛 국군기무사령부 터에 들어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지상 3층, 지하 3층 건물로 전시장을 비롯해 미디어센터, 퍼포먼스를 위한 극장, 영화관이 들어서는 미술 중심의 복합문화시설이다. 총 3만8200㎥ 규모다. 배 관장은 <Luxmen>과의 인터뷰에서 그 동안 언급을 자제해왔던 서울관의 전시작품을 밝히기도 했다.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세계적인 거장 제임스 터렐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제주도에 ‘스카이스페이스’란 작품을 설치하러 온 터렐과 만났어요. 서울관 얘길 했더니 그 터와 인연이 깊다더군요. 터렐이 18살이던 1961년 CIA 파일럿이었는데 달라이 라마를 따르는 동자승을 피난시키다 중국에서 사고가 났데요. 그래서 후송된 병원이 국군서울병원이었고 210호실에서 8개월 간 입원했다더군요. 기무사 터가 그때 그 병원이었어요. 인연 아닙니까. 서울관 얘길 했더니 작품을 하고 싶다더군요. (자료를 들추며) 얼마 전에 작품의 초안이 이렇게 전달됐습니다. 비용이 꽤 많이 들 것 같아요. 이젠 스폰서를 구하러 다녀야죠(웃음).”
세계적인 작가의 한국화, 배 관장은 “한국미술관의 세계화가 곧 세계 속에 한국 미술이 자리하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서울관의 터가 터인 만큼 챙기고 제출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다. 덕분에(?) 건설사의 공기가 늦춰지기도 했다.
“기업에 있을 땐 타국에 공장을 짓는다면 당연히 이런 저런 편의를 서로 봐주겠다고 했는데 그런 점이 아쉽네요(웃음). 챙기고 갖춰야할 게 많아 꼼꼼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개관하고선 국민 미술관으로 거듭나야겠죠. 전시와 보존, 교육의 임무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겁니다. 이러한 기능에 대해 신용을 회복해야죠. 이젠 미술계에도 장기적인 프로젝트와 비전이 필요합니다.”
배 관장의 말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 꼼꼼히 따져보고 진행해야 할 굵직한 사안이 연이어 진행되고 있다. 우선 서울관 건립과 함께 내년에는 특수법인으로 전환된다. 자율권과 책임 운영을 강화해 유연성을 더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신수장고를 42년 만에 개방하는 것이다. 6700여점의 작품이 보관된 9개의 수장고 중 6개가 리모델링을 마쳤다. 미술 관련 전문가를 중심으로 우선 개방한다는 방침이다. 덕분에 그만큼 관장의 책임과 의무가 늘었다.
“제 임기는 1년 남짓 남았는데 할 일은 쌓여있네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은 제대로 매듭지어야 할 텐데 하고. 세계적인 미술관의 관장은 20여 년 동안 미술관을 지킨다는데, 글쎄요…. 지금은 세계 미술계를 앞서가는 것만 생각하겠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