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단정하지만 스타일리시한 매무새가 도드라졌다. 질문을 건네면 한번 곱씹어 생각한 후 말문을 여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BMW, 메르세데스-벤츠, 인피니티를 거쳐 2019년 현대차그룹에 입사한 카림 하비브 기아 글로벌디자인담당 부사장을 만났다. 기아의 첫 픽업트럭 ‘더 기아 타스만’, 전기차 ‘EV4’, ‘PBV’(목적기반차량) 등의 공개를 앞둔 그는 “어제 독일에서 돌아왔다”며 “많이 바쁘지만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만족스럽다”고 상황을 전했다. 인터뷰는 서울 압구정동에 자리한 ‘Kia360’에서 이뤄졌다. ‘EV3’ 앞에서 포즈를 취한 그를 알아보고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1970년생.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났다. 1979년 이란 혁명이 발발하자 가족들과 프랑스, 그리스를 거쳐 캐나다에 정착했다.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미국 아트센터 칼리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1998년 BMW 디자인팀, 2009년 메르세데스-벤츠 디자이너, 2011년 BMW 외관 부문 수석 디자이너, 2012년 BMW 브랜드디자인 총괄, 2017년 인피니티 디자이너를 거쳐 2019년 기아디자인센터에 부임했다. BMW 5시리즈, 6시리즈 그란쿠페, 7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 F800 스타일 콘셉트, 인피니티 Q 인스피레이션 콘셉트카, 기아 K8, EV3, EV6, EV9 등이 그의 작품이다.
Q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A 부임 초기에는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살았는데, 현재는 독일에서 살고 있습니다. 2~3주에 한 번씩 한국으로 출장오고 있어요.
Q 비행기를 타고 출근하는 셈인가요. 디자이너는 때로 여행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하던데.
A 아, 어려운 질문이네요. 전 모든 곳에서 영감을 얻는 것 같습니다. 굉장히 다양한 장소에 다니길 좋아하는데, 과거엔 건축물을 보고 스케치하곤 했어요. 그래서 참 많은 건축물을 보고 다녔지요. 지금은 다른 분(디자이너)들을 가이드하고 있는데, 좀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브랜드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브랜드가 창의성과 영감을 주도하는 원천이라고 생각하거든요.
Q 기아는 어떤 영감과 원천을 갖고 있는 브랜드인가요.
A 저는 브랜드가 앞으로 되고자 하는 이미지를 생각합니다. 브랜드를 통해 저희가 만드는 제품이 어떤 특징을 갖게 되면 좋을지 생각하죠. 아마도 제 입장에선 좀 더 선이 굵고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게 아닐까 합니다.
Q 2019년 10월에 기아로 적을 옮겼는데, 정확히 5년이 지났습니다. 당시와 지금은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A 어제가 첫 출근처럼 느껴지는데 시간이 참 빠르네요.(웃음) 아무튼, 기아는 굉장히 멋진 브랜드에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참 시의적절한 시기에 입사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 브랜드를 재정의하고 있었고, 로고도 새로 디자인하면서 리론칭을 준비 중이었거든요. 뿐만 아니라 ‘EV3’에서 ‘EV9’까지 굉장히 많은 신기술이 도입됐습니다. 그래서 디자인도 새 브랜드를 대표할 수 있도록 창조하려고 노력했고요. 범위를 지난 20년으로 넓히면 변화되고 발전된 모습을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을 겁니다.
Q 그 시기에 분명 정의선 회장의 특명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A 당시 정의선 회장님께서 ‘플랜S’(전기차 사업 체제로의 전환, PBV, 모빌리티 솔루션 제공)란 전략을 세웠는데, 새로운 시대에 기아가 어떻게 변모해야 할지에 관한 계획이었어요. 이 계획에 맞춰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했고, 제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우연치 않게 운이 좋았다고 할까요.
Q 5년간 자신의 색깔이 담긴 첫 차를 꼽는다면.
A ‘EV9’이 아닐까 싶네요. 입사 후 바로 시작한 차였어요. 기아의 디자인 철학인 ‘오퍼짓 유나이티드’(상반된 개념의 창의적 융합)가 가장 잘 접목된 차량입니다.
Q 기아 디자인의 중심에 EV9이 있다는 의미인가요.
A 중심 디자인이라기엔 무리가 있어요. 처음 개발할 때 구체적인 사항을 정한 건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라인이나 그래픽을 이렇게 구현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전 디자인이 가져야 할 단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EV9은 새로운 기아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EV3가 많이 닮아서 패밀리 디자인이란 말도 있는데, 너무 다르게 디자인하면 오히려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봤어요. 디자인의 일관성을 보여줌으로써 기아의 캐릭터를 살리고 소비자들이 도로에서 기아차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게 첫 번째 의도였습니다. 두 번째는 ‘카니발’이나 ‘쏘렌토’ 부분 변경 모델의 라이트 시그니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과하게 반복되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좀 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Q 다른 방향의 디자인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말인가요.
A 맞습니다. ‘EV4 콘셉트’와 ‘EV4’를 통해 곧 볼 수 있을텐데, 다른 방향의 디자인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다른 발전이죠.
Q 오퍼짓 유나이티드는 유지되는 것이겠지요.
A 네. 때로 일상생활에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합쳐져 놀라운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오퍼짓 유나이티드의 원칙이에요. 결과에 따라 무수한 개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원칙은 세우되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 많은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Q 사실 이 디자인 철학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은데요. 좀 더 쉽게 설명해주신다면.
A 아, 그럴 수 있어야 할 텐데.(웃음) 전 20년간 독일에서 일하다 7년 전 일본(인피니티)을 거쳐 5년 전 한국에 왔습니다. 일반화하고 싶진 않은데, 서양에선 사물을 흑백논리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특히 독일은 모 아니면 도라는 인식이 강하죠.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왔을 때 아시아 문화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사물에 대한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할 수 있고,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와 우리가 있는 빌딩의 구조는 전혀 다르지만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아시아에선 이처럼 대비가 주는 편안함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 같더군요. 이러한 경향을 디자인과 예술, 자동차에 접목하고 있습니다.
Q 이해가 쉽지 않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A 아, 다시 말하자면 음과 양의 조화라고 할까요. EV9의 차 문은 표면이 굉장히 매끈한데요. 중간에 갑자기 구부러지면서 휠 아치로 이어집니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낮은 것과 높은 것, 서로 상반된 개념이 어우러지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Q 기아가 달라졌다는 건 전 세계에서의 성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세계 각국 소비자들의 취향과 특징이 제각각인데, 어떤 점에 집중해 디자인하는 겁니까.
A 분명 그렇습니다. 다르죠. 저희가 디자인을 리론칭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건 새로운 고객이었어요. 새로운 것, 혁신적인 것, 특히 신기술에 대해 목말라하고 수용할 준비가 된 분들이 주 타깃이었습니다. 이런 얼리어답터는 사는 곳이 달라도 공통점이 많은데요. 남과 다른 차별화를 추구하고 리스크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습니다. 특히 새로운 기술의 시도를 좋아하죠. 초기 전기차 고객들의 성향이 그러한데, 그래서 일관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유연함을 보여주는 디자인이 중요했습니다.
Q 한국 소비자의 특징이라면.
A 이것도 어려운 질문인데…. 한국은 소비자층이 다양합니다. 근거는 없지만 개인적으론 한국 소비자들이 좀 더 영(Young)하고 프레시한, 혁신적인 느낌을 받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Q 그런데 사실 EV9은 호불호가 강했습니다.
A 물론 저희 디자인이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길 원하고 많이 팔리길 바랍니다. 전 세계 어디서든 저희의 자동차를 봤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박물관에 전시하거나 디자인상을 받기 위해 디자인하는 건 아니거든요. 사람들이 직접 운전을 하고 그 차와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디자인합니다. 그런데 창의적인 품질이란 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더군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첫 구절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계속 그 노래를 듣다 보면 다양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바로 그런 점이 좋은 디자인이겠지요. 사실 EV9은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를 모두 수상한 현대차그룹의 첫 모델이에요. 왜 아직 호불호가 갈리는지 모르겠는데, 많은 분들이 진가를 알아보길 기다리고 있습니다.(웃음)
Q 내년 상반기에 출시될 첫 픽업트럽 ‘더 기아 타스만’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는데요.
A 타스만을 디자인할 때 의도한 건 ‘눈에 띄는 자동차’였어요. 아시다시피 픽업트럭 시장은 경쟁자도 많고 로열티가 굉장히 강하거든요. 후발주자로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새로움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저도 시장 반응이 궁금합니다.
Q 자동차는 이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디자인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인데.
A 내년에 출시될 저희 PBV 차량을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사용성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 사용성은 좀 더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분야예요. 사용성이 높을수록 다양한 아이템을 디자인할 수 있거든요.
Q 한국에선 어떤 차를 타십니까.
A 지금은 고맙게도 기사가 있는 차량이 나왔어요. 직접 운전하고 다니진 않습니다. 처음 입사했을 땐 ‘모하비’를 몰았습니다. 저보다 아내가 정말 좋아한 차에요. 다시 유럽으로 이사를 갔을 때 아내가 모하비를 다시 사면 안 되냐고 말할 정도였어요. 지금은 EV9을 운행하는데, 이 차도 꽤 좋아하고 있습니다.
Q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의 워너비카도 궁금한데요.
A 전 1960~1970년대 이탈리아 클래식카를 좋아합니다. 너무 비싸긴 하지만 ‘마세라티’나 ‘페라리’처럼 그란투리스모 콘셉트의 오래된 차량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드라이빙을 떠올리면 이런 멋진 차를 타고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긴 도로를 여행하는 상상을 하곤 하죠.
Q 어려운 환경을 딛고 성공한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디자이너가 안 됐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을까요.
A 네. 어린 시절은 그랬지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건축가가 됐을 것 같아요. 그 꿈을 가졌던 적도 있거든요.
Q 궁극적으로 디자인하고 싶은 차는.
A 전 지금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25년 전에 처음 디자인을 했는데, 그에 비하면 디자인 분야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어요. 처음 BMW에서 일을 시작했을 땐 ‘럭셔리’ ‘프리미엄’ ‘스피드’가 키워드였지요. 기아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요즘은 ‘편안함’ ‘유틸리티’ ‘사용자 경험’ ‘커뮤니티’에 중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 이러한 변화가 정말 만족스러워요. 지난 CES에서 PBV 콘셉트 차량을 선보인 후 제 딸들에게도 보여줬는데 너무 좋아하더군요. 커뮤니티와 사용성, 차 안에서 캠핑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인지 제가 좋아하는 올드카보다 훨씬 쿨하다고.(웃음) 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좋습니다.
Q 기아 디자인의 지속적인 변화를 말씀하셨는데, 소비자 입장에선 어떤 방향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A 조금 힌트를 드리자면 저희는 EV나 SUV, PBV 등 여러 차량을 디자인했습니다. 그런데 기아에는 ‘스팅어’라는 모델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량이 주는 운전의 즐거움, 그란투리스모적인 감성과 경험은 그간 비교적 덜 집중한 부분인데요. 다음번엔 이런 부분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려고 합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인터뷰를 안하는 걸로 유명한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A 아니요. 전혀 의도한 건 아니에요. 인터뷰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런 것도 있고. 어릴 때는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0호 (2024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