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재건축’으로 불리는 가로주택정비사업 후끈 장위·영등포·중랑·면목… 서울만 100여 곳
정지성 기자
입력 : 2020.03.03 14:12:26
수정 : 2020.03.03 14:12:49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2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지하철 5호선 영등포시장역 3번 출구를 나와 6분 정도 걷자 좁은 도로를 끼고 양옆으로 소규모 점포 20여 곳이 보였다. 점포 뒤편으로 지은 지 수십 년은 지난 것 같은 노후 주택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원래 영등포뉴타운 예정지였지만 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하자 최근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가로주택정비사업’으로 전환했다. 이 사업은 동부건설이 시공을 맡았다. 오는 2023년이 되면 슬럼가에 가까운 이곳은 지하 4층~지상 29층, 2개 동, 156가구 규모의 깔끔한 소규모 새 아파트 단지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최근 ‘미니 재건축’으로 불리는 가로주택정비사업이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는 대규모 철거를 둘러싼 갈등, 주변 집값 자극 등을 우려해 기존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잇달아 제동을 걸고 있지만, 가로주택정비사업에는 비교적 관대한 자세로 사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각종 규제로 정비사업 먹거리가 부족해진 건설사들의 수주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가로주택정비사업 추진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장위뉴타운 전경
▶가로주택정비사업이란
가로주택정비사업은 대규모 철거 없이 노후 저층 주거지(노후 단독주택과 빌라 등)를 허물고 다시 새집을 짓는 사업으로 ‘미니 재건축’이란 애칭으로도 불린다. 대규모 재건축 과정에서 원주민이 쫓겨나는 등 지역공동체가 무너지고 갈등이 격화됨에 따라 대안 성격으로 2012년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가로주택정비는 사면이 너비 6m 이상 도로와 인접한 구역을 정비하는 ‘블록형 개발’이다. 단독·공동주택 20세대 이상이 거주하면서 지은 지 30년이 넘은 노후주택이 3분의 2 이상이고 토지·주택 소유자 80% 이상이 동의했을 때 개발이 가능하다. 재개발과 재건축은 완공까지 보통 10년이 소요되지만 가로주택정비사업은 사업기간이 2~3년으로 짧다는 장점이 있다.
가로주택정비사업은 재건축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지난 2018년부터 부활한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도 피할 수 있다. 어지간해선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도 적용받지 않는다. 다만 이를 위해선 전체 가구수의 10%를 공공 임대주택으로 채워야 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기업이 공동시행자로 참여하는 등의 전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서울만 약 100여 곳
대세된 가로주택사업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조합 설립 기준으로 현재 전국 111개, 서울에서만 48개 가로주택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서울의 경우, 사업 추진을 위해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곳까지 합하면 98개로, 2018년(45개)에 비해 두 배로 늘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서울은 집값이 비싸 사업 규모가 작아도 일반 분양을 통해 어느 정도 이익을 낼 수 있다”며 “대규모 재개발·재건축을 하기 힘든 상황에서 정부 지원을 잘 활용하면 가로주택도 충분히 괜찮은 사업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2가 439번지 일대는 지난해 말 시공사 선정을 위한 총회를 열고 동부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했다. 이곳은 이 일대 노후주택 밀집가를 지하 4층~지상 29층, 2개 동, 156가구의 아파트와 근린생활시설로 짓는 사업이다.
인천 숭의동 289의1 일대 가로주택정비사업도 비슷한 시기에 시공사를 선정했다. 신일과 동우개발이 맞대결을 벌인 결과 신일이 사업을 수주했다. 이 사업은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289의1 외 74 필지의 7936㎡ 부지에 지하 2층∼지상 16층으로 아파트 203가구와 근린 생활시설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서울 성북구 장위뉴타운 중 정비구역에서 해제된 장위8·9·11·12·13·15구역 일부 사업장을 중심으로 최근 가로주택정비사업 추진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앞서 장위 11-2 구역은 지난해 12월 현대건설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장위 11-2구역은 6685㎡의 소규모 사업지로, 현대건설은 이곳에 공동주택 167가구 등을 지을 계획이다. 사업비는 350억원 수준이다.
장위 8-1·8-2·11-1·11-6 등 주변 소규모 사업지에서도 최근 추진위원회가 사무실을 차리거나 현수막을 내걸고 가로주택정비사업 조합 설립을 위한 주민동의서를 받고 있다.
GS건설의 자회사 자이S&D는 최근 대구 수성구 수성동1가 가로주택정비사업조합과 482억원 규모 공사계약을 체결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4월에도 서울 서초구 낙원·청광연립 가로주택정비사업을 수주한 바 있다. 대림산업도 자회사인 고려개발과 삼호를 통해 관련 사업에 나서고 있다.
이처럼 대형사들이 최근 잇따라 가로주택정비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은 그만큼 먹거리 확보가 힘들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최근 주택사업이 침체되다보니 리모델링이나 가로주택정비사업에도 치열한 경쟁이 붙는다”라며 “과거엔 중소 건설사만 참여하는 사업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 대형사의 활발한 참여로 주민들의 호응도도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다른 건설사 관계자는 “재개발·재건축 추진이 쉽지 않으니 건설사들도 가로주택정비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면서 “입지가 좋거나 규모가 큰 곳에는 대형사도 참여를 검토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재건축 대신 가로주택 미는
정부와 서울시
정부와 서울시는 부작용이 많은 대형 정비사업 대신 가로주택정비사업을 활성화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12·16 대책에 포함된 추가 규제 완화 조치가 시행되면 가로주택정비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현행 서울시 조례에서는 건축물이 마주 보는 중정형 건축의 경우 두 건축물 간의 거리(인동 간격)를 건축물 높이의 0.8배로 규정하고 있으나 이를 건축법의 하한선인 0.5배까지 낮추기로 했다. 사업구역 안에서 조금 더 촘촘하게 건물을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한국토지주택공사(LH)·서울주택도시공사(SH) 등의 공기업이 공동시행자로 사업에 참여하고 ▲시세보다 저렴한 공공임대주택(10%)을 공급하며 ▲조합원이 적정 추가분담금(환급금)을 보장받은 뒤 공공이 일반 분양 가격을 결정하는 등의 공공성 요건을 충족하면 혜택은 파격적으로 늘어난다.
우선 사업시행 면적이 현행 1만 ㎡에서 2만 ㎡로 2배 늘어나고 분양가상한제 적용도 면제된다. 전체 공급물량 중 공공임대주택 분(10%)에 공공지원민간임대주택 10%까지 배정하면 현행 7층인 층수 제한을 15층으로 대폭 올려줄 계획이다.
다음 달 가로주택정비사업 활성화를 포함한 공급대책을 발표할 계획인 서울시는 인동 간격과 주차장 의무 설치 기준을 더 낮추는 방안을 국토교통부와 협의 중이다. 가로정비 구역의 소규모 타운하우스의 경우 인동 간격을 건축물의 0.5배 미만으로 낮추고 원룸형 주택의 경우 가구당 0.6대로 돼 있는 주차장 설치 기준(30㎡ 미만은 0.5대)도 더 완화하자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역세권 주택은 접근성이 좋으니 주차장 기준을 완화해도 된다고 본다”며 “가로주택정비사업은 사업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활성화가 되면 집이 필요한 서민들에게 공급 측면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등 공기업이 공동시행자로 참여해 사업을 빠르게 진척시키는 사례도 늘고있다. LH는 지난해 말 ‘제1호 LH참여형 가로주택정비사업’인 인천석정지구의 착공식을 개최했다.
이 지역은 2004년부터 정비사업을 추진했지만 부담금을 둘러싼 주민 간 이견으로 사업이 수차례 무산됐다. 하지만 LH가 참여하면서 사업이 재개됐고 2017년 조합설립인가를 받았다. LH는 현재 15개 가로주택정비사업장에 참여하고 있다. SH공사도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역삼동 목화연립과 협약을 맺고 공동사업을 진행 중이다.
서울 가로주택사업 1호로 2017년 12월 준공된 강동구 천호동 다성이즈빌 전경
▶사업 전제조건 많아 ‘빈수레’ 우려도
사업의 전제조건이 너무 많고 까다로워 붐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정부가 도심주택 공급 확대 방안의 일환으로 가로주택정비 사업을 활성화하기로 했지만 사업성을 고려하지 않아 ‘속 빈 강정’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적용까지 제외하는 등 규제를 대폭 완화하기로 했는데 공공성 요건에 대한 전제조건으로 인해 현장에선 사업 활성화 동력이 되기 어렵다는 평가다.
경기도 부천시의 한 노후주택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로주택 사업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곳은 일부 지역은 시범단지로 지정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하고, 일부 지역은 조합이 자체 추진 중이다. 조합이 진행하는 지역은 기존 저층 노후 주택단지를 15층 아파트로 재건축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사업비용 문제로 사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일부 조합원은 비용 부담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한 조합원은 “정비 대행 업체에서 3.3㎡당 건축비를 600만원으로 책정해 서민을 울리고 있다”며 건축비가 높다고 호소했다.
지역 부동산업계는 해당 사업장과 관련 사업성이 낮아 조합 부담이 큰 상황이라고 평가한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일반 분양 물량이 발생하지만 소규모 주택밀집지역이어서 분양가가 높지 않다”며 “사업성이 낮아 진행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정부가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지만, 현장에선 탁상행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규제 완화의 전제조건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다. 공공성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이에 맞추다 보면 이전보다 사업성이 별반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정부가 내놓은 가로주택정비사업 규제 완화 방안을 보면 공적 임대주택 20%를 충족해야 분양가상한제 적용을 피할 수 있다. 가로주택정비사업을 담당하는 한 건설사 관계자는 “공공주택 물량을 제외하고 신규 분양 물량을 산출해 조합 부담금을 산정하는데 서울 초역세권을 제외하면 조합 부담금이 많아 실효성이 없다”고 언급했다.
또 다른 정비사업 관계자 역시 “가로주택정비 단지는 인근 아파트와 비교해 분양 가격이 60~ 70% 수준에 형성된다”며 “분양가상한제를 적용받지 않아도 가격이 규제 수준 이하에서 형성되는 만큼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업이 일반 재개발, 재건축처럼 활성화되긴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동구 일대 주택가 전경
가로주택정비사업의 연면적 확대와 관련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도계위) 심의를 의무화한 것도 걸림돌이라는 지적이다. 정부는 사업시행구역을 최대 2만 ㎡까지 확대해주는 대신 난개발을 막기 위해 도계위 심의 조건을 내걸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 “2만 ㎡의 사업장이라면 대략 400가구가량이 입주하게 되는데 도계위에서 신규 도로 확충 등 각종 인프라 계획안을 내놓으라고 주문할 게 예상된다”며 “결국 비용증가로 인해 사업 면적을 다시 줄이거나 새 방안을 모색하는 등 현장의 어려움이 생길 것으로 예상한다”고 지적했다.
절차적 문제로 인해 가로주택정비사업이 재건축·재개발의 대체재가 되긴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대규모 재건축·재개발에 비해 사업 수익이 크지 않고, 규제 완화 효과를 누리려면 ‘공공성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만큼 개발 이익에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공기업인 LH와 공동으로 시행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행정 절차가 늘어날 수 있고 분양가 산정 등의 절차에서도 조합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가로주택정비사업이 주택 공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가로주택정비사업 활성화만으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서울 등 수도권 일대 주택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며 “공공성 요건을 만족시켜 사업면적을 넓히고 층수제한을 완화해 15층까지 세울 수 있는 사업장은 서울에서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비업계 전문가들은 또 가로주택사업이 보다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도서관·체육시설 등 커뮤니티시설 확대를 위한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추구하는 수요자 중심의 도시재생을 위해서는 가로주택의 커뮤니티시설 활성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커뮤니티 시설을 전체 용적률 및 층수 산정에서 빼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