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안전진단 강화 후 1년 여간 잠잠했던 서울 재건축 시장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안전진단 기준이 강화된 후 첫 번째로 정밀안전진단을 통과한 단지(방배동 방배삼호)가 나온 것은 물론 안전진단을 새롭게 신청하거나(올림픽선수촌아파트) 안전진단을 위한 모금을 준비하는 단지들(성산시영·목동신시가지 아파트)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긴 겨울잠에 빠졌던 서울 재건축에 봄이 찾아올 조짐이다.
▶방배삼호 안전진단 강화 후 첫 통과… ‘청신호’ 켜져
연이은 규제 강화로 찬바람만 불던 서울 재건축 시장에 청신호가 켜졌다. 지난해 8월 정밀안전진단에서 ‘조건부 재건축(D등급)’ 판정을 받았던 방배삼호아파트가 최근 적정성 검토 절차까지 통과하면서 재건축 추진 일정의 첫 단추를 끼운 것. 안전진단을 신청하거나 준비하는 단지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방배삼호가 안전진단 절차를 완전히 마무리하면서 다른 단지들도 사업 추진에 자극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방배삼호아파트 재건축 안전진단 적정성 검토를 맡은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지난달 28일 방배삼호 재건축 정비사업위원회(주민모임) 측에 검토 절차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재건축 안전진단이란 재건축 사업의 첫 단계로 단지의 노후도·구조적 안전성 등을 따져 재건축이 필요한지를 판가름하는 절차다. 안전진단을 통과해야 정비계획 수립, 조합 설립 등 본격적인 재건축 사업 절차를 시작할 수 있다.
방배삼호는 안전진단 기준 강화 후 정밀안전진단을 통과한 첫 번째 서울 재건축 단지다. 통상 재건축을 원하는 단지가 안전진단을 받을 경우 100점 만점에 55점(A~C등급)을 넘으면 재건축을 할 수 없고 유지·보수만 가능하다. 30~55점(D등급)이면 조건부 재건축, 30점 미만(E등급)이면 재건축 판정을 받는다.
국토부는 지난해 3월 안전진단 평가항목에서 구조안전성 비중을 50%로 높이고 조건부 재건축 판정(D등급)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등 공공기관에서 적정성 검토를 반드시 받도록 하는 등 기준을 강화했다. 기존에는 재건축 가능 연한(30년)만 넘기면 재건축을 추진하기 비교적 수월했는데 이를 까다롭게 만든 것이다.
안전진단은 재건축 사업의 첫 단계로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사업 추진 자체가 불가능하다. 건설업계는 안전진단 강화조치를 ‘재건축 씨를 말린다’며 반발해왔지만 방배삼호는 이번에 이 재검증 절차까지 통과해 재건축 추진이 최종 확정된 것이다.
▶갈 길 멀지만… 강남 재건축 단지들 자극 받아
1976년 준공된 방배삼호아파트는 1·2차 10개동과 3차 1개동, 상가 3개동을 합친 통합 재건축을 추진 중이다. 기존 804가구, 상가 130여 실 규모 총 11개동을 1000가구 이상 대단지로 재건축한다는 계획이다.
재건축 절차의 첫 단계를 무사히 완수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다. 우선 재건축 추진 방식에 대한 주민 간 이견을 정리해야 한다. 이 아파트는 당초 ‘신탁방식 재건축’을 추진하기로 하고 한국토지신탁과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신탁방식 재건축은 신탁사가 주민들을 대행해 사업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따로 추진위원회와 조합을 설립할 필요가 없어 사업 추진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최근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 신탁방식 재건축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사업 방식이 변경될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김종인 방배삼호 재건축 정비사업위원장은 “신탁방식 사업 진행 속도가 예상보다 느려 사업 방식을 조합설립으로 다시 바꾸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며 “안전진단 통과 후 1개월 이내에 주민 동의를 받는 작업을 마치지 못하면 다른 방식을 검토하겠다는 공문을 한토신 측에 발송한 상태”라고 밝혔다.
한토신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방배삼호의 경우 중소형부터 대형까지 평형이 워낙 다양해 주민 의견을 규합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며 “최대한 주민 동의 작업을 서둘러 올해 안에 사업시행자 지정을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주민들과 협의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방배삼호 재건축이 안전진단을 최종 통과하면서 그간 안전진단 신청을 미뤄온 다른 강남 재건축 단지들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3월 규정이 강화되면서 개포4차 현대아파트, 개포5차 우성아파트 등 대부분의 강남 재건축 단지들은 안전진단 신청을 대거 연기하거나 용역 계약을 취소한 바 있다.
백준 J&K도시정비 대표는 “방배삼호의 경우 지은 지 40여 년이 지난 아파트인 만큼 정밀안전진단을 통과했다고 해서 정부나 서울시의 재건축 규제 분위기가 다시 완화됐다고 보긴 어렵다”며 “그래도 통과한 단지가 나온 만큼 주변에 다른 재건축 단지들도 어느 정도 자극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림픽선수촌, 잠자던 재건축 시장을 깨우다
안전진단에 새롭게 도전하는 용기있는 단지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바로 서울 재건축 ‘블루칩’으로 꼽히는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선수촌 아파트가 지난 1월 말 재건축 절차의 첫 관문인 정밀안전진단을 신청한 것.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는 지상 6~24층 122개동 5540가구 규모 초대형 단지로 강남 재건축의 대표적인 ‘잠룡’으로 꼽힌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져 올해로 준공 30년째를 맞았다.
이 단지는 주민들 사이에서 좁은 주차장과 노후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2016년 말부터 재건축이 추진됐다. 새 정부 들어 재건축 규제가 강화되면서 분위기가 꺾이는 듯했으나 최근 광역교통계획 등이 발표되면서 재건축 동력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분위기다.
올림픽선수촌아파트 재건축은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모임인 ‘올재모’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현재 1365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젊은 주민들이 봉사 개념으로 진행 업무를 맡고 있다. 올재모는 지난해 9월부터 입주 가구를 대상으로 모금을 시작해 총 3억원의 진단비용을 모금하는 데 성공했다.
주민들은 올림픽선수촌 아파트의 일부 저층 부분이 안전성에 취약한 프리캐스트콘크리트(PC) 공법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안전진단 통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PC공법은 미리 공장에서 생산한 기둥과 벽, 슬래브 등을 현장에서 조립해 짓는 건축 방식이다. 건축현장에서 직접 철근을 박고 콘크리트를 타설해 짓는 철근콘크리트(RC) 방식에 비해 일반적으로 내구성·안전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단지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는 “주민들은 PC공법에 대해 이해한 뒤로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며 “아무리 정부 규제가 강화됐다고 해도 주민들의 안전 문제도 있으니 계속 재건축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파구청 관계자는 “안전진단 강화 후 처음으로 신청한 단지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관심도 뜨거운 상황”이라며 “용역 결과에 대한 검토를 거쳐 재건축 추진 가능 여부가 발표되기까지는 6개월가량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성산시영·목동신시가지 진단비용 모금 시동
안전진단을 물밑에서 준비하는 단지들도 늘어나고 있다. 서울시 마포구 성산시영아파트 재건축예비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이달 30일 마포구청에서 정밀안전진단 모금을 위한 총회를 실시한다. 추진위는 지난달 말 단지 내 사무소를 개설하고 이달 초부터 진단비용 모금을 시작하는 등 보폭을 넓히는 중이다.
1986년 준공된 이 단지는 지난해 초 안전진단 기준 강화 시행 전에 정밀안전진단을 받기 위해 마포구에 예치금까지 납부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가 안전진단을 강화하면서 용역을 맡은 시설안전공단이 정부 규제를 이유로 계약을 유보하며 결국 무산됐다.
성산시영 재건축 추진위 관계자는 “지난해 아쉽게 미뤄진 만큼 이번엔 꼭 안전진단을 받겠다는 주민들의 의지가 강하다”며 “최근 마포구청장을 면담해 재건축 필요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추진위는 단지 규모를 고려해 안전진단을 위한 용역비용(예치금)을 2억원 규모로 예상하고 있다. 모금이 완료되는 대로 이르면 상반기에 안전진단 신청까지 완료하는 것이 목표다. 추진위는 앞서 지난달 정밀안전진단을 신청한 올림픽선수촌아파트 주민 모임인 ‘올재모(올림픽선수촌아파트재건축모임)’ 측에 적극적으로 자문을 구하고 있다.
14개 단지 2만5000여 가구에 달하는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들도 안전진단 신청을 위한 모금에 나섰다. 신시가지아파트 5단지는 지난 2일 재건축 추진을 위한 안전진단 기금 조성 설명회를 열었다. 안전진단 기금 조성에 관한 행사를 공식적으로 연 것은 1~14단지 중 5단지가 처음이다.
5단지의 한 주민은 “신시가지 재건축은 지구단위 계획에 따라 안전진단을 신청해도 통과는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있었다”면서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민들의 의지가 강해 어렵게 첫 발을 뗀 것”이라고 설명했다.
9단지 역시 ‘재건축준비위원회’라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대화방을 새롭게 꾸리고 정밀안전진단 신청을 준비 중이다. 9단지 한 주민은 “현재 9단지 주민 약 200여 명이 대화방에 참여 중”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6·11·14단지도 최근 주민 대화방을 개설하고 재건축 사업에 관한 의견 교류를 활발히 나누고 있다.
총 2만5000여 가구에 달하는 대단지인 신시가지아파트는 지난해 양천구청에서 수립한 '목동지구 택지개발사업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통합 개발된다. 하지만 서울시 검토와 도시·건축공동위원회 심의, 교통영향평가 등 까다로운 절차가 많이 남아있어 지구단위계획안이 확정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예정이다.
정비업계 한 관계자는 “21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어 재건축 단지들의 단체 행동이 더 많아질 것”이라며 “다만 신시가지아파트는 재건축 정밀안전진단과 지구단위계획안 등 이슈가 많아 개발이 완료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방배 삼호아파트
▶“수익성보단 삶의 질 중요” 주민 공감대가 추진 원동력
최근 집값 하락세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재건축 단지들이 움직이는 것은 결국 재건축이 이뤄져야 삶의 질 향상과 장기적 가치 상승이 가능하다는 공감대가 주민들 사이에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성산시영 추진위에 따르면 이 아파트 차량등록대수는 3700여 대로 주차 허용대수 1233대의 300%가 넘는다.
이중 삼중 주차로 ‘만성 주차난’을 겪고 있고, 이로 인해 단지 안쪽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차가 진입하기도 어려워 화재 대응력도 떨어진다.
성산시영아파트의 한 주민은 “우리 아파트는 주차장이 부족해 이중 삼중 주차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시황에 따른 시세 차익을 따지기에 앞서 편리하고 안전한 삶을 위해서라도 재건축을 하루빨리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 들어 아파트 공시가격이 크게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 것도 재건축 단지들이 속도를 낼 수 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다. 아직 추진위원회를 설립하지 않은 재건축 단지의 경우 공시가격이 급등하는 올해가 재건축 부담금 규모를 대폭 줄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재건축 초과이익환수금은 준공 시점 새 아파트 가격에서 추진위 승인 당시 공시가격 및 개발비용, 정상 주택가격 상승분 등을 뺀 금액(초과이익)이 조합원 1인당 평균 3000만원을 초과할 경우 최고 50%의 부담금을 부과하는 제도다. 재건축 사업 개시시점인 추진위 승인 당시 공시가격이 높을수록 부담금 규모가 줄어들고, 반대로 종료시점인 준공 시 공시가격이 높아질수록 부담금 규모는 증가한다.
실제로 개포주공5단지와 6·7단지는 당초 지난해 상반기께 추진위를 설립해 재건축 사업을 진행하려 했으나 일정을 올해로 연기했다. 당시 강남권 재건축 사업장의 초과이익 부담금이 수억원대에 달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던 상황에서 실제로 같은 강남권 재건축 단지인 반포현대가 1인당 1억3000만원에 달하는 부담금 예정액을 통보받자 올해 추진하자는 쪽으로 여론이 급변한 것이다.
정비업계 전문가는 “올 들어 집값은 하락세로 돌아선 반면 공시가는 대폭 상승하면서 재건축 사업을 보다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며 “앞으로도 정밀안전진단을 신청하거나 추진위를 구성하는 재건축 사업장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