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년여 동안의 가상화폐 시장을 표현하는 데 이만한 문장이 없다. 대표적인 가상화폐 비트코인은 지난해 1월 1비트코인의 가치가 최고 2598만원(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 기준)까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며 온갖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2019년 3월 현재는 같은 거래소에서 446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1년 만에 80% 이상 폭락한 수치다.
가상화폐의 급부상과 함께 덩달아 떠올랐던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그렇게 수그러드는 모양새다. 하지만 여전히 블록체인 철학에 많은 이들이 걸었던 희망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금융사나 중앙 정부의 개입 없이 개인 간 신뢰를 바탕으로 안전하게 금융거래를 할 수 있다는 ‘탈중앙화’ 개념, 또 여기에 참여하는 개인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코인(토큰) 이코노미’ 시스템.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방식을 두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블록체인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2019년 업계는 증권형 토큰 발행(STO)에 많은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카카오·라인 등 정보통신기술(ICT)을 주도하는 대형사들이 선보일 블록체인 플랫폼이 블록체인 시장에 다시 불을 지필 수 있을지도 관심을 모은다. 기대가 큰 만큼 우려와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과도한 기대는 곧 거품처럼 꺼지게 된다는 것을 1년 만의 ‘80% 가격 폭락’으로 경험한 블록체인 시장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 현안을 짚어본다.
▶ICO 대안으로 떠오른 STO
STO란 코인으로 자산을 증권화해서 사고 팔 수 있게 하는 개념이다. 단순화해 예를 들면 수백억원대 부동산이나 값비싼 미술품, 채권 따위를 여러 명이 코인으로 투자하고, 소유권과 투자내역은 블록체인으로 보장받는 식이다. 실제로 지난해 11월엔 뉴욕 중심지 맨해튼의 고급 빌딩이 STO를 통해 판매된 세계 최초의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다.
STO는 지난해 각종 사기의 온상이 됐던 가상화폐 공개(ICO)의 대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ICO는 투자자로부터 비트코인·이더리움을 받고 새로운 코인을 발행해 교환하는 자금 조달 방식이다. 기업공개(IPO)와 큰 틀에선 유사하지만, IPO는 투자를 할 경우 소유 지분에 따라 주주로서의 권한을 갖게 되고 정부에 의해 강력한 규제를 받는 반면 ICO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ICO 투자자는 해당 코인에 관한 백서를 보고 투자를 결정하게 되는데, 제대로 된 감독이 이뤄지지 않는 영역이다보니 허황된 정보로 백서를 써서 자금을 모은 뒤 ‘먹튀’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국내엔 ICO 관련 법규 자체가 없어 투자자 피해를 구제할 방법조차 불법의 온상으로 전락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여전히 ICO는 물론 가상화폐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 동안 ICO 실태조사 결과 “형법상 사기죄 등 법 위반 소지가 있는 사례가 발견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금감원 측은 “ICO 관련 회사개황, 재무재표, 사업내용 등 중요한 투자판단 정보가 공개돼있지 않고, 개발진 현황과 프로필도 기재되지 않거나 허위 기재했을 우려가 있었다”며 “특히 수백억원에 달하는 ICO 모집자금의 사용 내역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STO는 ICO와 달리 실물 자산 담보와 연결돼있다는 점에서 사기 위험에 노출돼있던 투자자들에게 보다 안정성을 줄 수 있다는 게 업계 일각의 주장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상화폐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ICO마저 금지한 우리 정부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지는 미지수다. 국내에서의 자본시장법 적용 여부, 금융위의 인가 가능 여부도 아직 불분명하다.
▶개미투자자 섣불리 뛰어들어선 안돼…
미국 따라 한국도 규제 만들어질까
그럼에도 미국 자산 시장에서 STO의 실제 활용 사례가 등장하자 업계의 기대는 커지고 있다. 국내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인 빗썸은 미국 블록체인 핀테크 기업인 시리즈원과 협력해 올해 상반기 중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대체거래소(ATS) 라이선스를 취득해 미국에 STO 거래소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 2월 27일 서울 강남 한 호텔에서 시리즈원이 개최한 ‘디지털 시큐리티 VIP 밋업’ 행사에는 미국에서 증권형 토큰을 발행 중인 미국 기업 헬레나오일앤가스(Helena Oil & Gas)는 물론이고 아시아계투자사, 벤처캐피탈 등이 참석해 미국 STO 시장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시리즈원코리아 관계자는 “STO는 가상화폐 사업이 아니라 미국 정부에서 받은 라이선스를 가지고 하는 전자증권을 통한 자금조달 사업”이라며 “사기 등으로 논란이 됐던 ICO가 급격히 성장하며 부작용을 드러냈던 것과 달리 천천히 금융업에 스며들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STO 시장을 ‘가상화폐 광풍’을 바라보듯 투자 시장으로만 접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한 블록체인 업체의 대표는 “STO는 투자 자산을 충분히 검토할 능력이 있는 기관 등 대형 투자가를 위한 시장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STO는 단순히 쉬운 돈벌이가 아니라, 기존의 복잡한 종이 계약서의 단점을 보완하고, 해외의 좋은 투자상품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주는 등 기존 증권 시스템을 개선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코인원리서치센터도 ‘자산 유동화를 위한 STO는 핵심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토큰의 증권화가 의미 있는 혁신이 되기 위해선 자산 유동화가 아닌 발행 수수료 감소, 국경의 극복, 투명성 제고 등 블록체인의 근본적 장점을 활용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트렌드에 대해 윤종수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최근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실이 주최한 ‘블록체인 시대의 ICT 혁신 정책’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해 “미국의 경우 SEC에서 STO에 대해 계속 가이드라인을 언급하며 산업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을 소개하기도 했다. 무조건적인 ‘봉쇄’보다는 산업을 안전하게 활성화하기 위한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윤 변호사는 “국내에선 업계를 중심으로 STO를 현행법 체계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규제는 더 나아가야 한다”며 “규제 기관에 의해 가상화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공론화돼서 산업이 위축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과도기… 카카오·라인 등
대형 플랫폼 줄줄이 대기
이처럼 규제 환경이 녹록지 않다보니 당장 새로운 블록체인 사업모델이 상용화되는 데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표철민 체인파트너스 대표는 “가상화폐 가격 폭등이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큰 관심을 끌었지만 한편으론 과도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면도 있었다”며 “언젠가는 기존 인터넷 체제에 없었던 새로운 콘텐츠가 등장하겠지만 아직은 과도기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올해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대형 업체들이 내놓을 블록체인 플랫폼에도 주목한다. 카카오 자회사 그라운드X가 개발한 클레이튼(Klaytn),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라인이 만든 링크(LINK), 두나무의 루니버스(Lunivers) 등이다. 개발 주체가 명확한 이런 플랫폼은 제3의 기관 없이 개인 간 자발적인 참여로만 거래가 이뤄지는 당초 블록체인 개념과는 다소 동떨어진 면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개발 주체가 있는 만큼 효율적이고 안정성 있는 개발이 이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처음 블록체인 개념이 주목받았을 때처럼 완전히 혁신적인 서비스가 되긴 힘들 것”이라면서도 “당장 블록체인이 구체화된 플랫폼이 생기면 이전에 비해 기술을 알리고 대중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지난 3월 19일엔 두나무 소속 블록체인 연구소 람다256이 독립법인으로 분사하면서 동시에 블록체인 서비스 플랫폼 루니버스를 정식 출시했다. 루니버스는 블록체인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전문 개발자 없이도 서비스를 만들 수 있도록 플랫폼 역할을 한다는 구상이다. 람다256은 또 블록체인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루니버스의 자체 토큰 ‘루크(LUK)’를 발행한다. 루크는 루니버스 사용료, 플랫폼 내 결제 수단 등으로 쓰일 예정이다.
카카오 계열의 블록체인 네트워크 클레이튼도 이르면 올해 6월부터 상용 서비스를 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국민 메신저앱 카카오톡에서 바로 가상화폐를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기능 등 다양한 사업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토종 블록체인 프로젝트 액셀러레이터인 해시드의 김서준 대표는 “카카오 클레이튼을 비롯해 대기업의 블록체인 플랫폼이 등장하면 큰 변화가 뒤따를 것”이라며 “기존 카카오 플랫폼의 5000만 유저가 유입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거래를 보여줄 수 있다”고 기대했다. 다만 투자 자산으로서의 가상화폐에는 신중한 접근을 강조했다. 김 대표는 “스스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주요 코인은 어떤 기업보다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고 믿지만 그와 별개로 대부분의, 유용성을 못 만들어내는 코인은 가치가 0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단순히 기대심리로만 시장이 돌아가는 시기는 끝나가고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