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전략사업으로 추진한 ‘한강변 초고층’ 개발 단지들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서울시가 한강 유도정비구역 사업에 대해 본격적인 재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다 주택시장도 장기 불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최고 50층 높이 아파트 8000여 가구 건립이 추진됐던 한강변 성수동 일대 재개발 구역들이 뉴타운 해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주민 실태조사에 들어가면서 이 같은 예상은 더욱 현실화되고 있다.
실태조사는 서울시나 자치구가 재개발에 필요한 사업비, 주민들의 예상 부담금 등의 정보를 조사해 공개하는 절차다.
주민들은 이를 바탕으로 사업 진행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주민 의견 수렴과 사업성 재검토 과정을 거쳐 내년 초 사업 중단 또는 재개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의미다.
실태조사 대상에는 성수동을 비롯해 용산구 보광동, 성동구 금호동, 마포구 망원동 등 다른 한강변 사업장도 대거 포함됐다.
이들이 무더기 중단 사태를 맞을 경우 한강변 재개발 사업은 사실상 백지화되는 것이다.
한강 유도정비구역은 2009년 발표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한강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이다. 한강변 일대에 재개발·재건축을 통해 50~60층의 초고층아파트를 지어 새로운 한강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것으로 모두 10개 구역이 지정돼 있다. 압구정, 여의도, 이촌, 합정, 성수 등 전략정비구역 5곳(1차 사업지구)과 잠실, 반포, 구의·자양, 당산, 망원 등 유도정비구역 5곳(2차 사업지구)이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지역 주민간의 정비사업 찬반 대립과 과도한 기부채납비율 등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사업이 지지부진했다. 여기에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뒤로는 초고층 건물 건립에 따른 도심과밀화와 한강변 조망권 문제, 소형아파트 증가정책 등이 맞물리면서 사실상 계획이 전면 재검토되고 있다.
11월부터 서울시는 추진위원회 미설립 단계인 뉴타운·재개발 163개 구역의 실태조사를 진행한 데 이어 추진위원회·조합 등 추진 주체가 있는 뉴타운·재개발구역 70곳의 실태조사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은 성동구 성수1·2가에 위치한 성수전략정비 1~4구역이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개발 대상지 총 53만㎡에 평균 30층, 최고 50층짜리 아파트 8247가구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전용 85㎡ 이하 중소형 아파트가 80%(6600가구) 이상을 차지했던 곳이다. 2009년 서울시가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한 서울 도심 5개 전략정비구역 중 가장 빠른 사업 속도를 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서울시가 한강변 초고층 아파트 건립에 줄줄이 제동을 걸면서 사업이 지지부진해졌다. 급기야 반대파 주민들이 실태조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역시 한강변 아파트로 주목받던 금호16구역도 실태조사 대상에 포함됐다. 한남뉴타운 내 5개 구역 중 가장 사업 속도가 빠른 축에 속했던 한남2구역도 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마포구에서도 한강변에 위치해 사업성이 좋다는 평가를 받던 망원1구역은 조합 설립 후 사업시행인가까지 받았지만 검토 대상에 올랐다.
망원동 일대 한 중개업소 관계자는 “얼마 전 조합이 시공사 선정 공고까지 내며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는데 갑자기 실태조사를 한다고 하니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전영진 예스하우스 대표는 “성수·한남·망원 등 알짜 한강변 사업장에 대한 실태조사와 함께 서울시가 한강변 초고층 계획도 재수립 중이어서 계속 돌발 변수가 생겨나고 있다”며 “사업 무산 시 주변 부동산시장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지역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는 내년 2월부터 나온다. 해당 정비사업의 계속 추진 또는 추진위원회·조합 해산 여부는 주민들이 사업에 동의한 자의 과반수 또는 토지 등 소유자 과반수의 동의에 따라 결정된다. 이르면 내년 2월부터 해제 지역 리스트가 나오는 것이다.
무너진 대박의 꿈… 매매가격 추풍낙엽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과거 한강 르네상스 사업으로 ‘대박 신화’를 꿈꿨던 한강변 아파트들의 매매가격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한강변 초고층 사업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부촌으로 거듭났던 압구정동에서는 최근 3.3㎡당 4000만원을 넘던 고가아파트가 자취를 감췄다.
11월 말 기준 국민은행이 내놓은 ‘가장 비싼 아파트’ 통계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 최고가 아파트인 현대7차의 매매가격은 3.3㎡당 3944만원으로 그간 유지했던 4000만원선이 깨졌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평형별로 3.3㎡당 4300만~5000만원선이던 가격이 한강변 사업이 본격 역풍을 맞은 올해 중순 이후 급격하게 하락했다. 국토해양부 실거래 자료에 따르면 이 아파트 전용 157㎡형은 올해 1월만 해도 21억6000만원에 2건 매매가 이뤄졌지만, 지난 8월에는 19억4500만원에 팔렸다.
2010년 1월 14억원에 거래됐던 현대 3차 전용면적 83㎡도 11월 들어 8억7500만원에 팔려 3년여 만에 실거래가가 38% 떨어졌다. 압구정동 A공인 관계자는 “최근 8억원대 급매물도 가끔 나오고 있지만 매수자들이 가격을 더 낮추려고 하기 때문에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의도에서도 압구정동과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2010년 고점을 찍었던 여의도 주요 아파트의 실거래가는 현재 33~38% 하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의도 삼부아파트 전용 92㎡형은 2010년 2월 9억8000만원에서 올해 10월 6억5000만원으로, 시범아파트 전용 61㎡형은 2010년 2월 7억5300만원에서 올해 11월 4억7000만원으로 몸값을 낮췄다. 한양아파트 전용 150㎡형도 2010년 1월 12억3500만원에서 지난 9월 8억3000만원으로 가격이 하락했다. 여의도동 S공인 관계자는 “삼부아파트 전용 70㎡형은 2년 전 10억원선을 턱밑까지 치고 올라갔지만 요즘은 6억5000만~6억7000만원에 나오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수석팀장은 “올해 압구정동과 여의도 아파트 중에는 고점 대비 30% 이상 가격이 내린 단지가 크게 늘었다”며 “한강르네상스라는 장밋빛 청사진이 허물어지면서 거품이 빠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서울시 한강변 가이드라인이 새로운 청사진
한강변 재개발 사업의 새로운 청사진은 서울시가 마련 중인 ‘한강변 관리방향 및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려질 전망이다.
한강변 관리방향 및 가이드라인에는 한강변을 따라 늘어선 노후 아파트, 단독주택 등을 어떻게 재개발·재건축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설정된다. 일단 한강 양쪽 반경 0.5~1㎞ 일대가 관리 대상 구역으로 지정될 것으로 보인다. 기존 한강변 10개 개발구역도 모두 포함된다.
이를 바탕으로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세부적인 ‘관리기본계획’도 수립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압구정·여의도 전략정비구역처럼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강변 전체를 관통하는 통합적인 틀을 세운 뒤 지역별 특성에 맞는 개발기준을 제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한강변 10개 구역에 수립된 기존 개발계획도 다시 수립된다. 평균 30층, 최고 50층에 여의도는 70층까지 계획됐던 종전의 층수도 대폭 조정된다. 도심-부도심-지역중심-지구중심으로 이어지는 도심 위계, 서울 안팎의 산세 등 주변 자연경관과의 조화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구역별로 층고 한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여의도, 잠실지구처럼 초고층이 적합한 곳은 그대로 두되, 다른 지역은 중·저층 중심으로 개발하는 식이다.
최근 층고가 제한된 신반포 1차가 대표적이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과 인접한 지역중심이면서 남산~관악산으로 이어지는 남북 녹지 중심축에 위치하기 때문에 당초 61층이던 층고가 최고 38층으로 줄었다.
개별 단지나 2~3개 단지를 묶어 소규모 단위로 쪼개 개발할 수 있는 방안도 도입될 예정이다. 통합개발 대신 부분개발을 원할 경우 구역 내 경계를 나눠 따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주민들 간 의사 통일이 더 쉬워지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사업 속도는 빨라질 전망이다.
기부채납 비율을 변경하는 것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종전 계획에서는 구역별로 25~45% 정도의 기부채납 비율이 제시됐다. 과도한 비율을 낮춰달라는 주민들의 반발로 사업에 차질을 빚었던 만큼 다소 완화될 가능성이 높다.
투자시점은 저울질 필요해
거품이 빠지고 있는 만큼 한강변 재개발 지역에 대한 투자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평가다. 장기적으로 일대 개발이 진행될 것은 맞지만, 선뜻 투자에 나서기엔 변수가 많다는 것이다. 일단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감만으로 가격이 올랐던 지역과 학군·조망·교통·주거여건까지 탄탄하게 받쳐주는 지역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