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카르텔’ OPEC+(석유수출국기구와 러시아 등 비회원 주요 산유국 협의체)가 원유 감산 의지를 강조하고 새해부터 중동 지역 무력 충돌 구도가 확산됐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는 하방 압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상반기까지 유가 급등세를 타고 주가가 뛰었던 대형 에너지 기업 주식을 사들였던 투자자들의 셈법도 복잡해지는 모양새다.
국제금융센터는 1월 말 ‘미국의 후티 반군 공습 이후 국제유가 영향’ 보고서를 통해 중동 불안에도 유가가 상승세로 전환할 가능성은 낮다고 내다봤다. 실제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1월 12일, 후티 반군에 대한 미국·영국의 공동 공습 이후 한때 4% 넘게 올랐지만 글로벌 원유 수요 부진 우려가 더 부각되면서 상승 폭이 1% 내외로 축소됐다.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 일대에서 민간 상업용 선박 공격에 나서자 미국·영국 연합군이 대규모 공습을 강화하고, 이에 대해 다시 이란이 이라크 내 이스라엘 첩보 관련 시설을 미사일 공격해 미국 측을 자극하는 등 원유 공급 측면에서 지정학 리스크가 커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셰일 오일 생산이 급증했다.
수요 측면을 보면, 글로벌 경기 침체 압박이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 1인 중국 경기 둔화와 유럽 경기 침체가 대표적인 수요 하방 압력이다. 국제 유가는 지난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이 발생한 이후에도 공급 대비 수요 부진 예상이 더 큰 변수로 작용해왔다. 이 밖에 시장은 OPEC+가 올해 1분기(1~3월) 하루 90만 배럴 추가 감산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이 의무가 아닌 자율 사항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감산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주목하고 있다.
새해 국제 유가 전망은 불확실하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을 비롯한 7곳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새해 유가가 배럴당 80~100달러 사이 박스권을 형성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고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보면 전망이 제각각이다.
우선 네덜란드계 IB인 ING는 올해 상반기 브렌트유가 배럴당 80달러 선을 넘나들며 대체로 안정된 모습을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이어 하반기에는 수요 증가에 힘입어 90달러 수준을 보일 것으로 예측했다. 스탠다드차타드(SC)도 “시장이 중동 상황 악화를 간과하고 있다”면서 “경우에 따라 유가가 최소 10달러 이상 오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석팀은 올해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 전망치를 기존 98달러에서 83달러로 하향했다. 골드만삭스도 올해 브렌트유 가격 전망치를 기존보다 10달러 낮춘 70~90달러로 제시했다. 영국계 IB인 바클레이즈 역시 올해 브렌트유 가격 전망치를 기존보다 4달러 낮춘 93달러로 제시했다.
미국 EIA는 최근 단기전망보고서를 통해 올해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 전망치를 기존 배럴당 93달러에서 10달러 낮춘 83달러로 제시했다. 올해 세계 석유 공급 전망치는 기존 1억255만배럴에서 36만 배럴 낮춘 1억219만 배럴로 제시했다. 석유 수요 전망치는 기존 1억244만 배럴에서 10만 배럴 낮춘 1억 234만 배럴로 추산했다.
이런 가운데 국제 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올해 석유 수요 전망치를 기존 전망보다 13만 배럴 높였다. 지난해보다 하루 106만 배럴 늘어난 1억 278만 배럴일 것이라는 예상이다.
유가 전망이 엇갈리는 이유는 주요 변수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유가 상승 변수는 ▲예멘 후티 반군의 홍해 도발이 중동 확전으로 이어질 가능성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 중국의 경기 부양책에 따른 원유 수요 확대 ▲미국 달러화 약세에 따른 국제 원유 결제 부담 완화에 따른 투자 수요 증가를 들 수 있다.
반면 하방 변수는 ▲중국 등 주요국 경제 추가 둔화 가능성 ▲미국의 셰일 오일 등 OPEC+ 외 산유국들의 원유 생산 증가가 대표적이다. 어게인캐피털의 존 킬더프 연구원은 “올해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것이 반드시 유가 상승에 긍정적인 변수는 아니다”라면서 “금리 인하는 경제 전망이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오히려 원유 수요 위축과 유가 하락을 의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하방 변수와 관련해 특히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OPEC+ 감산 이행 여부와 ▲OPEC+ 외 미국 등 주요 산유국의 공급 증가다.
우선 OPEC+는 올해 1분기(1~3월)까지 하루 총 220만 배럴 자발적 감산에 나서기로 합의한 바 있다. 다만 이는 이행 강제력이 없는 합의다. 이런 가운데 OPEC 주도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유가 떠받치기를 위해 꾸준히 감산을 강조해왔지만 ‘아프리카 2대 산유국’인 앙골라가 OPEC에서 탈퇴하는 등 잡음이 불거졌다.
이후 사우디가 아시아를 포함한 모든 지역에 2월 인도분 원유 공식판매 가격(OSP) 인하에 나선 것도 산유국 향방과 관련해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업계에서는 OPEC+가 유가를 떠받치려면 앞으로 5년 간 감산을 지속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씨티그룹의 맥스 레이턴 글로벌 원자재 리서치 총괄은 OPEC+가 올해 3월 이후 감산 정책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면 유가가 30∼50%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편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비 OPEC+ 산유국들의 증산도 변수다. 지난해 사우디가 감산을 주도해 국제 유가를 떠받쳤지만 이것이 미국 셰일 오일 업계로 하여금 원유 생산을 늘리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유가를 떨어트리는 상황이 연출됐다. 베타파이의 스테이시 모리스 에너지 담당 연구 책임자는 “OPEC+ 감산은 국제 유가가 바닥치는 것을 방어하는 데는 단기적인 도움이 됐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 등 다른 산유국의 생산을 늘리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미즈호증권의 로버트 예거 에너지 선물 담당 전무도 “미국의 증산은 사우디와 러시아의 원유 시장 장악력에 주목할 만한 위협”이라면서 “이제 국제 유가 향방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인 영향력은 미국”이라고 언급했다. 예거 전무는 “휘발유만 따로 놓고 보면 전세계 수요가 하루 1억 250만 배럴수준인데, 공급량은 1억 300만 배럴로 초과 공급이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유럽 등 선진국의 휘발유 수요가 경기 침체로 인해 계속 줄어든다면 유가가 전반적으로 배럴당 50달러 이하로도 거래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국제 유가는 지난해 상반기를 즈음해 OPEC+ 감산 영향으로 90달러 중반까지 올랐다. 다만 하반기 미국 셰일 업계가 본격적으로 증산에 나서면서 유가 하락세가 두드러졌고 올 들어서는 70달러 초반까지 떨어진 바 있다. 미국 셰일 오일 생산 손익 분기점은 60달러 선이다.
시장조사기관 S&P글로벌은 올해 OPEC+를 제외한 산유국들 원유 공급이 미국 셰일 오일 증산에 힘입어 하루 총 270만 배럴로 늘어난 결과 글로벌 수요 증가치(160만 배럴)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EIA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셰일 오일을 포함한 미국 원유 생산량이 올해 하루 평균 1320만 배럴에 달하고 내년에는 1340만 배럴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의 경우 11월과 12월 각각 하루 1330만 배럴과 1320만 배럴을 기록해 이전 신기록(2020년 2월 1310만 배럴)을 웃돌았다.
미국은 원유 증산에 이어 수출도 늘리고 있다. 지난해 초 하루 평균 250만 배럴이던 미국 원유 수출량은 지난 해 말 하루 500만 배럴까지 2배 가량 늘었다.
일각에서는 미국 셰일 업체들이 증산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셰일 오일 공급이 기대치에 못 미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셰일 오일 시추 장비수가 크게 늘지 않은 데다 대형 에너지 업체들이 생산 목표치를 눈에 띄게 높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블룸버그통신은 비상장 셰일업체들이 생산량을 빠른 속도로 늘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올해 미국 원유 생산량이 과소 추정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S&P글로벌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생산량을 가장 많이 늘린 미국 셰일 오일 생산 업체 10곳 중 7곳이 비상장사다. 일례로 비상장 기업인 뮤본오일과 엔데버 에너지리소시스의 셰일 오일 증산량은 미국 최대 에너지 업체인 엑손모빌 증산량을 넘어섰다.
미국 밖에서는 최근 새로 유전을 개발한 브라질과 가이아나 등의 증산 움직임도 유가 하방 압력이다. 미국과 노르웨이를 비롯해 남미 국가들의 석유 생산이 늘면서 전 세계 원유 시장에서 OPEC+ 비중은 지난 2016년 이후 가장 낮은 51% 수준까지 떨어진 바 있다.
[김인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