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할인)’ 현상이다. 한국 상장사들이 시장에서 적정기업가치(밸류에이션)를 부여받지 못하는 게 일상이 되면서 장기투자자, 외국인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코스피지수가 10년 동안 2000포인트 초중반 수준에서 등락을 거듭하는게 대표적이다. 같은 기간 미국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가 3배가량 상승한 것과 대비된다.
특히 코스피지수에 속한 종목 중 현재 기업가치가 장부상 청산가치에 미달하는 경우가 약 6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국 증시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최근 주주행동주의가 증가하고, 자사주 소각 및 배당 확대 등 상장사들의 적극적인 주주가치 제고 정책이 잇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3년 12월 중순 기준 우선주를 제외한 코스피 종목 799개 중 주가순자산비율(PBR)이 장부상 가치(1배)에 미치지 못하는 종목 수가 529개에 달했다. 이는 코스피지수 전체 종목 중 66%의 현재 주가가 당장 상장폐지 시 청산가치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PBR은 기업의 주당순자산(BPS) 대비 현 주가를 나타내는 기업가치 지표다. 수익성과 관계된 주가수익비율(PER)과 다르게 PBR은 특정 밴드 내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PBR을 기준으로 해당 종목의 주가가 보유자산 대비 저평가됐는지, 고평가됐는지 판단하기도 한다.
만약 PBR이 1배를 밑돈다면 기업이 보유한 자산을 장부가로 죄다 팔았을 때 가치보다 현재 주가가 더 낮다는 의미다. 시장 참가자들이 한국주식 종목들에 대해 상당한 저평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통상 PBR이 1배 이하로 낮은 종목들은 자기자본이익률(ROE)도 낮은 경우가 많다. ROE가 낮아 자본의 성장률이 떨어져 자연스레 PBR이 할인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PBR이 1배 이하인 종목들을 살펴보면 반도체, 2차전지(배터리) 등 최근 코스피지수를 견인하는 대표적인 성장 섹터 외 성장이 정체되거나 주가 할인 요소가 더해지는 지주사, 중후장대, 금융, 유통, 통신 업종에서의 저평가가 심각했다. 특히 LG(0.51배), CJ(0.51배), SK(0.44배) 등 많은 지주사들이 자회사 중복 상장에 따른 기업가치 할인 여파를 피해 가지 못했다.
시가총액 최상위 종목들도 기업가치 할인의 직격탄을 맞았다. 코스피 시가총액 10위권 이내인 포스코홀딩스는 2023년 주가가 크게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PBR이 0.66배에 불과하다. 또 다른 시가총액 상위권인 현대차와 기아의 PBR도 각각 0.46배, 0.89배로 1배보다 낮다.
삼성생명(0.57배), KB금융(0.42배), 신한지주(0.39배), 우리금융지주(0.33배) 등 금융주도 평가가 박한 편이다. 그 밖에 SK텔레콤(0.96배), 대한항공(0.95배), LG전자(0.82배), CJ제일제당(0.69배), SK이노베이션(0.57배), KT(0.55배), 현대건설(0.52배), 현대백화점(0.24배), 이마트(0.18배) 등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 종목들의 기업가치가 모두 낮은 상태로 거래 중인 모습이다.
전체 시장의 기업가치도 낮은 편이다. 현재 코스피지수의 PBR은 0.92배에 불과하다. 미국의 대표지수인 S&P500지수의 PBR은 4배를 넘어선다. 글로벌 시가총액 1위 종목인 애플의 PBR은 40배를 넘어선다. 지난 2017년 기준 S&P500지수 종목 중 PBR이 1배 이하인 종목 비율은 6.8%뿐이다.
한국 종목들의 저평가가 심각한 이유로 우선 지배구조와 주주가치 제고 정책의 부족함이 손꼽힌다. 우리나라 주요 상장사들은 오너 중심의 기업구조를 보이는데, 주가가 오르면 향후 경영권 승계 시 많은 상속세가 발생하는 구조다. 오너들이 주가부양에 나설 뚜렷한 요인이 없는 이유다. 이는 자연스레 자사주 매입 후 소각, 배당 증액 등 적극적 주주환원책의 부재로 이어지게 된다.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기업들의 주주가치 제고 경시 문화가 주요 원인으로 저배당, 자사주 소각 미흡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며 “문어발식 자회사 상장과 무분별한 유상증자도 저평가 인”이라고 말했다.
한국 증시의 주주환원율은 글로벌 증시 평균치에도 크게 못 미치는 실정이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에 따르면 지난 2011~2017년 동안 자사주 매입, 배당 지급 등을 포함한 한국의 주주환원율은 1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97%), 유럽(77%)은 물론이고 중국(33%)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규제 리스크도 있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정치적 논리에 따라 규제기관이 향후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있다”며 “MSCI 선진국지수에 못 들어가면서 우리 기업들의 시장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만성 저평가의 결과는 코스피지수가 2000포인트 선에서 등락을 반복하는 ‘박스피’다. 지난 2007년 2000포인트를 넘어섰던 코스피는 이후 10년 이상 박스권을 그렸고, 2023년 연말에도 2500포인트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한국 증시가 우상향하는 추이를 뚜렷하게 보이지 못하자, 시장 참가자들이 장기 투자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도 저평가를 유발한다. 많은 투자자들이 상승 동력이 발생한 테마 종목만을 좇아다니는 모습을 보이며, 유동성이 특정 종목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유동성이 몰리면 시장 소외주들은 제대로 된 기업가치를 평가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최근 들어 국내 증시에서도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노력이 늘고 있어 긍정적인 변화가 기대된다. 주요 상장사들이 주가 상승을 위해 자사주 매입 및 소각에 나서고 있고, 배당성향도 늘리며 저평가 탈피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주주행동주의가 늘고 있다. 키움증권에 따르면 2023년 상반기 기준 국내 증시에서 주주행동주의가 발생한 상장사는 50곳으로 2021년(34곳)과 2022년(37곳)에 이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이다. 주주 제안 안건도 2023년 상반기 195건으로 2022년 142건을 웃돌았다. 개인·기관투자자에 의한 주주행동주의가 개시되면 대상 상장사는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소각을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상장사들의 현금 배당액은 40조원대로 전체 주주환원 규모의 89%를 배당이 차지하고 있다. 2022년 코스피 상장사들의 배당성향은 25.2%로 2021년(20.7%) 대비 늘었다. 2012년(15.6%)에 비해서는 10%포인트나 뛰었다.
특히 주가 견인을 위한 핵심적 조치로는 자사주 매입에 그치지 않고, 소각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사주 매입만으론 유통주식 수에 변함이 없지만, 소각 시 주식 수가 줄어 주당순이익(EPS)이 상승해 주가가 오르기 때문이다. 자사주 소각은 배당 지급보다 뛰어난 주주환원 정책으로도 평가받는다. 배당금의 경우 지급 시 15.6%의 배당소득세가 발생한다. 세금을 뗀 후 배당금을 받는 것보다 자사주 소각으로 주가 상승효과를 누리는 게 낫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3년 3분기까지 국내 상장사들의 자사주 소각 현황을 분석한 결과 상장사들의 자사주 소각 합계액이 4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22년 1~3분기 수치인 2조5814억원보다 59.3% 증가한 수치다. 2021년 자사주 소각액도 2023년과 유사한 2조2460억원이었다. 자사주 소각을 발표한 기업 수도 지난 2021년 21개사, 2022년 36개 사에서 2023년 74개사로 늘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자사주 매입, 소각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가 주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지배구조에도 좋다는 점을 대주주들이 이해해가는 과도기”라고 밝혔다.
2021~2023년 3분기까지 상장사들의 자사주 소각 현황을 분석한 결과 SK텔레콤이 가장 많은 2조1659억원에 달하는 자사주를 소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뒤로 메리츠금융지주(1조77억원), KB금융(8717억원), 신한지주(6859억원), 미래에셋증권(3430억원), 현대모비스(3327억원), 하나금융지주(2999억원) 순이다.
주로 금융지주사들과 현대차그룹, SK그룹이 적극적으로 자사주를 소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현대차, 기아는 각각 3154억원, 2245억원의 자사주 소각을 발표했다. 현대모비스까지 합한다면, 8700억원 규모다. SK그룹은 SK텔레콤을 비롯해 SK스퀘어(1062억원), SK(1006억원), SK네트웍스(697억원), SK케미칼(499억원)이 해당 기간 자사주를 소각했다.
적극적인 자사주 소각을 통해 주가 상승에 성공한 표본으로 업계에서 자주 입에 오르는 종목은 메리츠금융지주다. 금융주임에도 불구하고 메리츠금융지주는 지난 2021년 대세 상승장 당시 348% 오르며 코스피 주가 상승률 5위를 기록했다. 메리츠금융지주는 종전 상장사였던 메리츠증권, 메리츠화재를 비상장 완전자회사로 편입하며 일원화에 나섰다.
향후 더 많은 상장사들의 자사주 소각에 나설지 주목된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들이 보유중인 미소각 자사주 규모는 약 74조원(약 34억주)에 달한다. 기업들이 보유 중인 자사주를 향후 적극 소각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주주행동주의를 실천하는 종목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가 시장에 나오기도 했다. 주주행동주의를 실천하는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주주가치 확대가 예상되는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TRUSTON주주가치액티브’ ETF를 시장에 선보였다.
해당 ETF는 낮은 주주환원율을 이유로 본질가치 대비 주가가 현저히 저평가된 기업 가운데 주주환원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는 종목에 투자한다. 주주행동주의 대상이 된 종목 및 향후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종목도 담는다.
이성원 트러스톤자산운용 ESG운용부문 대표는 “정부의 제도 변화 및 시장 참여자들의 주주가치에 대한 인식 확대에 따라 기업이 자발적으로 주주환원을 확대하는 움직임도 늘고있다”며 “주주가치 확대를 통해 기업가치가 상승할 수 있는 우량한 기업을 발굴하는 전략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