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하반기 들어 주요국 증시가 ‘박스권’ 형태를 보이면서 투자 대기성 자금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 투자자들을 중심으론 2차전지(배터리), 초전도체, 맥신 등 테마주 광풍이 몰아치면서 시장이 과열됐다고 판단한 국내 기업들의 법인 자금이 단기 안전성 자금으로 유입되는 모습이다.
특히 법인들이 자금을 은행 수시입출금 통장에서 빼 머니마켓펀드(MMF)로 옮긴 것으로 나타났다. 법인 MMF에 돈이 쌓인다는 것은 기업들이 향후 경제, 경기 상황을 회의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9월 중순 기준 국내 MMF 총 잔액은 184조7397억원으로 지난 6월 말보다 20조원가량 증가했다. MMF 잔액의 90% 이상은 법인 자금이다. 지난해 말 MMF 잔고는 150조원을 조금 넘었지만 현재 200조원 근처까지 늘어났다.
금정섭 KB자산운용 ETF마케팅본부장은 “올해 반등 국면에서 불안 심리가 커진 기관들이 단기성 자금을 안전자산에 ‘파킹’ 형태로 넣어두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MMF로 머니 무브가 나타났다. 미국 자산운용협회(ICI)에 따르면 미국 MMF 잔고는 최근 기준 약 5조5000억달러(약 7262조원)로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앞서 한국은행이 발표한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 7월 은행의 수시입출금 통장 잔액은 36조6000억원 급감했다. 반면 MMF 잔액은 7월 한 달간 15조1000억원 증가했다. 한은은 이러한 자금 흐름 배경에 “계절적 요인이 있다”며 투자심리 전환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은은 자금 이동에 대해 조심스러운 분석을 내놓았지만 시장의 행보는 이미 뚜렷하게 양쪽으로 갈라졌다. 기업과 일부 개인투자자들은 위험 자산 비중을 줄이고 만기도 짧게 가져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용을 써서 테마주 투자에 ‘몰빵’하다 높은 변동성에 반대매매를 당하는 투자자도 적지 않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 ETF 체크에 따르면 올해 1~9월 공모펀드 시장의 국내 주식형 상품에서 연초 이후 7933억원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선 올 국내 증시를 주도한 2차전지 테마 상품에서도 일부 자금 유출이 포착됐다. TIGER 2차전지테마 및 KODEX 2차전지산업 ETF에서 연중 각각 5395억원, 4696억원이 유출됐다. 코스닥150지수의 일일수익률을 2배 추종하는 KODEX 코스닥150레버리지 ETF에서도 연중 9230억원의 자금이 나간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안전자산을 편입한 상품엔 자금이 몰려들고 있다. 올해 들어 공모 펀드 시장에서는 국내, 해외 채권형 상품에 9조6615억원이 순유입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중 ETF 시장에서 자금 순유입 상위 50개 상품 중 채권, 파킹통장(금리)형 상품의 자금 유입액도 약 8조원에 달한다.
김성훈 한화자산운용 ETF사업본부장은 “2차전지 고평가 논란에 더해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 강등으로 증시가 혼조세를 보이면서 기관 자금을 중심으로 고금리 안전자산에 단기 유동성 자금이 몰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의 자금 운용이 MMF에 집중되는 상황이지만 테마주 투자로 단기 시세 차익을 거두기 위한 개인투자자들의 ‘초단기 빚투(빚내서 투자)’ 광풍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증시 위탁매매 미수금 잔고는 9월 중순 기준 513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올해 초 수치(1929억원) 대비 크게 늘어난 것이다. 미수금은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사고 2거래일 후 대금을 갚는 초단기 빚투 자금을 말한다. 주가가 상승할 경우 큰 수익을 낼 수 있지만, 주가 하락으로 기한 내에 대금을 납입하지 못하면 증권사가 주식을 강제로 파는 반대매매(강제청산)가 일어난다.
실제로 2차전지 주가가 출렁이면서 빚투의 부작용인 반대매매 규모도 증가했다. 위탁매매 미수금 대비 실제 반대매매 금액은 481억원 수준으로 연초(194억원)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미수금 대비 반대매매 비중은 9.3% 수준이다.
2차전지가 고평가됐다고 판단하고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공매도도 집중되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2차전지가 일종의 종교처럼 되면서 더 이상 주가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이 어렵다”며 “부자와 빈자, 기관과 개인의 싸움처럼 프레임이 형성된 상황이라 랠리가 지나고 나야 정확한 판단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증시 과열 우려 속 고금리 이자 수익을 얻을 수 있고, 환금성이 좋은 상품에 대한 투자 수요가 높은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금리형 및 채권형 ETF가 거론된다. 금리형 ETF는 MMF처럼 단기 수익률이 높으면서 향후 증시가 하락하게 되면 자금을 빼내 저가 매수에 나설 수 있다. 금리형 상품은 하루만 자금을 넣어도 일일분만큼의 이자 수익이 수익률로 반영돼 소위 ‘파킹통장형’ 상품으로도 불린다.
대표적인 금리형 상품인 TIGER CD금리투자KIS(합성) ETF엔 올해 2조1648억원의 자금이 들어왔다. KODEX CD금리액티브(합성) 및 TIGER KOFR금리액티브(합성) ETF에도 각각 2조349억원, 1조6419억원이 유입됐다.
현재 ETF 시가총액 2~3위도 금리형 상품이다. TIGER CD금리투자 KIS(합성) 및 KODEX KOFR금리 액티브(합성) ETF의 합산 시가총액은 약 9조2000억원으로 1위인 KODEX 200 ETF(약 5조9800억원)를 훌쩍 넘어서게 된다. 금리형 상품의 인기에 조만간 ETF 시가총액 1위 종목이 바뀔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9월 중순 기준 1위 종목은 KODEX 200인데, 2위인 TIGER CD금리투자KIS(합성) ETF와 순자산액 차이가 약 3000억원에 불과하다.
안전자산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채권형 상품에 대한 관심도 높다. 채권 투자 전략은 크게 이자 수익, 자본 차익 2가지로 구분된다. 단기 자금 운용 관련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건 이 중 채권의 이자 수익에 집중하는 방법이다. 이는 주로 기준금리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는 만기가 짧은 단기채 및 초단기채에 해당하는 투자법인데, 금리 변화에 따른 가격 변동 폭을 최소화하면서 안정적인 이자 수령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개인투자자들의 자금이 실제 국내를 넘어 미국 시장에서도 단기채 ETF에 대거 몰려들고 있는 실태다.
최병욱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금리 하락과 정점 기대감에 글로벌 자금이 채권형 ETF로 순유입 중”이라며 “국내에서도 최근 1개월 회사채 ETF 상장 및 해외 장기채 관심 증가에 채권형 상품으로 자금이 순유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자 수익에 집중한 단기채 ETF는 국내에선 KODEX 단기채권, KBSTAR 단기통안채, TIGER 단기채권액티브, ACE 단기채권알파액티브 등의 상품이 있다. 일일분의 이자수익이 수익률 형태로 쌓이기 때문에 꾸준히 주가는 우상향하는 모습을 보인다. 미국채 투자를 원한다면 미국 증시에서 만기 3개월 미만 채권에 투자하는 ‘아이셰어스 3개월 미만 국채(SGOV)’ ETF가 최근 떠오르고 있다. 한 달 동안 글로벌 자금 약 17억달러(약 2조2700억원)가 유입되기도 했다.
만약 1~2년 내 만기가 도래하고, ‘확정 수익’을 원하는 투자자라면 만기매칭형 채권 상품을 주목해볼 만하다. 해당 상품은 만기가 미리 정해져 있어 투자 시점에 따라 수익률이 확정되는 게 특징이다. 대부분 상품들의 현재 만기 수익률은 3~4% 수준이다. 편입 자산도 신용등급이 대체로 A- 등급 이상으로 우량한 국채, 은행채, 회사채 등이다.
현재 대부분 만기매칭형 채권 ETF가 2023~2024년에 만기가 몰려있다. 장기 투자를 원하는 경우 만기가 10년 이상으로 긴 상품을 찾는 게 좋다. 가장 만기가 긴 상품은 삼성자산운용의 KODEX 53-09 국고채액티브 ETF다. 월배당 상품이 좋다면 KB자산운용 상품을 주목할 만하다. KBSTAR 만기매칭형 ETF 시리즈는 모두 월배당형이다.
은행 예금, 단기채보다 금리 매력이 높은 증권사 발행어음도 인기다. 발행어음이란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의 초대형 증권사(IB)로 지정된 회사들이 자기 신용을 활용해 만기 1년 이내의 확정금리형으로 발행하는 상품이다. 보통 증권사들이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어음을 시중에 내놓는데, 금리 수준이 높아져 투자자들 입장에선 쏠쏠한 단기 자금 투자처로 급부상하게 됐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발행어음 사업을 인가받은 4대 증권사(미래에셋증권·한국투자증권·NH투자증권·KB증권)들의 올해 2분기 발행어음 잔액 규모는 32조8787억원으로 지난해 2분기 수치(23조3807억원) 대비 40% 증가했다. 현재 이들 증권사들의 1년 만기 발행어음의 연 금리 수준은 4.15~4.4%에 달한다. 일부 증권사 지점마다 제공하는 특판 상품의 경우 5%대 금리까지 등장했다.
차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