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산관리(WM) 사업 부문에서 두각을 보이는 증권사에 10억원 이상을 맡긴 소위 ‘슈퍼리치(고액자산가)’들이 비상장 미래 기업에 목돈을 넣고 있다. 비상장 주식 투자는 그동안 기관투자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는데, 슈퍼리치 자금이 시장에서 기관투자자 역할을 수행할 정도로 리테일 시장이 커진 셈이다.
슈퍼리치들은 인공지능(AI), 전기차를 포함해 우주 개발 기업에까지 수십억원을 거침없이 베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증시에 상장된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 전통 자산에 주로 투자해왔던 기존 패턴에서 벗어나 향후 성장 모멘텀을 가진 미래 성장 종목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같은 슈퍼리치들의 존재감 부각은 재테크 지형 변화는 물론, 차세대 성장 산업과 자산 시장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매일경제가 국내 5대 증권사(삼성·미래에셋·한국투자·KB·NH투자)들이 관리하는 10억원 이상 슈퍼리치 현황을 조사한 결과 고객 수는 5만 4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이 증권사에 맡긴 금융 자산도 320조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슈퍼리치들은 최근 자산 규모가 불어나면서 국내·외 비상장 미래 기업을 발굴해 투자하고, 대형 인수·합병(M&A) 딜에 돈을 대는 등 기관 못지않은 투자전략을 펴고 있다.
최근 KT의 자회사인 KT클라우드 관련 펀딩에 고액 자산가들이 대거 참여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중순 연기금, 공제회 등 주요 기관투자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 KT클라우드 6000억원 자금 모집에 삼성증권의 슈퍼리치를 중심으로 한 개인투자자 리테일 자금 533억원이 투자됐다. 1인당 최대 100억원까지 참여할 수 있는데도 수요가 높았다는 후문이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올해 ‘챗GPT’ 열풍으로 큰손들 사이에 AI 스터디 열기가 뜨겁다”며 “데이터센터(IDC)와 클라우드는 AI의 핵심 중 핵심이라 KT클라우드에 관심이 높았다”고 밝혔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주요 기관투자자들도 참여해 오버 부킹이 될 정도로 인기가 많은 딜이었다”며 “특히 큰손들이 기관 유동성공급자(LP) 수준으로 자금을 댔다”고 전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조 단위 자금 유치를 진행 중인 2차전지(배터리) 대기업 SK온에도 슈퍼리치 자금이 대거 유입됐다. 펀드를 조성한 한국투자증권 관계자는 “최소 투자액은 10억원 이상으로 주로 고액자산가들이 투자했다”고 귀띔했다.
이미 상장된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주식을 사는 것보다 다소 리스크가 있더라도 상장 전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고수익을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투자 규모가 크고 장기간 자금이 묶일 가능성이 있지만, 장기 보유와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의미”라며 “큰손들의 자산 규모가 커지면서 일부 자금은 기관과 비슷한 투자 패턴을 좇고 있다”고 분석했다.
슈퍼리치들은 유전자 치료, 우주 개발처럼 ‘꿈’을 좇는 초장기 투자처에도 서슴없이 자금을 댄다. 미래에셋그룹이 올해 상반기 조성한 사모펀드에는 슈퍼리치 수십 명이 참여해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인 일론머스크가 설립한 우주 기업 스페이스X에 거액을 투자하기도 했다. 스페이스X는 얼마 전 화성 탐사 우주선 스타십을 쏘아 올려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꿈처럼 보이지만, 결국 머스크를 믿고 투자한 것 아니겠냐”며 “그만큼 다양한 투자처에 분산 투자한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유전자 치료제 개발 기업 알데브론 등 비상장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 한국투자증권이 조성한 펀드에도 매년 수십억원의 큰손 자금이 유입됐다. 특히 2021년 자본시장법 개정에 따라 사모펀드 운용사들이 일반 리테일 자금을 유치할 수 있도록 하면서 슈퍼리치 비상장 미래 기업 투자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운용사와 증권사 자산관리 서비스 전담 조직 간 협력이 강화되면서 다양한 투자처가 쏟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딜 파트너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얼마나 관련 인프라스트럭처가 잘 구성돼 발 빠르고 안정적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네트워킹이 좋고 상품 이해도가 빠른 조직이 딜을 따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슈퍼리치들은 미래 성장동력이 풍부한 기술·성장주를 선취매하기 위한 공부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6월 말 서울 서초동 한 세미나장 내 삼성증권이 마련한 AI 설명회엔 자산규모 300억원 이상의 고액 자산가 300여 명이 모이기도 했다. 업계에선 “총합 1조원 고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경희 삼성증권 채널영업부문장(부사장)은 “슈퍼리치들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학습하길 원한다”며 “배운 지식은 투자 아이디어로 활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챗GPT발 AI 투자 열풍이 불면서 관련 투자 지식을 얻길 원하는 슈퍼리치들의 수요가 높다는 방증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2030년까지 AI 산업은 3배 성장할 것으로 추정된다.
고액자산가 A씨는 매일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엔비디아 주식 가격이 9달러일 때 삼성증권에서 매수 추천을 해줬다”며 “증권사를 통해 앞서가는 투자 아이디어를 얻고자 한다”고 밝혔다.
고액자산가 B씨는 “잔존만기 15년 정도의 한국, 미국 장기채에 주로 투자하고 있다”며 “성장성이 있는 AI 테마 종목도 장기적으로 묻어두는 투자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진관 삼성증권 랩운용팀장은 “일반 투자자들이 직접 수혜 종목을 고르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며 “펀드, 랩어카운트 등 다양한 간접 투자 상품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슈퍼리치들은 부동산, 미술품 등 대체 투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국내 큰손들이 다양한 증권 투자처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비중이 큰 투자처는 부동산이라는 지적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슈퍼리치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은 48%에 달했다. 슈퍼리치들 중 36%가 “부동산은 자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보존하는 기능이 있다”고 답했다. 슈퍼리치들의 미술품 보유 비중도 약 41%다. 이는 대중 부유층(14%) 대비 크게 높은 수준이다. 슈퍼리치 2명 중 1명은 향후에도 미술품을 추가로 구매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금융자산 50억원을 굴리는 고액자산가 C씨는 최근 미국 뉴욕 맨해튼 오피스 빌딩 보유 펀드에 지분 투자를 결정했다. 오피스 빌딩 공실률이 높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뉴욕 핵심 권역에 위치해 있는 만큼 오히려 지금 투자 가치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에 갈 기회가 있을 때 해당 건물을 보고 오기도 했다”며 “포트폴리오 다양화 측면에서 투자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과거와 달리 국내 부동산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주요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증권사들은 관련 투자 상품을 발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해외 부동산 펀드는 투자 시 보통 연 환산 6%를 넘어서는 배당 수익을 낼 수 있다. 향후 보유 자산 매각 시 차익 분배도 이뤄진다. 지분 이외에 실물 투자를 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해외 상업용 부동산 시장 한파로 인해 부동산 펀드 공급은 일부 위축됐다는 분위기다. 다만 슈퍼리치들이 장기 투자에 익숙한 만큼 투자금 회수를 위한 매각이 불발되더라도 ‘기다리는 투자’가 가능하다는 평가다.
한국투자증권 슈퍼리치들은 고액자산가 전용 창구를 통해 해외 부동산 투자 자문, 컨설팅 서비스를 받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뉴욕 부동산 플랫폼 코리니와 손잡고 미국 뉴욕, 캘리포니아 등 주요 지역에 위치한 오피스 등 우량한 매물을 발굴해 직접 투자를 지원한다. KB증권도 IB 소속 전문가들과 리테일 자산가 고객들을 연결해 해외 부동산 투자자문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붐이 일기 시작한 미술품 재테크 시장도 날이 갈수록 슈퍼리치 참여가 늘고 있다. 수백억원대 자산가인 D씨는 최근 그림 작품을 수집 중이다. 평소에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취미가 있는 그는 최초 소장 목적으로 수집을 하다가 ‘아트테크’가 트렌드로 부상하자 장기 투자도 염두에 두고 있다. D씨는 “관심 있는 작가의 작품이라면 기회가 왔을 때 투자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미술품 투자는 슈퍼리치들이 스스로 투자 기회를 발굴해 실물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아직 증권사를 통한 펀드 등 투자 상품이 원활히 공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품 투자 인프라스트럭처 구성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건 하나증권이다. 우선 대체투자팀이 대체 투자 자산으로서 미술품 투자를 위한 펀딩 상품을 준비 중이다.
한편 해외의 슈퍼리치들은 글로벌 공급망 재구축 등 지정학적 격변과 경기 하강 등의 우려가 불거지자 현금 비중을 늘리고 채권 대체 자산 등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미국의 컨설팅업체인 캡제미니리서치에 따르면 자산규모 100만달러 이상의 미국 슈퍼리치들의 주식 시장에 대한 노출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슈퍼리치들은 올해 초 포트폴리오의 34%를 현금, 머니마켓펀드(MMF) 등 현금성 자산으로 돌렸는데 이는 지난 2002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포트폴리오 관리 차원에서 리스크를 낮추고, 향후 자산 시장이 약세를 띠게 되면 투자 기회를 찾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8월 들어 안전자산인 미국의 채권 수익률(금리)이 4%를 훌쩍 넘어서는 점도 주식 시장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란 분석이다. 앞서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운영하는 투자전문회사 버크셔해서웨이도 현금 잔고를 1300억달러까지 늘리면서 리스크에 대비한 바 있다.
차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