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돈을 관리하는 자산관리(WM) 시장은 그동안 은행·증권사 등 전통적인 금융투자사 위주로 발전해왔다. 특히 안정적인 예·적금 위주로 투자하는 전통적인 부자들이 선호하는 은행의 자산관리 서비스는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비즈니스와이어에 따르면 2020년 자산관리를 받는 고객의 41.1%가 은행의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을 이용하고 있으며, 전체 시장점유율 상위 10개 회사 모두 대형 금융그룹이 차지하는 등, WM 시장 내 주서비스 공급자 역할을 전통적인 금융사들이 담당해왔다. 그러나 최근 고액자산가 수 증가와 함께 고객 수요가 다양해지고 요구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비전통 WM사들은 각각의 전문성을 살린 자산관리 서비스로 틈새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으로 법률·세무회사는 자산관리 과정에서 수반되는 상속·증여, 세금 관리 등의 컨설팅에 더해 자산운용 설계, 은퇴 계획까지 포괄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이 외에 핀테크사, 가상자산 거래소는 프라이빗에쿼티(PE)·디지털자산 등에 특화한 WM 플랫폼 구축을 통해 젊은 고액자산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서비스 품질에 민감한 고객들이 이에 반응하면서, 일부 수요가 전통 금융사에서 비전통 금융사로 이동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신흥 WM 플레이어들이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시장 내 경쟁은 전통 금융사를 중심으로 한 업계 간 경쟁에서 다각화된 분야를 포괄하는 입체적인 체제로 변화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국내 주요 로펌들은 고액자산가를 대상으로 법률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고액자산가라면 누구나 고민할 만한 상속·후견·세금 등의 법적 쟁점을 원스톱 서비스로 자문하는 한편 금융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자산관리 업무에까지 눈독을 들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앤장은 가사상속·자산관리팀을 운영하며 최대 규모인 30여 명을 포진했다. 개인정보 및 사생활 보호에 강점이 있는 법률사무소인 만큼 대기업 총수 일가나 유명인사 등 고객들의 의뢰가 몰리고 있다는 게 김앤장 측의 설명이다.
지난해 출범한 법무법인 세종 상속·자산관리팀은 약 20여 명의 가사·상속·조세·부동산·금융 등의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성년후견·유언증서·유언대용신탁 등 자산 승계 준비를 위한 자문은 물론 세무 업무, 세무 납부 재원 마련을 위한 부동산 매각 및 금융 자문 등 상속을 둘러싼 전과정을 다룬다.
세무 분야에 강점을 가진 율촌의 개인자산관리센터는 외국 전문 자문업체 및 국내 금융기관 VIP 자산관리 담당 부서와의 협업을 통해 가사, 세무, 가업 승계, 해외 투자 등 영역에서 심층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아예 개인 자산가의 자산관리를 통합적으로 전담하는 ‘패밀리오피스’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법률사무소도 늘고 있다. 로스차일드, 록펠러, 빌게이츠 등 영·미권 대부호 가문의 자산관리를 전담하는 전문가 그룹을 칭하는 패밀리오피스는, 단순한 자산관리뿐 아니라 자산의 사회 환원을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전문적 자문을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으로 조세 전문 법률사무소인 법무법인 가온은 지난해 상속, 증여, 신탁, 가업 승계, 후견 및 가족간 분쟁 예방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패밀리오피스센터’를 개설했다. 변호사·회계사·세무사·자산관리전문가·공익법인 전문가 등이 팀을 이뤄 서비스를 제공한다.
전통적인 금융사와 협업을 하는 곳도 있다. 법무법인 원은 미래에셋, 한국투자증권 등 금융사와 업무협약을 맺고 패밀리오피스와 자산 승계 관련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글로벌 로펌들도 관련 서비스를 특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법률사무소인 어윈미첼(IrwinMitchell)은 지난해 투자 자문회사인 ‘TWP Wealth’를 인수해 기존 제공하던 자산관리 특화 법률 서비스에서 금융업 관점의 자산운용으로 서비스 영역을 확대했다. 고액자산가들은 해외 투자와 국제 금융거래 빈도가 높아 국가 간 다른 세제·법규 등에 대한 컨설팅을 원하며, 이에 따라 법률 자문과 투자 자문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윈미첼이 제공하는 원스톱 자산관리 서비스인 ‘아임 웰스 매니지먼트(IM Wealth Management)’는 해외 자산의 취득과 관리, 국가 간 자산 이동, 절세, 해외 이주, 해외 거주 가족으로의 부 이전 등과 관련한 자문을 제공한다.
국내 한 법률사무소 관계자는 “고액자산가들은 자산의 분산 차원에서 다양한 WM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라며 “특히 젊은 부자들은 한 영역에 모든 자산을 몰아넣기보다는 여러 곳에 분산하며 다양한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글로벌 벤처캐피털 기업인 세쿼이어(Sequoia)는 보유하고 있는 스타트업 창업가 고객들을 활용해 기업 운영 관련 컨설팅부터 경영자 개인의 자산관리까지 포함한 통합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를 바탕으로 신규 고객들의 유치를 활성화한다는 계획이다.
세쿼이어는 WM 시장 내 주 고객층으로 부상 중인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개인 자산관리와 함께 창업한 회사가 필요로 하는 재무·비재무 서비스를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통합형 서비스를 선호한다는 점에 착안해, 통합 자문 서비스인 ‘인터널 프로그램(Internal program)’을 선보였다. 이 서비스는 기업 문화·채용·소비자 관리·비즈니스 모델 등 기업 운영 전반에 대한 컨설팅과 더불어, 자산운용 자회사인 ‘세쿼이어 헤리티지(Sequoia Heritage)’에서 운용하는 펀드를 통해 벤처 창업가들의 개인 자산을 관리한다.
헤리티지(Heritage) 펀드는 세쿼이어가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투자 중인 스타트업을 포트폴리오에 편입함으로써, 고객들에게 고수익의 선별적 투자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세쿼이어의 경쟁사인 앤드리슨 호로비츠(Andreessen Horowitz)에서도 유사한 서비스 출시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산관리 시장 내 VC 기업의 진출이 확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핀테크업체들의 도전도 시작됐다. 리얼블록스(RealBlocks)는 자사가 개발한 디지털 대체 자산 투자 기술을 활용해 고액자산가의 대체 투자 포트폴리오 관리를 지원하는 자산관리 플랫폼을 구축했다. PE 등 대체자산에 대한 고액자산가들의 수요는 높아지고 있지만 투자자들이 관련 정보를 취득하기 어렵다는 점에 착안해 서비스를 선보인 것이다. 리얼블록스는 개인별 PE와 부동산으로 이뤄진 맞춤형 포트폴리오를 제안하며 투자 대상에 대한 실사(Due diligence) 보고서, 정기 실적 모니터링 보고서 등을 제공해 투자의 편의성과 신뢰성을 높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곧 로보어드바이저가 퇴직연금 적립금도 굴리는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국민 일상의 편의를 제고하고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비스산업의 디지털화 전략’을 공개했다. 특히 금융 분야에서는 AI를 활용한 투자를 활성화한다는 전략의 하나로 퇴직연금에 대한 로보어드바이저의 투자일임 서비스를 규제 샌드박스로 추진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혁신금융 서비스 지정 방식으로 로보어드바이저를 활용한 자산 운용 등 핀테크 활성화에 나설 예정이다. 수익률, 안정성 등 실증 특례 성과를 고려해 향후 퇴직연금 투자일임 서비스를 제도화하는 방안도 마련한다.
은행이 독점하다시피 하는 퇴직연금 시장에 로보어드바이저 전문 핀테크 기업들이 합류할 수 있게 되면서 투자자들은 상품 선택의 폭이 넓어질 전망이다. 퇴직연금 시장을 둘러싼 각 업종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투자자 주도의 퇴직연금 시장이 열릴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로보어드바이저 전문 핀테크기업으로는 파운트를 비롯해 쿼터백, 퀀팃 등이 있다. 특히 파운트는 금융투자협회 공시 기준 올해 1분기 운용자산(AUM)이 1조5000억원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파운트의 자회사 파운트투자자문은 올해 1분기 1조5470억원의 AUM을 기록하기도 했다. 쿼터백자산운용과 퀀팃투자자문도 올해 1분기 AUM이 각각 3604억원, 28억원으로 지난해 12월 말 3580억원, 26억원에서 각각 0.69%, 7.1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암호화폐 거래소들도 디지털자산에 특화된 서비스를 출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제미니(Gemini)는 지난해 디지털자산 WM회사인 ‘비트리아(BITRIA)’를 인수하며 거래소 서비스를 넘어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한 투자 자문으로 서비스 영역을 확대했다.
비트리아가 출시한 ‘제미니 비트리아(Gemini BITRIA)’ 서비스는 투자자들이 단일 플랫폼에서 디지털자산의 거래·수탁부터 투자 자문, 세금 컨설팅까지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고액자산가들의 가상자산 투자 수요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전통 금융사들은 고객 유치 차원에서 일부 투자 관련 서비스를 출시했다”라며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아직 부재하며 투자자 보호와 평판 리스트 등을 고려해 서비스 확장에 있어서는 유보하는 태도를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모건스탠리 등 4개의 대형 금융그룹에서 가상자산 펀드를 팔고 있으나 최소 투자 기준이 높은데다 직접투자 방식을 제한하는 등 고객 투자 기준을 까다롭게 설정하고 있다.
한편 제미니 비트리아 서비스는 보유하고 있는 40여 종의 디지털자산을 결합한 다양한 모델 포트폴리오가 제공된다. 탄소배출권 기반 암호화폐 등을 활용해 투자자별 성향에 맞춘 ESG 포트폴리오 구성도 가능하다. 이혜인 우리금융연구소 연구원은 “스타트업 창업가, 인플루언서 등 고액자산가 고객군이 다양해지고 있으므로, 새롭게 부상하는 고객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차별화된 서비스를 개발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라며 “국내 금융사들도 대체 투자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이와 관련한 정보 제공 서비스와 딜 소싱 역량을 강화해 개인 투자자의 접근성과 투자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