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선택한 상품으로 적립금을 자동 투자하도록 하는 퇴직연금 사전지정 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오는 12일 도입된다. 이에 따라 퇴직연금 시장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퇴직연금감독규정 개정안이 시행되면 퇴직연금 계좌에서 디폴트옵션으로 지정한 상품의 투자 한도가 100%까지 가능해지고 디폴트옵션 상품만으로도 계좌 운용을 할 수 있게 된다. 주식형 펀드 등 위험자산 편입 비중을 70%에 묶는 제한이 사라져 실적배당상품 투자 비중을 늘릴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기존 퇴직연금은 예금과 적금 등 원리금 보장상품위주로 운용되면서 수익률이 연 1~2%대에 머물러 있었다. 노후를 대비하기에 부족한 수준이다. 하지만 디폴트옵션 도입으로 퇴직연금 장기 수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다양한 투자자산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개인형 퇴직연금
▶만기 후 운용 지시 없으면 6주 후 적용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DC)형,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가 예·적금 등 상품의 만기가 도래했는데 별도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사용자와 근로자가 사전 합의한 디폴트옵션 상품에 투자하는 제도다. 만기가 돌아오고 4주가 지나면 디폴트옵션에 투자한다는 운용 통지를 받게 된다. 이후에도 운용 지시 없이 2주가 추가 경과할 경우 실제 디폴트옵션이 적용된다. 디폴트옵션으로 운용을 하는 도중에 가입자가 원하면 직접 운용 지시로 바꿀 수 있다.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디폴트옵션이 적용되는 주요 대상이다. DC형은 기업이 매년 연봉의 12분의 1을 적립하면 근로자가 이를 직접 운용하는 구조다. 사용자와 근로자가 사전 합의한 소수의 디폴트옵션 상품군 가운데 포트폴리오는 투자 성향 등에 따라 근로자가 미리 선택할 수 있다. 디폴트옵션을 도입하려면 노사합의가 선행돼야 하는 DC형과 달리 IRP는 근로자가 개별로 가입해 여유자금을 운용하는 상품이다. 그런 만큼 가입자가 자유롭게 디폴트옵션을 지정하면 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확정급여(DB)형까지 포함한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은 총 295조6000억원에 이른다. 이 중 디폴트옵션이 적용되는 DC형과 IRP 적립금은 지난해 말 124조원 수준이다. 디폴트옵션의 적용 대상인 DC형 자금 역시 매년 늘고 있다. 2017년 42조3000억원 수준이었던 DC형 퇴직연금 적립금은 2018년 49조7000억원, 2019년 57조8000억원으로 수조원씩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말 77조6000억원까지 규모가 커졌다.
덩치는 커지고 있지만 노후 대비를 위한 충분한 수익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DC형 퇴직연금 연간 수익률은 2.49%에 머물렀다. 특히 DC형 중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투자해 거둔 연간 평균 수익률은 1.28%에 그쳤다. 반면 실적 배당형 상품에 투자해 거둔 수익률은 7.34%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퇴직연금 중 원리금보장상품 투자 금액이 255조4000억원으로 86.4%를 차지한다. 실적배당상품은 40조2000억원으로 13.6%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퇴직연금 수익률을 집계한 2015년 이후 연간 수익률이 연 3%를 넘어선 경우가 없을 정도로 저조한 실정이다.
▶은퇴 맞춰 위험자산 조절 TDF 주목
디폴트옵션이 적용되는 상품은 고용노동부 심의위원회의 심의와 고용노동부 장관 승인을 거쳐 안정성 등이 확인된 것 가운데 소수가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거론되는 대상 상품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비롯해 타깃데이트펀드(TDF), 밸런스펀드(자산 혼합형), 부동산인프라펀드 등이다. TDF는 연금투자에 최적화한 상품으로 분류된다.
TDF는 투자자의 은퇴 시점이 다가올수록 주식 비중을 줄이고 채권 비중을 높이는 식으로 위험 및 안전 자산 포트폴리오를 조정해 변동성을 낮추고 안정적인 수익률을 거둘 수 있도록 설계했다. 디폴트옵션 도입을 앞두고 TDF가 각광받으면서 최근 자산운용사들은 20·30대 직장인들을 위해 은퇴 시점이 현재로부터 약 40년 후인 ‘2060 TDF’ 상품까지 준비하고 있다.
최근 매일경제가 KB·NH·미래에셋·삼성·신한·키움·한투·한화자산운용 등 국내 8대 운용사 펀드 매니저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72%가 디폴트옵션 도입 시 가장 유망한 투자 상품으로 TDF를 선택하기도 했다. 설문에 응한 한 펀드매니저는 “생애주기에 따른 자산 배분 전략을 실행하기 때문에 퇴직연금 자금 운용 목적과 가장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디폴트옵션 도입이 임박하면서 증권·은행·보험 업계에서는 앞다퉈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시스템 개발사를 구하는 등 준비에 분주한 상황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실제 제도가 정착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디폴트옵션 상품은 고용노동부 장관의 승인을 받고 심의위원회에서 위원들이 상품 운용 기준 등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 3년마다 정기평가를 실시해 승인 지속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7월 법이 시행되어도 상품을 심의위원회에 올려서 심의를 거쳐야 한다”며 “심의가 마무리되기까지 상당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는데 업계에서는 10월은 돼야 심의가 완료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10명 중 6명은 실적배당상품 투자 의향
퇴직연금 투자 비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금 등 원리금보장상품 비중이 내려가고 퇴직연금 장기 수익률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매일경제가 삼성증권에 의뢰해 지난 5월 27~30일 DC형 퇴직연금 가입자 20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66.2%가 디폴트옵션 도입 시 가입자들의 실적배당상품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상품(31.4%)보다 선호도가 훨씬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실적 배당형 상품에 대한 투자 비중을 50~70%로 하겠다는 응답이 30.5%를 기록했고, 70%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응답도 17.6%에 달했다. 이번 조사에서 DC 가입자들은 디폴트옵션 도입 이후 연 5~7% 수익률을 기대한다는 응답이 32.9%로 가장 많았다. 연 7~10% 수익률을 기대한다는 답변 역시 21.9%에 이르렀다.
반면 실적 배당형 상품 투자 비중을 절반 이하로 두고 보수적 투자를 하겠다는 답변도 많았다. 이들이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호하는 이유로는 손실에 대한 우려(14.3%), 투자 상품에 대한 정보 부족(10.5%) 등의 이유가 컸다. 향후 가입자의 퇴직연금 운용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도 과제다. 최근 1년간 상품 운용 지시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가입자도 절반(48.6%)에 육박했다. 상품 운용을 지시한 경우도 연 1~2회(33.3%)가 많았고 연 5회 이상을 한 적극적인 가입자는 10.5%에 그쳤다.
여의도 한국투자증권 영업점에서 고객이 IRP상담을 받고 있다.
퇴직연금 운용이 어려운 이유로는 근무와 자산관리 병행 어려움(32.0%)을 가장 많이 꼽았다. 지나치게 많은 상품(17.1%)이 있어 고르기 어렵다는 답변도 많았다. 디폴트옵션 제도 정착을 위해선 수익률 및 수수료 등 상품별 정보 강화(41.0%)가 시급하다는 답변이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투자 가능 상품 다양화(21.0%), 금융사 신뢰 강화(19.0%), 가입자 교육(13.3%) 등의 답변이 뒤를 이었다.
▶예·적금에 집중하는 투자 바뀔지 주목
디폴트옵션 적격상품에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상품이 포함됐는데 여기에 자금을 묻어두는 투자 관행을 바꿀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장기투자로 운용해서 퇴직연금 수익률을 끌어 올려야 하는데 원리금보장상품이 포함돼있는 것이 걸림돌”이라며 “기존에 해오던 방식 그대로 투자할 가능성이 높고 디폴트옵션이 적용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포함시킨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우리보다 먼저 디폴트옵션과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 일본의 경우 원리금보장상품 선택 비중이 여전히 높은 편이다. 일본 기업연금연합회(Pension Fund Association)에 따르면 2017년 71% 수준이던 원리금 보장형 상품 비중은 2018년 5월 일본판 디폴트옵션 제도(지정운용방법) 도입 직후인 2018년 76.0%로 비중이 높아졌다. 여전히 원리금보장상품에 묶여 낮은 수익률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과제도 남아 있다. 사업자가 운용사의 제안이 적절한지 여부를 판단하고 최적의 상품을 검토해 근로자에게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로자들이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당국은 선택할 수 있는 핵심 디폴트 상품 숫자를 줄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입자를 대상으로 이해를 돕고 투자에 적극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부가 입법 예고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적립금액, 운용현황, 수익률, 목표수익률과 실제수익률의 비교 자료 등을 분기에 1회 이상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리금보장상품의 지정을 허용함에 따라 가입자 교육이 중요해졌고 디폴트옵션 펀드의 경쟁력 제고라는 과제를 남겼다”며 “국내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과 시행령에 적립금 운용에 대한 가입자 교육을 명시하고 있는 만큼 이 부분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