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 바람이 불고 있다.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도입, 정밀안전진단 강화, 분양가상한제 시행 등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재건축 규제를 강화하면서 노후단지 주민들이 리모델링으로 눈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소규모 단지들에서 분양가상한제를 피하기 위해 30세대 미만으로 증축하는 리모델링이 대부분이었으나 최근에는 대형 단지들에서도 리모델링을 택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공사비만 무려 1조원 이상인 리모델링 단지가 나오기도 했다. 이 같은 ‘공룡 리모델링’의 시대가 개막된 가운데, 윤석열 정부의 탄생은 리모델링 시장에 또 다른 혼란을 주고 있기도 하다.
▶대기업들의 잇단 시장 진출
지난달 말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의 사업이 본격적인 시공에 들어갔다. 주인공은 서울 강동구에 있는 선사 현대아파트다. 서울시 강동구 상암로 11번지 일원에 있는 선사현대아파트는 약 6만8996㎡ 부지에 지하 3층~지상 28층의 아파트 16개동, 2938세대의 대단지다. 단지는 수평증축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지하 5층~지상 29층의 공동주택 16개동 3328세대(390세대 증축)로 탈바꿈하게 된다. 규모뿐 아니라 사업비도 역대 최대로, 공사비만 총 1조900억원이다.
선사현대아파트는 2000년 준공돼 리모델링 건축연한인 15년을 넘어선 상태다. 기존 용적률이 393%로, 재건축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일찌감치 리모델링으로 가닥을 잡았다. 지난 2020년 리모델링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이후 3주 만에 동의율 50%를 달성한 바 있다. 3000세대 규모의 대단지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동의율을 채운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해 6월 동의율을 최종 달성해 조합설립인가를 마쳤다. 단지는 리모델링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탈바꿈된다. 부족했던 주차시설과 커뮤니티는 물론 리모델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신 트렌드의 효율적인 평면을 구성한 특화 설계가 적용될 예정이다. 더 넓어진 평면에 한강 조망이 가능한 복층형 스카이 커뮤니티 3곳과 실내골프장, 실내수영장을 포함한 대규모 커뮤니티 시설이 조성된다. 또 6개의 테마가든을 조성하고, 단지를 통하는 3.3㎞ 산책로도 들어선다. 한강 광나루공원과 연결되는 산책로로 입주자들의 주거 편의성은 크게 향상될 것으로 보인다.
선사 현대아파트 리모델링 사업의 시공사는 롯데건설과 현대건설이다. 지난해 기준 건설사 도급순위 2위와 7위에 랭크돼 있는 대형건설사들이다. 롯데건설은 앞서 지난해 리모델링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위해 리모델링 전담조직을 구성한 바 있다. 이후 용산구 이촌현대, 양천구 목동2차우성, 수원 권선 삼천리2차에 이어 올해 1월 청담신동아아파트 리모델링 사업 등 연이은 수주고를 올렸다.
현대건설 역시 지난 2020년 리모델링 전담조직을 구성했다. 3년 연속 도시정비사업 신기록을 달성할 것으로 보이는 현대건설은 현재 서울 이촌동 한가람아파트 리모델링 사업(2341세대)과 대치2단지 리모델링 사업(1988세대) 등에도 입찰한 상황이라 굵직굵직한 리모델링 사업을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뿐 아니라 삼성물산, 대우건설, GS건설, 포스코건설 등 국내 5대 건설사들 모두 최근 들어 리모델링 전담조직을 만들어 활발한 수주전을 벌이고 있다. 대우건설(도급순위 5위)은 지난해부터 리모델링 시장 공략을 본격화한 이후 올해 리모델링 수주 실적 목표를 전년 대비 40% 높인 8000억원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동부이촌동 소재 건영한가람아파트.
▶준공 후 15년 지나면 가능
아파트 리모델링이란 건물의 노후화를 막고 건물의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준공 후 일정 기간이 경과된 단지를 일부 증축하거나 개축하는 것을 말한다. 재건축과 달리 기존의 골조는 그대로 두고 나머지 부분을 개선시키는 공사다. 준공 후 30년이 지나야 할 수 있는 재건축과는 달리 리모델링은 준공 후 15년이 지나면 시행할 수 있다. 공사기간도 재건축보다 짧다. 사업기간도 평균 5년 정도로 통상 10년 이상 소요되는 재건축에 비해 추진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조합원 입장에선 집의 가치상승 시기가 더 빨라지는 장점이 있다.
대기업들이 진출하기 이전 시기의 리모델링은 가구 수가 늘어나는 형태가 아니었다. 기존 조합원 물량 외 추가로 일반분양분이 발생하지 않았던 게 최근까지의 아파트 리모델링이었다. 증축 리모델링으로 가구 수를 늘려 일반분양하기 시작한 것은 올해에 들어서다. 지난해 4월 쌍용건설은 송파 오금아남아파트에 대한 리모델링 공사에 착수했고, 지난 1월 일반분양했다.
증축 리모델링이 가능했던 것은 관련 규제가 완화돼왔기 때문이다. 2012년 주택법 개정으로 가구 수 증가형(수평증축) 리모델링이 허용됐고, 2년 뒤인 2014년에는 수직증축을 통한 세대수 증대와 세대수 증가 범위를 기존 10%에서 15%로 늘릴 수 있도록 법이 추가 개정됐다. 아남아파트 리모델링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도 법 개정 이후인 2015년이다. 이미 7년 앞선 2008년에 리모델링 조합을 설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성 부진 등의 이유로 사업 추진이 장기간 지연돼온 오금아남아파트도 법 개정에 따라 2015년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최근 리모델링 사업의 트렌드는 수직 또는 수평증축을 통해 29가구를 늘리는 방식이다. 앞서 말한 국내 최초 가구 수 증가형 리모델링 아파트인 ‘송파 더 플래티넘(구(舊) 오금아남)’ 역시 29가구를 증축했다. 기존 2개동·299가구였던 오금 아남아파트(1992년 준공)를 수평증축 리모델링을 통해 2개동·328가구로 탈바꿈 중이다. 리모델링을 통해 신규 발생한 29세대의 일반분양분에 대한 청약을 실시한 결과 무려 7만5382명이 접수한 바 있다. 2599 대 1의 경쟁률이었다.
이 단지는 수평증축을 통해 29가구를 더했다. 수평증축이란 층을 더 올리는 수직증축과 달리 아파트를 옆으로 증축하는 것으로, 라인이 추가되는 것이다. 15층 아파트인 송파 더 플래티넘의 경우 15층 라인 1개, 14층 라인 1개 등 2개 라인을 붙이는 리모델링을 했다. 수평증축은 안전진단에서 C등급 이상을 받으면 가능해 B등급을 받아야 하는 수직증축에 비해 안전진단 통과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수직증축은 건물 무게가 늘어나는 만큼 기술적인 어려움도 뒤따른다.
국내 첫 수직증축 리모델링 아파트는 서울 송파구에 있는 성지아파트다. 기존 지상 15층, 2개동, 298가구에서 지상 18층, 2개동, 340가구로 리모델링을 하고 있다. 성지아파트는 42가구를 증축하지만 이 중 일반분양은 역시 29가구다.
리모델링 아파트들이 일반분양 가구 수를 29가구로 맞추는 이유는 분양가상한제 때문이다. 현행 주택법에 따르면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 내 민간택지에서 30가구 이상을 분양하면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된다. 이에 분양가가 ‘택지비+건축비’ 이하로 제한돼 조합원들 입장에선 더 많은 분담금을 내야 해 사업 추진이 어려워질 수 있다. 반면 29단지 이하로 일반분양을 할 경우 분양가상한제 미적용으로 일반분양가를 높이 책정함으로써, 그만큼 조합원의 분담금을 줄일 수 있다. 성지아파트의 경우 일반분양가는 3.3㎡당 평균 6500만원으로, 국내 역대 최고 금액으로 책정됐다. 이 같은 이유로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서울 소재 아파트 조합들은 대부분 29가구 증축을 계획하고 있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기준 리모델링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수도권에서만 101곳이다. 서울은 58개 단지에서 리모델링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 중에는 분양가상한제 적용을 피하기 위해 29가구 이하로 증축하는 단지들이 대다수이지만, 대단지 아파트들의 경우 그 이상으로 가구 수를 늘리는 곳도 적지 않다.
지난 3월 안전진단을 통과한 성동구 ‘금호벽산(2000년 준공)’은 기존 1707가구가 지하 5층~지상 21층, 총 21개 동, 1963가구 단지로 거듭날 예정이다.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지만 이 단지의 조합은 별동 증축으로 사업성을 개선할 방침이다. 별동 증축은 동 간 간격을 좁히고 빈 대지에 신규 동을 짓는 방식이다. 공사비는 7090억원이다. 쌍용건설이 지난해 5월 수주한 ‘가락쌍용 1차(1996년 준공)’는 24층 14개 동 2064가구가 수직증축을 통해 27층 2373가구로 확대(309가구 증축)된다.
▶신축 아파트 수요 증가가 배경
리모델링 열풍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에까지 퍼지기 시작한 것은 문재인 정부에서의 재건축 규제 강화에 따른 차선책적인 측면도 있지만, 신축 아파트에 대한 수요 증대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난해 부동산 리서치업체 리얼투데이가 신축과 구축 아파트의 가격 차이를 분석한 결과, 전국 5년 이하 신축 아파트의 3.3㎡당 평균 매매가격은 2288만원으로 4년 전인 2017년(1334만원)보다 954만원(72%) 올랐다. 같은 기간 10년 초과 아파트는 1215만원에서 1718만원으로 503만원(41%) 상승하는 데 그쳤다. 신축과 구축 아파트 간 가격이 평균 119만원에서 570만원으로 4년 새 5배 가까이 벌어진 것이다. 조합원들 입장에서는 재건축에 비해 경제성은 떨어지지만 리모델링을 통해 상대적으로 빠른 시일 내 가치상승을 노릴 수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리모델링 바람이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윤석열 정부가 재건축 규제 완화를 추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분양가상한제, 재건축 부담금, 안전진단 등 정비사업 관련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해 도심 주택 공급을 촉진시키겠다고 국정과제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리모델링은 어찌됐던 재건축이 힘든 단지들이 선택하는 제2의 옵션이다. 재건축 규제가 완화되면 리모델링을 추진하던 곳들이 다시 재건축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장은 어려울 것이다. 재건축을 규제하고 있는 사안들이 대부분 법률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라 아직 더불어민주당이 다수인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여기에 규제 완화 공약 영향으로 대선을 전후로 강남과 1기 신도시 노후 단지들의 집값이 다시 급등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는 점도 정부로선 부담이다.
새로 취임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재건축 규제 완화와 관련해 “시장 가격을 자극할 수 있는 요인에 대해선 매우 면밀하게 시장을 보면서 탄력적으로 대응해 나가겠다”며 거듭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당분간 빠른 정비를 원하는 조합들이나, 재건축 사업성이 떨어지는 소규모 단지들 사이에서는 리모델링으로 입장을 고수할 가능성이 크다. 단 재건축 연한이 도래하고 있는 1기 신도시들은 정부가 ‘1기 신도시 특별법 제정’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규제 완화 방침을 밝힌 바 있어 리모델링을 추진하던 단지들이 대거 재건축으로 선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건축 규제 완화에 대한 불확실성에 아파트 주민들 간 갈등이 표출되는 곳들도 나오고 있다. 강남권 최대 리모델링 단지인 대치2단지(1992년 준공·1758세대)는 리모델링 조합이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건축 추진위원회가 설립됐다. 이미 리모델링 시공사 선정까지 완료된 상황에서 재건축 규제 완화를 공약으로 내건 정부가 집권하자 일부 조합원들이 재건축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한 정비사업장에 둘 이상의 조합은 있을 수 없어 향후 법적 공방이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원장은 “정비사업은 결국 정책에 좌우되는 것”이라며 “시행령이나 시 조례로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빠른 속도로 정책을 추진해나가야 혼란이 줄어들면서 원활한 도심 내 주택 공급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