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집무실 이전 계획으로 ‘대한민국 용산 시대’ 개막이 눈앞에 다가왔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용산공원뿐만 아니라 용산정비창(국제업무지구), 한남뉴타운 재개발, 경부선·경의선 지하화 등 그동안 장기 지연돼 왔던 개발 현안들이 새로 탄력을 받을 것이란 기대가 크다. 도시계획 전문가들도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용산 개발에 대한 마스터플랜(종합 개발 계획)을 수립해 국가 경쟁력 강화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는 조언을 내놓고 있다.
부동산 시장 역시 새로운 움직임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앞두고 용산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다만 섣부른 기대감은 금물이다. 지난 20년간 우여곡절을 겪은 용산 개발의 역사는 이를 방증한다. 국제업무단지는 2007년 추진된 이후 정치·경제적 변화 끝에 사실상 ‘백지화’됐고, 서울시와 정부가 ‘한국판 샹젤리제’ 거리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광화문과 용산, 한강일대 국가상징거리 조성도 소리 소문 없이 동력을 잃었다.
실제 국제업무지구 조성 준비가 한창이던 2010년을 전후해 용산은 강남을 넘어 부동산 투기 1번지가 됐다. 개발호재를 틈타 지분 쪼개기 등이 기승을 부렸고 일부 지역은 지분 가격이 3.3㎡당 2억원을 넘기도 했다. 개발 계획이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어그러지면서 수많은 투자자들이 속앓이를 했던 상황이 재현될 우려도 여전하다. 그래도 용산이 서울에 마지막 남은 ‘미완의 땅’임에는 분명하다. 부동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서울의 도시 경쟁력과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언젠가는 개발될 땅이라는 공통된 평가가 나온다.
경부선·경의선 지상 철로로 인해 교통섬처럼 사방이 막혀 있는 용산역 일대.
▶국가상징거리로 조성
이미 용산은 용산공원뿐만 아니라 용산정비창(국제업무지구), 한남뉴타운 재개발 등 대규모 개발과 경부선·경원선 철도 지하화 등 지역 인프라스트럭처 조성에 대한 밑그림이 나와 있다. 알려진 계획만 제대로 실천돼도 단군 이래 ‘최대 도심 개발 사업’이라고 불리는 데 손색이 없을 정도다.
용산공원은 서울의 숨통을 틔워줄 ‘도심의 허파’다. 용산기지가 있던 자리를 300만㎡ 규모의 공원으로 조성하는 이 사업은 이미 특별법까지 마련돼 있다. 평택 캠프 험프리스 기지로 미군이 거의 다 이전하면서 조금씩 반환에 속도가 붙고 있는 상태다. 올해 상반기 중으로 전체 부지의 4분의 1이 반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 집무실 이전과 용산공원 조성이 맞물리면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내셔널몰(National Mall)’과 같은 형태의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진단한다. 집무실 이전이 정치적으로 좋고 나쁨을 떠나 도시에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역사와 문화, 자연과 생태, 정치와 행정에 이르기까지 도시 계획에 담아낼 소재가 더욱 풍부해졌다는 얘기다.
내셔널몰은 워싱턴DC의 중심으로 서쪽 끝 링컨 기념관에서 동쪽 끝 연방의사당까지 약 3.5㎞다. 이 축에는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건물들이 위치해 있다. 가장 높은 언덕에는 국회의사당이, 두 번째로 높은 곳에는 백악관이 위치해 있다. 실제 세계 정세를 주도하는 백악관과 미국 연방의회는 도시 공간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는 200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가 하면, 백악관의 새 주인을 환영하는 날이면 형형색색의 불꽃이 내셔널몰의 하늘을 수놓곤 한다. 1963년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이곳 링컨 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지난 21년간 서울의 각종 도시설계 용역을 맡아온 김현오 디에이건축 대표는 “용산 개발은 나온 지 20년도 더 된 이야기이지만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고, 계획 수립시점마다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돼 온 측면이 있다”며 “특히 용산공원은 문화와 생태 중심의 공원으로 계획돼 있었는데,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이 이쪽으로 옮겨오게 되면 문화와 역사, 행정이 함께 녹아든 공간으로 조성이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67조원 가치 한국판 샹젤리제 눈앞
용산 정비창 부지에 개발되는 국제업무지구도 빼놓을 수 없는 용산의 대표적인 개발 과제다. 2007년 나온 국제업무지구 조성안에 따르면 전망대를 갖춘 높이 620m, 111층의 초고층 업무시설과 62층 규모의 6성급 호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와 레지던스 빌딩 등 50층 이상의 건물 16개가 빼곡히 들어선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용산 국제업무지구의 경제가치는 약 67조원, 고용 창출효과는 3만 명에 달한다.
용산 정비창 일대는 오세훈 시장이 1기 시장 재임 시절 국제업무지구로 개발하려던 곳이었지만 박원순 시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2012년 좌초됐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내외 경제 환경이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사업 동력을 잃었다. 사업이 다시 탄력을 받은 것은 지난해 4월 서울시장 선거 이후다. 지난해 7월 서울시는 용산 전자상가를 용산정비창과 연계해 개발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용산정비창 용지에 조성하려는 국제업무지구 사업도 속도를 내기로 했다.
지난해 하반기 진행하기로 했던 용산국제업무지구 마스터플랜 국제설계공모를 열지 않고 곧바로 가이드라인을 내놓는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이미 국제업무지구 개발 가이드라인에 대한 용역 결과는 서울시가 가지고 있다. 세부 조율 이후 발표만 남은 상태인데, 오는 6월 지방선거 이후 관련 논의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시가 쥐고 있는 또 다른 용산 개발 구상은 국가상징거리다. 2009년 서울시와 정부는 서울 도심의 중심축을 되살리고 국가를 상징할 만한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것을 목표로 광화문과 한강에 이르는 7㎞ 거리를 ‘국가상징거리’로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하지만 이후 정치권의 지형 변화와 함께 동력을 잃었다.
서울시가 지난해 6월 ‘광화문광장 보완·발전 계획’에 국가상징거리 조성 계획을 포함하면서 불씨를 되살렸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용산 집무실 이전을 공식화하면서 기대감이 커진 상태다. 서울시가 맡긴 용역 결과는 8월에 나올 예정인데, 국가상징거리 조성 방안 역시 지방선거 이후 가시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서울시의 연구 용역 결과는 지난 2009년 서울시와 정부가 공동으로 수행한 용역 결과와 큰 틀에서 맥을 같이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계획은 ▲광화문권역(경복궁~청계천)의 국가역사문화 중추 공간 ▲시청권역(청계천~숭례문)의 수도 도시문화 중심 공간 ▲서울역권역(숭례문~서울역)의 국가 수도 관문·교류 공간 ▲용산권역(서울역~노들섬)의 미래 신성장동력 공간 등으로 구성됐다.
▶경부선·경의선 지하화
용산 일대 교통 인프라스트럭처 역시 개선 기대가 크다. 용산은 서울의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철도, 100년 넘게 주둔한 외국군 기지 등 때문에 교통흐름이 기형적으로 왜곡돼 있다.
실제로 용산은 서울에서 철도가 지상으로 다니는 구간이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다. 기찻길 양 옆으로 지역이 단절되면서 도시 노후화도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국토연구원이 조사한 전국 도시 쇠퇴 지역 현황(2014년 기준)에 따르면 용산구는 서울 25개구 가운데 3위였다. 1, 2위를 기록한 중구와 성동구도 비슷한 문제를 가진 지역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재보궐 선거에서 핵심 공약으로 ‘용산 링킹파크(Linking Park)’를 강조했다. 용산 링킹파크는 용산미군기지 부지에 들어선 용산공원 하부에 주요 간선도로가 모이는 교통결절점(여러 기능이 집중되는 접촉 지점)을 만드는 계획이다. 프랑스 파리 외곽의 신도시 라데팡스 지하에 고속도로, 지하철, 일반도로 등이 만들어진 것과 비슷한 모델이다.
1989년 건설된 라데팡스는 파리의 부도심 역할을 하지만 당시 개발이 엄격하게 제한된 탓에 교통 기능을 지하로 집중시켰다. 서울시 구상에 따르면 용산 링킹파크는 서울 주요 간선도로와도 연계성이 높다. 한남IC부터 지하화된 경부고속도로는 한강을 거쳐 용산 지하로 이어지고, 강변북로 등도 연계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경부선과 경의선 지하화도 유력한 교통 개선안으로 꼽힌다. 이정형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는 “경부선 철도 가운데 서울 도심구간을 가로지르는 게 18㎞가량 되는데 이 중에서 14㎞ 지하화가 가능하다”며 “비용은 용산정비창 개발, 역세권 개발 등 민간 개발을 유도하면 공공 재원 투입 없이 민간수익으로 자금을 충당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철길 폭이 30m 정도 되는데 지하화가 이뤄지면 해당 길이만큼의 공원 등을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주변 개발도 촉진된다”고 설명했다. 이촌동 일대를 가로지르는 경의중앙선 역시 지하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구간이다. 이 교수는 “이촌동과 국립박물관이 지상으로 연결돼야 하는데 경의중앙선 때문에 완전히 단절됐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용산 국방부 청사를 직접 답사하고 있다.
▶용산 링킹파크 계획도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앞두고 용산 부동산 시장은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다. 집무실 이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용산 국제업무지구, 국가상징거리, 용산공원, 경부선·경의선 지하화, 한남뉴타운 개발 등 그동안 장기 지연돼 왔던 용산 지역 내 개발 현안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오는 것이다. 집주인들은 시장에 내놨던 매물을 거둬들이거나 매도 호가를 상향 조정하며 대응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시스템에 따르면 3월 18일 용산구 서빙고동 신동아 아파트 전용 140㎡(10층)은 40억5000만원에 신고가를 경신했다. 지난해 7월 거래된 같은 전용 물건(13층)의 거래 가격 33억원보다 7억5000만원 오른 가격이다. 이촌동 래미안첼리투스 전용 124㎡ 매물은 지난 4월 11일 매도 호가를 49억원에서 50억원으로 1억원 올렸다. 한강변 최고 68층으로 재건축을 준비 중인 한강맨션도 전용 120㎡(2층)이 지난 1월 43억원에 신고가 거래됐는데 현재 같은 전용 매물의 호가 중 최저가는 43억원이다. 46억원에 나온 매물은 3월 24일 호가를 1억원가량 올렸다.
이촌동 A공인중개사 대표는 “연초에 급매물도 이따금씩 나왔는데, 지금은 집주인들이 매물을 거둬들이는 상황”이라며 “그나마 있던 매물도 매도자들이 5000만원에서 1억원씩 호가를 높여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용산 부동산 시장 움직임은 부동산 관련 통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2월 중순(14일)부터 3월 21일까지 6주 연속 하락세를 보이던 용산구 아파트 매매 가격은 3월 말부터 상승세로 돌아섰다. 민간 기관인 부동산R114 조사에서는 용산구 아파트값이 대선 직후 한 달 동안 0.38% 올라 서울에서 상승률이 가장 높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청와대 이전 계획에 용산구뿐만 아니라 종로구의 아파트 가격도 꿈틀거리고 있다. 청와대 부지 개방에 따른 녹지 공간 증가, 집회·시위 감소 등에 따라 주거 환경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으로 풀이된다.
KB부동산 주간주택시장동향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아파트 매매가격은 지난 3월 둘째 주부터 5주 연속 상승했다. 지난해 12월 말부터 올해 2월 말까지 증감률이 0%에 머물렀던 것과는 대비되는 움직임이다. 강북에선 같은 기간 5주 연속 상승세를 기록한 자치구는 종로구와 용산구뿐이다.
주요 아파트 단지 중 하나인 ‘경희궁자이’에선 신고가 사례가 나왔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경희궁자이3단지 전용면적 84㎡는 3월 6일 20억8000만원에 거래됐다. 같은 평형이 지난해 8월 19억7000만원에 거래됐던 것과 비교하면 1억1000만원이 올랐다. 경희궁자이3단지 전용 45㎡ 역시 3월 21일 직전 신고가 대비 4500만원 오른 12억3500만원에 거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