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 발발 이후 비트코인으로 대변되는 가상자산이 재평가되고 있다. 변동성이 심한 투기적 자산 혹은 역사상 최고의 거품이라는 평가가 여전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의외의 쓰임새가 발견돼 향후 확장성이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느닷없이 가상자산이 떠오른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의 행보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행한 대가로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각종 규제로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중 금융 규제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퇴출에 따른 파장이 만만치 않은데, 여기서 퇴출이 되면 국가 간 금융 거래가 막히게 된다. 사실상 글로벌 기축통화인 달러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러시아가 충분한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달러를 주고받을 수 없게 됨에 따라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 러시아는 대외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는 디폴트 우려에 직면한 상태다.
국가뿐만 아니라 러시아 국민들도 이 같은 규제에 힘겨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서방의 규제로 러시아 화폐인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는가 하면,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켜 생필품 가격도 폭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 국민 입장에서 보면 현금을 보유하면 할수록 손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러시아에서는 생필품은 물론 각종 명품, 보석 등을 사재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상자산이 떠오르는데, 이 같은 상황에 대한 ‘헤지’로서 러시아 일부에서 비트코인을 사재기 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이 제약된 환경하에서 루블화의 이동은 불가능하지만 비트코인은 자유롭게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해 러시아 내에서 암호화폐에 대한 선호도가 강해지고 있다. 비트코인의 출발점이 탈중앙화였던 것을 감안할 때, 러시아 내의 이 같은 분위기는 엉뚱한 데서 가상자산의 장점이 발휘된 셈이다.
▶전쟁 중 뜬 비트코인
이론적으로라면 러시아는 자유로운 비트코인의 이동을 통해 갚아야 할 결제대금을 지불하거나 해외 자산 구입 등을 막힘없이 할 수 있다.
실제 러시아 부호들 가운데서 이 같은 움직임이 엿보이는데, 이들은 비트코인을 구입해 해외로 보낸 후 아랍에미리트 등에서 고급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거래 상대방도 가상자산 거래를 용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랍에미리트는 러시아의 경제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의 이 같은 움직임에 화들짝 놀랐다. 러시아의 돈줄을 막아 전쟁을 중단시키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서방은 즉각 주요 가상자산 거래소들에 대해 제재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거래가 이들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 거래소들은 이 같은 국제사회 움직임에 곤혹스러워 했다. 서방의 제재 요구에 발을 맞추자니 비트코인이 지향하는 탈중앙화의 가치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초기 흐름은 반발 분위기가 뚜렷했다.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바이낸스는 “(러시아 국적이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이 이유 없이 피해를 당하게 할 수 없다”며 거부 의사를 명확히 했다. 가상화폐의 지향점인 탈중앙화와도 배치된다는 뜻도 강조했다.
브라이언 암스트롱 코인베이스 CEO도 트위터를 통해 “일부 평범한 러시아인들은 자국 통화가 붕괴된 상태에서 가상화폐를 생명줄로 사용하고 있다”며 “이들 중 상당수는 국가가 하는 일에 반대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전면 금지를 하게 되면 이들까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도 종국에는 당국의 압박에 밀리는 모습이다. 바이낸스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미국과 유럽의 제재 명단에 올라 있는 러시아인들의 계좌는 동결했다. 암스트롱 CEO도 “관련 규제가 이뤄진다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가상화폐 거래 시장은 서방 주요국들의 제재 의사에 크게 흔들렸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후 비트코인 가격은 10% 넘게 크게 하락했다. 하지만 지금은 하락 폭을 만회한 수준이다.
현재 이 문제는 가상화폐 업계에서 뜨거운 화두가 돼 있다. 국가의 간섭 없이 탈중앙화된 시스템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만들겠다고 나선 비트코인의 이념을 중시해야 하느냐, 아니면 러시아의 국제적 폭거에 지향점을 잠시 접어야 하는가를 두고 말이다.
일단 상황은 비트코인에 불리하지 않은 모양새다. 금융망이 무너진 상태에서 ‘돈’이 블록체인망을 통해서 오갔다는 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개릭 하일만 런던정경대 연구원은 “기존 거래 시스템이 붕괴돼 이용하지 못할 때에도 인터넷만 되면 거래가 가능하다는 게 블록체인 시스템의 약속”이라며 “이번 사태로 가상자산의 가치 중 일부가 증명되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현금인출기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
여기에 더해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디지털 머니의 긍정적 효과도 나타났다.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 세계를 향해 도움을 요청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가상화폐 기부였다. 우크라이나의 금융망도 자국 계엄령에 따라 쓸 수 없게 돼 블록체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우크라이나 호소에 국제사회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단 2주 만에 660억원이나 모였다. 현재도 계속 그 액수는 늘어나고 있다. 러시아와 물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이지만, 가상세계에서는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항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사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비트코인이 사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암호화폐가 사용될 수 있는 글로벌 기반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전쟁 전 우크라이나에서 암호화폐 사용 수준은 최고였다. 전쟁에서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는 점이 특이한 것이지, 암호화폐 사용 자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암호화폐 사용 기반이 확산될수록 기존 글로벌 결제 금융망의 입지는 좁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가상화폐와 관련해 한 가지 더 주목할 부분이 있다.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현 글로벌 금융 체제의 종말을 가속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급진적 견해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 동조하는 시선들도 만만치 않다.
▶글로벌 금융체제까지 위협할까
이 같은 인식의 출발은 러시아의 막대한 외환보유고에 대한 동결이었다. 강대국에 속하는 러시아마저도 서방의 제재로 쌓아놓은 달러를 써보지도 못하고 파산 직전으로 내몰리는 상황은 주요 선진국을 제외한 각국에 상당한 충격을 던졌다. 이는 신뢰할 수 있는 달러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상황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눈 밖에 나면 자신들도 유사한 상황에 언제든 내몰릴 수 있다는 사실은 달러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달러를 기반으로 하는 현 국제 금융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다.
이와 관련해 미 연방준비제도 출신인 졸탄 포자르 크레디트스위스 전략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돈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면서 “현재의 글로벌 금융 결제 시스템인 브레튼우즈2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브레튼우즈3 체제란 새로운 금융 질서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브레튼 우즈3 체제는 달러가 아닌 금이나 실물화폐(Commodity money)로 뒷받침된다. 만일 현실화된다면 달러는 기축통화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달러를 무한정 찍어내면서 가졌던 미국의 국제통화 질서를 유지시키는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비트코인이 주목을 받는다. 비트코인과 관련된 시선 중 ‘인류 역사에서 불변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금의 대체재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 있는데, 변동성이 크긴 하지만 탄생 초기와 달리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으로서의 위상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그는 “만일 생존하기만 한다면, (새 금융 체제하에서) 비트코인이 수혜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물 상품으로 가치가 공고해지면 ‘상품 기반 국제 금융 체제’에서 비트코인이 부각될 수 있단 뜻이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 고객센터의 모습.
한 가상자산 전문가는 “상당히 파격적인 전망이지만, 실현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라면서 “현재 비트코인의 가장 큰 단점인 가격 변동성은 덩치가 계속 커지면서 해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크립토 유입이 증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는 기존 화폐에 대한 대안으로써의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정석문 코빗 리서치센터장은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해서 기존의 전통 금융 시스템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린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됐다”면서 “앞으로 비트코인의 탈중앙화란 본연의 기능은 더욱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같은 국제사회의 ‘통화’를 향한 기류가 마냥 편할 리가 없다. 자칫하다가는 글로벌 패권국의 위치 또한 흔들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도 그동안 관망만 해왔던 디지털 통화에 대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한창인 와중에 친시장적인 가상화폐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이 출발점이다. 행정명령은 재무부를 비롯한 정부 기관들에 디지털 달러를 만들기 위한 연구에 긴급성을 부여하면서 디지털 달러의 편익과 잠재적 위험을 연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소비자 보호, 금융적 수용성, 불법활동 활용 가능성 등에 대해 조사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디지털화폐 주도권 다툼 본격화
백악관은 이 같은 행보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 화폐의 주도권 다툼과 무관하지 않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미 상용화에 들어선 중국 디지털 위안화와의 경쟁에 대해 당국자들은 “(미국 달러는) 국제 화폐제도 전체의 안정에 중요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면서 “(디지털 위안화 등이) 이러한 지배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의 움직임이 늦었다는 지적에는 “이 방향으로 가는 함의가 심오한 만큼 분석에 매우 신중했다”고 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바이든 대통령의 디지털 화폐 관련 행정명령에 “역사적”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FT는 이번 우크라·러시아 전쟁에서 크립토가 쓰인 것 관련해 2011년 아랍의 봄의 단초가 됐던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의 사용과 비슷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부각된 암호화폐의 쓰임새가 나비의 날갯짓이 될지, 아니면 일회성 이벤트로 그칠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