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오랜 ‘아픈 손가락’으로 꼽혀온 파운드리가 반등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수년간 대규모 적자를 이어오며 실적의 발목을 잡았지만 올해 들어 생산효율이 개선되고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중심으로 신규 물량이 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파운드리 사업은 대규모 설비투자가 선행되는 장치산업인 만큼 생산라인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채우느냐가 수익성을 좌우한다.
고객 물량이 부족하면 막대한 감가상각비와 고정비를 감당하기 어렵지만, 반대로 수율이 안정되고 주문이 늘어 가동률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손익이 빠르게 개선될 수 있다. 최근 삼성 파운드리를 둘러싼 기대가 커지는 것도 그동안 수익성을 짓눌렀던 요인들이 하나둘 해소되는 신호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 반도체 시장의 급성장은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에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와 팹리스들이 AI 가속기와 고성능컴퓨팅(HPC)용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면서 첨단 파운드리 생산능력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1위 TSMC의 첨단공정 생산능력이 빠듯해지는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안정적인 양산 능력을 입증한다면 신규 고객을 확보할 여지도 커질 수 있다.
시장에서는 삼성 파운드리가 수년간 이어진 적자 터널의 끝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전망도 나오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역시 지난 7월 2분기 실적 콘퍼런스 콜에서 파운드리 흑자전환 시점에 대해 “수주 산업의 특성상 정확한 시점을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가까운 시일 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
AI 수요를 등에 업은 메모리가 삼성전자 반도체 실적을 끌어올리는 가운데 파운드리의 회복 여부가 향후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의 또 다른 실적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실적 개선에 힘을 보태는 것은 4나노 공정의 신규 물량 확대다. 엔비디아가 AI 추론용으로 내놓은 ‘그록3(Groq 3)’의 언어처리장치(LPU)가 삼성전자 4나노 공정에서 본격 양산에 들어가면서다.엔비디아는 지난 8월 그록3 LPX가 고객사를 확보하고 양산 단계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그록3 LPX는 LPU 256개를 하나의 랙으로 구성한 AI 추론 가속 시스템으로, 핵심 LPU 생산을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맡게 됐다.
삼성과 엔비디아의 파운드리 협력은 지난 3월 열린 ‘GTC 2026’에서 공개됐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기조연설에서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통해 그록3 LPU를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도 행사장에서 그록3 LPU 4나노 웨이퍼 실물을 공개했다. 삼성전자 부스를 찾은 황 CEO는 해당 웨이퍼에 ‘GROQ SUPER FAST’라는 문구를 직접 적고 서명을 남기기도 했다.
AI 반도체 주문이 늘면서 4나노 생산라인에도 활기가 돌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 실적 발표에서 선단공정 라인의 가동률이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고 밝힌 데 이어, 2분기 실적 발표에서는 하반기 4나노 기반 LPU와 HBM 베이스다이 제품 판매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그록3를 비롯한 신규 AI 물량이 실제 양산으로 이어지면서 그동안 낮은 가동률에 시달렸던 파운드리 사업에도 변화가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록3 양산은 물량 자체뿐 아니라 삼성 파운드리가 글로벌 AI 반도체 고객의 선단공정 제품을 생산하는 레퍼런스를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동안 엔비디아의 핵심 AI 반도체 생산은 TSMC에 집중돼 있었지만 삼성전자가 그록3를 통해 엔비디아 AI 반도체 공급망의 생산 파트너로 이름을 올리면서 향후 후속 제품으로 협력을 넓힐 가능성도 주목된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도 지난 6월 엔비디아와 차세대 그록 제품을 포함한 파운드리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가동률 상승과 함께 선단공정 수율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수율은 한 장의 웨이퍼에서 생산한 반도체 가운데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제품의 비율이다. 수율이 높아질수록 같은 웨이퍼에서 판매할 수 있는 칩이 늘어나기 때문에 제조원가는 낮아지고 수익성은 높아진다. KB증권 추정치에 따르면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4나노 생산 수율은 80% 이상으로 안정화됐고, 2나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 수율도 70% 이상으로 높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2나노 수율은 연초 50% 미만에서 빠르게 개선됐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도 파운드리 사업의 실적 개선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회사는 지난 7월 2분기 실적 발표에서 HBM 베이스다이 수요와 미국 고객사의 주문 증가 등에 힘입어 파운드리 실적이 전분기보다 크게 개선됐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하반기 미국과 중국 고객의 전 공정에 걸친 수요 증가에 힘입어 파운드리 매출을 두 자릿수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4나노가 당장의 실적 회복을 이끌고 있다면 2나노는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중장기 경쟁력을 좌우할 승부처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AI와 HPC 분야를 중심으로 2나노 고객 기반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회사는 지난 2분기 실적 발표에서도 주요 고객사의 신규 수주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특히 2나노 HPC 분야에서 고객사와의 협력이 늘고 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고객은 테슬라다.
삼성전자는 테슬라의 차세대 AI 칩 생산을 맡으며 대형 고객 물량을 확보했다. 업계에서는 테슬라의 차세대 AI5 칩이 삼성전자 2나노 공정을 기반으로 생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현지 생산을 앞세워 북미 AI 반도체 고객을 확대하는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전자 테일러 공장은 내년 본격 가동을 앞두고 있다.
브로드컴과의 협력도 확대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브로드컴은 지난 7월 메모리와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을 아우르는 전략적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삼성전자의 2나노 이하 공정을 브로드컴 제품에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첨단 패키징까지 협력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최근에는 한동안 삼성 파운드리와 거리를 뒀던 퀄컴과의 협력 재개 가능성도 주목받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퀄컴은 2나노 공정을 활용한 차세대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생산을 놓고사양과 가격, 공정 최적화 등을 논의하고 있다. 다만 아직 계약이 확정된 단계는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 입장에서 이들 고객 확보의 의미는 2나노 시장에서 양산 레퍼런스(공급 이력)를 얼마나 빠르게 쌓느냐에 있다.
TSMC가 애플과 엔비디아, AMD 등 대형 고객을 기반으로 선단공정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만큼 삼성전자도 글로벌 AI·HPC 고객을 추가로 확보해야 격차를 좁힐 수 있다. 테일러 공장의 본격 가동 역시 북미 고객 확보를 위한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관심은 삼성 파운드리가 수년간 이어온 적자에서 언제 벗어날지에 쏠린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사업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별도로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파운드리와 시스템LSI를 합친 비메모리 사업이 최근 수년간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업계 추정치를 종합하면 영업손실은 2023년 약 2조5000억원에서 2024년 5조원대로 확대됐다.
시장에서는 올해 들어 파운드리의 손익 흐름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AI 반도체를 중심으로 선단공정 물량이 늘어난 데다 HBM 베이스다이 수요까지 가세하면서 실적 개선에 힘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흑자전환 시점을 앞당겨 보는 전망도 나온다. 4나노 LPU 양산 확대와 수율 안정화 등을 근거로 올해 3분기 부터 파운드리 사업의 흑자전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다.
파운드리의 턴어라운드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전체의 실적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동안 메모리에서 벌어들인 이익의 일부를 비메모리 사업의 손실이 깎아먹는 구조가 이어졌지만 파운드리 까지 안정적인 수익을 내기 시작하면 DS부문의 이익 체력은 한층 높아질 수 있다. 다만 실적 회복과 별개로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와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는 72.5%의 점유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반면 삼성전자는 5.9%로 2위에 머물렀다. 양사의 점유율 격차만 66.6%포인트에 달한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흑자전환을 넘어 본격적인 경쟁력 회복을 입증하려면 선단공정 수율 안정과 함께 대형 고객을 추가로 확보해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업계 관계자는 “AI 수요를 등에 업은 메모리가 실적을 끌어올리는 상황에서 파운드리까지 적자 고리를 끊는다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이 메모리와 비메모리 양쪽에서 동시에 이익을 내는 구조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