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은 오랫동안 분업의 정점에 서 있는 산업이었다. 아이디어 구상, 시나리오 작성, 콘셉트 아트, 촬영, 편집, 음향, 배급에 이르는 각 단계가 모두 전문 인력과 고비용, 긴 시간을 요구하는 복합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지난 2년간 AI가 도입되어 기획부터 후반 작업까지 작업체계를 재구성하는 실험이 지속되고 있다.
해외에서는 영화사와 AI 회사의 직접 파트너십이 산업의 주된 흐름이 됐다. 2024년 9월 라이언 스게이트는 런웨이와 협약을 맺고 자사 보유 영화·TV 라이브러리를 학습 데이터로 제공해 자체 AI 모델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2만 편 이상의 라이언스게이트 카탈로그로 훈련된 이 커스텀 모델은 다른 런웨이 사용자는 접근할 수 없는 전모델로, 사전 제작과 후반 작업 양쪽에 활용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협업이 1년 만에 난관에 부딪힌 사실도 함께 알려졌다. 미국의 영화 전문 매체 더 랩에 따르면, 영화 제작에 AI를 활용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라이언스게이트는 그동안 영화 <헝거게임>, <존 윅>, <트와일라잇>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배급해 왔다. 하지만 AI 모델을 생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영상 생성 AI 모델을 만들기 위해선 훨씬 더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산업에 AI 적용은 아직 실험단계임을 드러낸다.
영상 생성 AI 도구들의 성패도 갈리고 있다. 현재 런웨이는 빠른 생성 속도와 캐릭터 일관성, 에디터 중심 워크플로로 영화 제작자들이 선호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구글 Veo 3.1은 한 번의 생성 패스에서 영상·음향·자연스러운 대사까지 함께 만들어 내는 점이 강점이며, 쿠아이쇼우의 클링 3.0 옴니는 다국어 립싱크와 멀티 샷 시퀀스 통합 오디오로 차별화된다. 반면 오픈AI는 2026년 3월 소라 웹·앱 서비스를 4월 26일에, 소라 API를 9월 24일에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AI로 생성한 화려한 영상 데모를 자랑했으나, 실무에 적용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내 AI 영화의 출발점은 권한슬 감독의 <원 모어 펌킨(One More Pumpkin)>이다. 2024년 2월 제1회 두바이 국제 AI 영화제에서 500여 편의 출품작 중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2관왕에 올랐다. 모든 장면과 인물, 음성이 실사 촬영이나 CG 보정 없이 오직 생성형 AI 기술을 적용해 5일 만에 완성했다.
사극 단편 <시구문>은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촬영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유형준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의 AI 영화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돼 공동 연출자 3명, 아티스트 2~3명, 음악감독, 배우 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기획 당시 AI 툴로 한복·한옥·상투 같은 한국적 요소를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시나리오를 다듬는 사이 모델이 업데이트되며 한옥마을 사진 한 장만으로 배경을 합성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실제 광희문, 남산골 한옥마을 등을 촬영하고 사극용 소품으로 갓, 한복 등을 고증한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서는 서울국제AI영화제(SIAFF), 서울 글로벌 AI 필름 페스타(SGAFF),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AI 영화’ 부문, 경기콘텐츠진흥원의 대한민국 AI 콘텐츠 어워즈(구 대한민국 AI 국제영화제) 등이 발표 무대 역할을 하고 있다.
도구가 분화하고 기술이 매 분기 갱신되는 가운데, 영화계는 아직 표준화된 워크플로를 갖지 못한 상태다. 한국 스타트업 모피어스 스튜디오의 통합 플랫폼 ‘에이크론’은 노드 기반 캔버스에 200여 종의 AI 모델을 모아 한 화면에서 조합해 쓸 수 있게 했다. VFX(시각효과) 프로듀서로 100편 가까운 영화에 참여해온 이수영 대표는 노드 캔버스를 “30년간 영상 실무자들이 써온 작업 문법”이라며 강점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있다. 노드 방식이 VFX 출신에게는 익숙하지만, 다른 영화 제작자들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유형준 감독의 팀이 가장 많이 쓰는 도구는 의외로 디자인 협업 툴 노션, 피그마다. 노션으로 제작 스케줄과 업무 분단을 관리하고, 피그마에 ‘시구문’ 제작 과정에서 실사 사진, AI 콘티, 프롬프트 등을 모아두고 팀원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AI 영상 제작의 진짜 페인 포인트는 영상을 빠르게 만드는 게 아니라, 스태프들끼리 같은 결과물을 공유하면서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VFX 1세대인 모팩스튜디오 장성호 대표는 또 다른 답을 내놓는다. 그는 생성형 AI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대신, 기존 파이프라인의 각 단계마다 자체 개발 AI를 끼워 넣는 방식을 택했다. 지금 수준의 생성형 AI는 연속성있는 스토리텔링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상 AI 기술은 6개월마다 한 세대씩 갈아치워지고 있다. 산업은 그 속도 안에서 도구의 표준이 아니라, 도구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릴 협업의 문법을 찾고 있다.
[박수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