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병오년(丙午年)을 앞두고, 한국 주요 그룹사 전략기획실의 분위기는 예년과는 다소 다른 결을 보이고 있다. 대외적 비전 제시보다 내부 전략 점검과 시나리오 검토에 무게가 실리고, 임원들 역시 외부 활동을 줄인 채 경영 환경 변화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삼성, SK, 현대차, LG 등 주요 그룹들이 최근 2년간 취해온 전략적 선택과 연말 인사 흐름을 종합해 보면, 2026년을 준비하는 기업들의 문제의식은 비교적 분명하다. 위기가 일시적 변수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을 전제로 한 대응, 그리고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조직의 효율성과 실행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2026년 경영 환경을 바라보는 재계의 시선은 ‘비관’이라기보다 ‘냉정’에 가까운 분위기다. 핵심은 2024년부터 이어진 고금리·고환율·고비용 구조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기업이 감당해야 할 ‘상수’로 굳어졌다는 점이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위기가 오면 ‘버티면 지나간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 위기 상태가 곧 평시가 됐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중국 간 기술 패권 경쟁의 심화와 자국 우선주의 정책 기조는 수출 중심의 한국 기업들에게 단순한 비용 증가를 넘어 시장 접근성 자체를 위협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주요 경제연구소들이 2026년 전망치를 보수적으로 잡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드라마틱한 경기 반등을 기대하기 보다 저성장의 고착화를 전제로 전략을 짜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재계의 2026년 전략은 ‘외형 확장’에서 ‘다운사이드 리스크(Downside Risk) 관리’로 무게 중심이 이동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차입을 감수하며 설비와 사업을 넓히던 과거의 투자 공식은 점차 설득력을 잃고, 현금 흐름과 재무 안정성을 우선하는 경영 기조가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긴축이나 보수화라기보다는, 불확실성이 일상화된 환경에 맞춰 경영 전략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신규 투자는 선택과 검증을 거쳐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기존 사업 포트폴리오에 대해서는 수익성·회수 가능성·리스크 노출 정도를 다시 따지는 작업이 병행되고 있다.
특히 환율 변동성과 금리 부담, 지정학적 변수에 대한 노출이 큰 사업일수록 속도 조절과 구조 조정이 동시에 논의되는 분위기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커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주요 그룹들이 인식하는 ‘위기관리’의 문법도 달라졌다. 과거의 위기관리가 환율 급등이나 공급망 셧다운 같은 특정 사건에 대한 대응이었다면, 새해의 위기관리는 기업의 체질 자체를 바꾸는 고강도 구조조정에 가깝다. 이는 지난 2024~2025년 SK그룹이 선제적으로 보여준 강도 높은 ‘리밸런싱(사업 재편)’ 작업이 재계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재계에서 한계 사업은 과감히 도려내고, 수익성이 보장되는 핵심 사업에 자원을 몰아주는 ‘선택과 집중’ 전략은 더욱 두드러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단순히 미래 유망 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묻지마 투자’를 집행하기는 당분간 어렵다는 진단이다. 투자 대비 수익(ROI)이 확실시되거나, 그룹의 존립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분야로 투자가 엄격히 제한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현금 중심 경영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금융 시장의 변동성이 커짐에 따라 유동성 확보는 기업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2026년에는 비주력 자산 매각과 계열사 통폐합 등 비용 절감을 위한 노력이 물밑에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관측된다.
2026년 재계의 또 다른 핵심 전략 축은 단연 인공지능(AI)이다. 하지만 재계의 AI 접근법은 2~3년 전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몇 년간의 AI 열풍이 거대언어모델(LLM)을 중심으로 한 기술적 가능성과 성능 경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2026년 새해 기업들이 바라보는 AI의 위상은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 이제 AI는 ‘혁신의 상징’이라기보다, 비용 구조를 개선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질적 경영수단’으로 재정의 되고 있는 것이다.
재계 내부에서는 AI를 더 이상 미래의 상징이 아닌, 당장의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도구로 보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단순히 사내에 챗봇을 도입하는 수준을 넘어, 제조 공정의 수율을 높이고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며 연구개발(R&D)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등 비용 절감이나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AI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들은 미세 공정의 물리적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AI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AI 컴퓨팅 기술인 쿠리소와 쿠다-X를 도입해 미세 공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회로 왜곡을 AI로 실시간 예측·보정하고, 이를 통해 공정 시뮬레이션 속도를 기존 대비 20배 높이는 동시에 설계 정확도와 개발 속도를 함께 끌어올렸다. 수율 개선과 불량률 감소에 AI를 활용하는 흐름은 업계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현대차그룹 역시 스마트 팩토리 고도화로 생산 유연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인건비 상승과 원자재 가격 변동에 대응하기 위해 AI를 통한 공급망 관리(SCM) 최적화와 사무 자동화가 전사적으로 추진되는 흐름은, 저성장 국면에서 마진율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국내 주요 그룹의 새해 전략적 방향성의 공통분모는 ‘위기감’이지만, 해법은 각 사의 처한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갈린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회장이 수차례 강조해온 ‘기술 중시’ 기조를 2026년에는 실질적인 성과로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반도체 부문에서의 HBM(고대역폭메모리) 경쟁력 회복과 파운드리 수율 안정화가 최대 화두다. 2025년 연말 인사에서 드러난 철저한 ‘신상필벌’ 원칙은 2026년 더욱 강화될 것이며, 내부적으로는 고강도 쇄신과 조직 문화 개혁이 진행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예년보다 일찍 사장단 인사를 단행하며 새해 사업 준비에 서둘러온 SK그룹도 리밸런싱 작업을 이어가며 그룹의 핵심 먹거리 발굴에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리더십을 공고히 하고, 인공지능, 첨단 에너지 등 미래 사업의 수익성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에 대응하기 위해 하이브리드와 전기차를 아우르는 유연한 생산 체계를 강화하고 자동차가 ‘바퀴 달린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는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전환을 가속화할 전망이다. 단순 제조업을 넘어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신년 핵심 목표로 부상했다.
LG는 구광모 회장의 ‘고객 가치’ 경영을 ‘수익을 동반한 성장’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ABC(AI, Bio, Cleantech) 분야에서 2026년은 가시적인 실적, 즉 숫자를 보여줘야 하는 시기로 평가된다. 무리한 확장보다는 내실 있는 1등 전략을 추구하며 전장 사업, 가전 등 흑자 기조를 안정화 시키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화는 방산, 에너지, 우주항공사업이 지정학적 불안정이 심화되는 2026년 환경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큰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글로벌 안보 수요 증가에 맞춘 수출 중심 전략과 친환경 에너지 밸류체인의 글로벌 확장이 핵심 전략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26년 한국 재계의 기상도는 짙은 안개 속이라는 비유가 적당하다. 거시경제의 불확실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기업들은 막연한 공포 대신 데이터에 기반을 둔 시나리오 경영과 AI를 통한 생산성 혁신으로 조용히 칼을 갈고 있다. 과거 고도 성장기에는 ‘누가 더 빨리 가느냐’가 중요했지만 지금과 같은 복합위기의 시대에는 ‘누가 더 단단하게 버티며 내실을 다지느냐’가 승패를 가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한편, ESG 경영 역시 선언적 구호 단계를 넘어 실질적인 비용·리스크 관리 요소로 재정의되고 있다. 한때 ‘착한 경영’ 정도로 여겨지던 ESG는 이제 지속 가능한 이윤 추구를 위한 리스크관리 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ESG 측면 실패 사례(환경 오염 사고나 안전사고 등)가 발생하면 복구 비용, 과징금은 물론 기업 평판과 고객 이탈 등 막대한 손실로 직결되기 때문에, 사전에 이를 관리하는 것이 기업 가치 보호의 필수 과제가 됐다. 특히 기후변동 리스크는 전례 없는 규모의 재무적 피해를 초래할 수 있어 기업들이 탄소중립 투자나 공급망 인권 점검 등을 미래 비용을 줄이는 투자로 인식하는 추세다. 위기관리의 범주에는 재무적 대응뿐만 아니라 ESG 리스크까지 포함되고 있으며, 이는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경영 핵심으로 부상했다.
재계 관계자는 “막연한 미래보다는 확실한 현재의 경쟁력을 택한 기업만이 이 긴 터널의 끝에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결국 2026년 재계의 화두는 ‘성장’보다 ‘생존’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4호 (2026년 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