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곡가 도니제티(1797~1848)는 게으른 천재였다. 오페라 부파(희가극) ‘사랑의 묘약’을 단 2주일 만에 만들었다. 기간은 짧았지만 완성도는 최고였다. 1832년 초연된 후 지금까지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사랑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서정적이고 애잔한 선율에 담아 청중의 가슴을 뒤흔든다.
동물적인 흥행 감각을 가진 도니제티는 대본가 펠리체 로마니와 맹렬하게 싸워서 이 곡을 삽입했다. 로마니는 코믹한 오페라 부파에서 갑자기 템포가 느리고 슬픈 아리아가 생뚱맞게 등장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도니제티가 완강하게 버틴 덕분에 180년 넘게 사랑받는 아리아가 됐다. 이 곡을 듣기 위해 ‘사랑의 묘약’을 보러오는 관객이 있을 정도다.
단조와 장조가 빠르게 교차하는 이 작품은 경쾌하고 서정적인 벨칸토 오페라의 대명사가 됐다. 아름다운 노래를 뜻하는 벨칸토는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창법이다. 초연 때는 위대한 테너 마리오 데 칸디아가 주인공 네모리노를 열창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세기 후반 독보적인 네모리노는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였다.
도니제티는 오페라 스토리에 착착 달라붙는 멋진 선율을 작곡했다. 농장주 딸 아디나를 짝사랑하는 청년 네모리노는 연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사랑의 묘약을 산다. 그러나 엉터리 약장수 둘카마라가 판 것은 싸구려 포도주였다.
가짜 약을 마신 네모리노는 아디나가 넘어올 것을 믿고 술에 취해 오만하게 행동한다. 그의 방자한 행동에 화가 난 아디나는 홧김에 군인 벨코레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순진한 네모리노는 사랑의 묘약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해 약값을 더 구하기 위해 자원입대하려 한다. 그 진심에 감동한 아디나는 결국 마음을 연다. 사랑이 이뤄졌으니 가짜 사랑의 묘약이 진짜가 된 셈이다.
사랑의 묘약은 중세 유럽 켈트의 전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영감을 얻었다. 콘웰의 왕 마르케의 조카 트리스탄이 실수로 사랑의 묘약을 마신 후 숙모가 될 아일랜드 공주 이졸데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두 사람의 밀회는 결국 발각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추방된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죽고 이졸데도 그를 따른다.
이 슬픈 사랑과는 달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매력은 단순한 아름다움에 있다. 사람들이 쉽게 기억하고 따라 부르게 만든다. 도니제티 시대에 오페라는 길거리에서 부르는 대중음악이었다.
180년이 지난 지금은 아름다운 고전으로 추앙받는다. 다양한 해석과 무대로 관객을 꾸준히 찾고 있는 스테디셀러 오페라다. 지난 4월 3~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는 원작 배경을 19세기 스페인 바스크 마을 농장에서 1950년대 유럽 도시로 옮긴 ‘사랑의 묘약’이 공연됐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울한 시대에 생기와 재미를 불어넣는 ‘사랑의 묘약’을 만들기 위한 설정이었다. 사랑의 묘약과 둘카마라 배역 비중도 확 키웠다. 기존 공연에서는 작은 약병으로 등장하는 사랑의 묘약을 붉은색 대형 세트로 제작했다.
이탈리아 연출가 안토니오 페트리스는 “이 오페라에서 사랑의 묘약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와인은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주고 힐링 효과를 준다. 또 둘카마라는 사기꾼이 아니라 행복을 전달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싸구려 포도주를 사랑의 묘약으로 속여 팔았지만 결국 사랑이 이뤄졌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도니제티 삶은 비극에 더 가까워
그렇다면 도니제티의 실제 사랑은 어땠을까. 1828년 친구의 누이 비르지니아 바셀리와 결혼했지만 불행의 그림자가 떠나지 않았다. 아내는 아들을 사산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녀를 잊지 못한 도니제티는 방탕하게 살다 매독에 걸렸다. 문란한 사생활과 과로, 매독 때문에 뇌신경에 이상이 생겼다. 결국 말년에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비극적 삶과 겹치는 오페라가 바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1835년)다. 죽음으로 끝난 슬픈 사랑을 담았다. 명문가의 딸 루치아가 원수 집안의 아들 에드가르도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두 사람 모두 죽게 된다. 17세기 말 스코틀랜드 람메르무어의 영주 엔리코는 가문을 위해 동생 루치아와 부유한 권력자 아르투로의 정략결혼을 강요한다. 그러나 루치아의 마음은 엔리코를 증오하는 가문의 아들 에드가르도에게 있었다. 엔리코는 에르가르도의 편지를 위조해 루치아를 포기시키고 아르투로와 결혼식을 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듣고 피로연장을 찾아온 에르가르도가 반지를 집어던지며 분노하자 루치아는 실성하고 만다. 결국 루치아는 첫날밤에 신랑 아르투로를 죽이고 광란의 아리아를 부른다. 피범벅이 된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17분 동안 공포와 절망, 환상을 오락가락하며 부르는 노래다. 광기 속에서 슬픈 운명을 절규하는 이 아리아는 마리아 칼라스를 세계 최고 소프라노로 만든 노래이기도 하다.
음악평론가 안동림은 “광란의 아리아는 칼라스가 아니면 안 된다. 불운하고 못된 여자였던 칼라스의 성격에는 날이 서 있지만 노래는 그를 넘어설 소프라노가 없다. 마치 장난하듯이 노래를 자연스럽게 소화했다”고 평했다.
도니제티의 출세작도 비극 ‘안나 볼레나’(1830년)였다. 16세기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참수형을 오페라에 담았다. 헨리 8세는 앤의 시녀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기 위해 앤을 불륜죄로 법정에 세웠다. 앤은 이혼을 하면 목숨을 살려준다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딸 엘리자베스 공주(훗날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 계승권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앤 또한 첫 번째 왕비 캐서린의 시녀였다.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이 캐서린과 이혼을 승인하지 않자 가톨릭교회를 떠나 영국 국교회를 창립한 뒤 스스로 교회 수장이 됐을 정도로 앤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의 변덕스러운 사랑 때문에 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페라의 절정은 탑에 갇힌 안나가 사형 집행자를 기다리며 ‘나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오’를 부를 때다. 체념과 슬픔이 뒤섞인 아리아는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희가극과 비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든 도니제티는 속필 덕분에 오페라 70여 편을 남겼다. 오페라 부파에서 오페라 세리아(엄숙하고 비극적인 오페라)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폭넓은 내용을 소화했다. ‘사랑의 묘약’ ‘연대의 딸’(1840년) ‘돈 파스콸레’(1843년)로 오페라 부파의 꽃을 피웠고,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라 파보리테’(1840년)처럼 오페라 세리아 걸작을 남겼다. 그의 유창하고 아름다운 선율은 어떤 스토리든지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살렸다. 세리아에서는 극적 중량감과 감정 묘사가 뛰어났고 부파에서는 특유의 재치와 경쾌함을 빛냈다.
뮤지컬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군인 신분으로 오페라 작곡가 데뷔
이 대단한 오페라 천재는 1797년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당포 관리인이었다. 똘똘한 아들을 법률가로 키우려고 했으나 도니제티는 음악에 마음을 뺏겼다.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베르가모 산타마리아 마지오레 성당 신부이자 음악감독인 요한네스 지몬 마이어에게 음악을 처음 배웠다. 마이어 신부는 도니제티의 음악 재능을 알아보고 볼로냐 리체오 필라르모니코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이곳에서 푸가와 대위법 등 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아버지는 교회음악 작곡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도니제티는 오페라에 더 끌렸다.
부친과 불화를 겪던 그는 군대에 입대해버렸다. 그 곳에서 틈틈이 작곡을 했다. 1818년 군인 신분으로 발표한 오페라 ‘보르고냐의 엔리코’가 호평을 받으면서 작곡가의 꿈을 이루게 됐다. 이후 12년 동안 31개 오페라를 나폴리에서 공연했다. 출세작은 1830년에 작곡한 ‘안나 볼레나’. 2년 후 ‘사랑의 묘약’이 다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성공에 힘입어 1835년 파리로 진출했다. 하지만 벨리니의 ‘청교도’(1835년)가 대박을 치면서 도니제티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나폴리로 돌아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발표했다. 하지만 1838년 그리스도교 순교를 다룬 오페라 ‘폴리우토’ 공연이 종교적 이유로 금지되자 다시 파리로 갔다. 그 때 벨리니(1801~1835)가 요절하고 로시니가 은퇴한 후라 도니제티에게도 기회가 왔다. 오페라 ‘연대의 딸’이 큰 성공을 거뒀고 오페라 ‘라 파보리테’를 무대에 올렸다.
준수한 외모에 유쾌한 성품을 지닌 그는 정치력도 있었다. 1842년 오페라 ‘샤모니의 린다’를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안나에게 헌정했다.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인정도 받아 궁정 작곡가로 임명됐다.
치명적인 병이 그의 음악 인생을 가로막았다. 1843년 심한 두통과 신체 마비 증세로 고통을 겪던 그는 증세는 점점 악화되어 급기야 파리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조카가 고향 베르가모로 데려가 그 곳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평생 평론가들보다 대중에게 더 사랑받은 작곡가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오페라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