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⑳ 20세기 러시아 음악 반항아 프로코피예프…시대를 앞서간 선율 때문에 세상과 불협화음
입력 : 2013.05.03 14:55:01
수정 : 2013.05.27 14:16:53
1953년 3월 5일. 옛 소련의 강철 독재자 스탈린(1879~1953)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바로 그날 모스크바에서 천재 작곡가 프로코피예프(1891~1953)도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 스탈린은 세상을 호령하다 떠났지만 프로코피예프의 죽음은 쓸쓸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음악 때문에 불행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한 이력 때문에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됐다. 심지어 그의 외국인 아내 리나는 스파이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됐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았던 리나는 화려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사람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남편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후 강제 수용소에 수감됐다.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 프로코피예프는 어린 시절부터 불평등을 경험했다.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농장 관리자였고, 어머니는 농노였다. 아버지는 친구의 큰 농장을 책임지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하지만 예민한 소년 프로코피예프는 귀족 계급과 차별을 느끼면서 냉소적으로 변해갔다. 두 딸을 잃은 후 아들을 얻은 부모의 지극한 사랑도 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피아노를 자주 연주했다. 베토벤과 쇼팽을 들으면서 자란 아들은 5세에 작곡을 했다. 어머니가 악보에 받아 적은 이 작품이 바로 ‘인도풍의 갤럽’이다. 꼬마 천재는 8세에 모스크바에 가서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이고르 왕자’, 오페라 ‘파우스트’를 보며 견문을 넓혔다. ‘파우스트’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오페라 ‘거인’을 작곡했다. 비범한 음악 재능을 다듬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화성학과 대위법 수업이 너무 지루했다.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관현악법 수업에도 빠져들지 못했다.
강의 방법에 불만이 많았던 프로코피예프는 교수들과 자주 언쟁을 벌였다. 1901년 작곡과를 졸업한 후에는 피아노과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교수들과 대립했다. 윗사람들에게 밉보여 손해를 많이 봤다. 악보 출판사를 찾지 못해 고생이 심했다. 하지만 그의 집념은 강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판사를 찾지 못하자 1911년 모스크바로 갔다. 그곳에서 출판업자인 유르겐손을 설득해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출판했다. 자신감을 얻은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피아노과를 수석 졸업했다.
신랄한 화음, 소음 공해라는 혹평 받아
그의 음악은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괴리 때문에 고통을 느꼈다. 1913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초연했을 때 청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관객도 있었다.
어느 비평가는 “프로코피예프의 카덴차처럼 더러운 것이 없다. 오선지 위에 잉크를 엎질러놓은 것처럼 엉망이다”고 혹평했다.
카덴차란 한 악장 또는 곡이 끝나기 전에 솔로 연주자가 펼치는 화려한 즉흥 연주. 프로코피예프가 친구의 자살을 목격하고 작곡한 이 곡의 1악장에는 유난히 긴 카덴차가 있다.마치 누군가 목숨을 끊기 전 고통스럽게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 악장에서는 자기중심적이었던 사고가 인류에 대한 폭넓은 사랑으로 확대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서구의 아방가르드(전위예술)에 심취했던 프로코피예프는 기존 화성을 무너뜨리는 작곡을 즐겼다. 돌연한 조성 바꿈으로 선율을 비틀고 신랄한 화음으로 귀를 괴롭혔다. 또 최고음과 최저음을 동시에 누르면 어떤 소리가 나는지 실험하듯 격렬하게 건반을 두드렸다.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듯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지만 이 곡은 훗날 피아니스트들의 애정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표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도 2번을 가장 좋아했다. 2003년 이틀에 걸쳐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5곡을 완주한 그는 “2번은 피아노의 타악기적 특성을 구현하고 다양한 음악 언어를 보여줬다. 현실에의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냄과 동시에 유머를 담고 있다”고 극찬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이 혹평을 받은 해 프로코피예프의 첫사랑도 실패했다. 휴양지에서 귀족의 딸 니나 메시체르스카야를 만났다. 첫눈에 반했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러나 명문 귀족이 미래가 불투명한 음악가에게 딸을 내줄 리 없었다. 니나 부모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충격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는 혼자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실연의 상처를 잊으려 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 때문에 그의 성격과 음악은 더 날카로워져 갔다. 모차르트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녔지만 점점 반항적으로 변해갔다.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연일 총격전이 벌어지자 아예 러시아를 떠나버린다. 1918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을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몇 달만 묵을 생각이었지만 그의 망명은 18년이나 계속된다.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이 수원시립교향악단과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구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천재
미국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다. 뉴욕의 콧대 높은 관객들은 옛 소련에서 온 음악가를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빠른 속도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강철 손가락과 손목을 지닌 피아니스트”라고 극찬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훗날 아내가 되는 리나였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녀는 러시아어도 능통하고 애교가 넘쳤다. 키가 크고 무뚝뚝한 프로코피예프는 그녀와 있는 게 좋았다. 뉴욕에서 피아노 스타가 된 그는 시카고에서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작곡한 ‘스키타이 모음곡’과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로 눈길을 끌었다. 시카고 오페라계는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작곡 제의도 받아들였다.
뉴욕으로 돌아온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 연주로 돈을 벌면서 어렵게 작곡을 해나갔다. 과로로 성홍열과 디프테리아, 편도선염이 겹쳐 죽을 고비를 넘겼다. 투병 중에도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완성했으나 지휘자 캄파니니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미국에서는 그저 피아니스트로만 인정을 받은 셈이다. 실망한 그는 런던에 잠시 머무르다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다시 창작열을 되찾고 러시아 발레단을 이끄는 디아길레프의 발레 ‘어릿광대’ 개작에 착수했다. 1921년 5월 17일 파리에서 초연해 호평을 받았다. 드디어 유럽에서 작곡가로서 길이 열린 셈이다.
그는 프랑스 브르타뉴 어촌에 칩거하면서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썼다. 지극정성으로 작곡한 이 곡은 이웃에 살던 상징파 시인 바리몬트에게 헌정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직접 초연해 극찬을 받았으며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됐다.
상승세를 타면서 공연이 무기한 미뤄졌던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도 돌파구를 찾았다. 1921년 12월 30일 시카고에서 초연해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뉴욕 관객 반응은 싸늘했다. 그래서 1922년 3월 완전히 유럽으로 이주했다. 독일 남부 바바리아 지방에서 집을 빌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작곡에 전념했다. 사랑도 무르익었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리나가 자주 찾아왔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겨 1923년 9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파리로 가서 장남 스비아토슬라프를 낳았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그해 12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여전히 냉대 받아
오랜 타향 생활 때문에 고국에 대한 향수병이 점점 깊어갔다. 그리움을 담아 옛 소련의 산업화를 주제로 한 발레 ‘강철의 걸음걸이’를 작곡했다. 1927년 6월 파리에서 호평 받았으나 정작 고국에서는 냉대를 받았다. 옛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파는 그의 음악을 공격했다.
그래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1929년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기고 1936년에는 가족이 모두 이주했다. 이때 두 아들을 위해 음악 동화 ‘피터와 늑대’를 작곡했다. 경쾌한 선율로 약육강식의 세계를 가르쳐 주는 작품으로 어린이날에 자주 연주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후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스타일은 점점 변해갔다. 애절한 사랑을 담은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1940년 초연)은 기존 작품과 너무 달랐다.
실험적이고 난해한 음악 스타일에서 벗어나 로맨틱하고 서정적인 선율로 바뀌었다.달빛이 비치는 발코니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파 드 되(2인무)를 이끄는 선율은 너무 아름답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지만 옛 소련 정부의 명령으로 해피엔딩으로 바뀌었다. 창작열을 불태웠으나 옛 소련 음악계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다.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되고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가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심각성을 모른 채 서구 유럽으로 자유롭게 여행하며 음악활동을 계속할 줄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 이후 단 2번 해외여행이 허락됐고 죽을 때까지 옛 소련에서만 머물렀다. 고국에서 성공을 받쳐줄 인맥도 없었다. 현란하게 말을 휘두를 정도로 뻔뻔하지도 못했다. 서구에서 길러온 음악 정서와 맞지 않아 관료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가정도 평탄치 못했다. 여름 휴가지에서 만난 여인 미라 멘델손과 불륜에 빠졌다. 모스크바 대학 문과 학생으로 마르고 지적이었다. 그녀의 문학 열정에 끌려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41년에는 미라의 집으로 아예 들어가 살았다. 새로운 사랑에 들 뜬 프로코피예프는 발레 ‘신데렐라’와 오페라 ‘전쟁과 평화’를 써내려갔다. 그러나 당의 비판은 계속됐고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1945년 뇌진탕으로 쓰러진 후에는 건강이 계속 악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