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⑯ 나비부인·투란도트… 아시아를 사랑한 푸치니 `주옥 같은 오페라 선율에 동양을 담다`
입력 : 2012.12.27 13:54:11
수정 : 2013.01.25 11:33:04
라보엠
21세기는 ‘아시아 시대’라고 한다. 세계의 무게 중심은 미국과 유럽에서 중국과 인도, 일본으로 서서히 넘어오고 있다. 음악가 중에서 가장 먼저 아시아를 주목한 사람은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었던 그는 20세기 초반에 이미 일본과 중국을 오페라 소재로 활용했다.
1902년 작곡한 오페라 <나비부인> 배경은 바로 일본 나가사키 항구. 개화기에 서구 열강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당시 일본 게이샤들은 서양인들을 상대로 매춘 영업을 했다. 그 결과 국제결혼이 늘어났고 본국으로 돌아간 남편에게 버림받는 여인들이 많았다. <나비부인>에서 주인공인 15세 일본 게이샤 초초도 미군 장교 핑커튼의 아들까지 낳지만 버림받는다. 초초는 부모와 친척, 친구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지만 핑커튼에게는 젊은 시절 ‘불장난’에 불과했다.
초초는 미국으로 간 후 소식이 없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녀가 부르는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은 “두려움일랑 맘속에 가둬놓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그를 기다릴 거야”라고 부르는 절절한 사부가다.
그런데 3년 후 핑커튼은 미국인 아내와 함께 돌아온다. 그들은 초초가 낳은 아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한다. 아이와 마지막 작별을 고한 초초는 병풍 뒤로 가서 ‘명예롭게 살 수 없다면 명예롭게 죽으리라’고 쓰여 있는 아버지의 칼로 자결하고 만다.
푸치니는 이 오페라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1900년 런던에서 열린 연극 <나비부인>에 감동한 그는 무대 뒤로 달려가 “저작권을 사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1904년 2월 오페라 <나비 부인>의 초연은 실패로 끝났다. 초초 역할을 맡은 소프라노 로지나 스토치오가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내연 관계여서 문제가 됐다. 스토치오의 기모노가 우연히 풀어졌을 때 한 관객이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소리쳤다. 또 다른 사람은 “토스카니니의 아이”라고 외쳤다. 공연 평가도 매우 냉정했다.
몹시 화가 난 푸치니는 출판업자에게 2만리라를 돌려주며 작품 수정에 들어갔다. 원래 3막이었지만 2막으로 축소하고 아리아 ‘안녕, 꽃피는 사랑의 집이여’를 추가했다. 절치부심하며 개작한 덕분에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가 됐다.
나비 부인… 순종의 여신 ‘초초’
오직 한 남자만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한 ‘순정의 화신’ 초초는 푸치니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상이다. 그는 “미미와 무제타, 마농, 토스카(푸치니 오페라의 여주인공)에 대한 나의 애정과 나비부인과 비교할 수는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초초는 푸치니의 아내 엘비라와는 정반대 성격이었다. 엘비라는 질투가 심했다. 남편이 한 눈을 판 여성을 죽음에 몰아넣을 정도였다. 교통사고로 입원한 푸치니를 간호하던 16세 소녀를 의심해 마을에서 쫓아버린 적도 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자 나쁜 소문을 퍼트리고 “호수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결백을 주장하던 소녀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다못한 소녀의 가족과 친척들은 엘비라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엘비라의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불륜 사실을 고백하라며 푸치니를 다그쳤다. 아내의 끊임없는 불신의 원인은 푸치니의 바람기 때문이었다. 사실 두 사람도 불륜에 빠져 결혼했다. 식품 도매업자 아내였던 엘비라는 취미 삼아 푸치니에게 음악을 배우다가 눈이 맞았다. 푸치니의 아이를 임신하자 엘비라는 막무가내로 푸치니 집으로 쳐들어와 주저앉았다.
가정을 꾸렸다고 푸치니의 여성편력이 사라질 리 없었다. 그는 교묘하게 아내를 피해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감정조절이 안되고 그악스런 아내에 지친 탓인지 연약하고 섬세한 여자들을 좋아했다.
그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여인들도 부드럽고 자기희생적이다. 오페라 <라 보엠>의 주인공 미미는 운명에 순응하는 여인이며, 오페라 <투란도트> 시녀 류는 칼라프 왕자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다. 투란도트 공주가 칼라프 왕자의 신분을 밝히려고 고문하지만 류는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자살을 선택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는 류를 보고 투란도트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린다.
질투 많은 아내와 짜증스런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푸치니는 오페라에서 돌파구를 찾았고 답답한 마음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1. 투란도트
2. 나비부인
투란도트… 고대 중국에서 펼쳐지는 수수께끼 같은 사랑
류가 등장하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배경은 고대 중국이다. 베이징 궁전 앞 광장에서 아름다운 투란도트 공주가 내는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소재다. 그 문제를 풀면 그녀와 결혼할 수 있고, 실패하면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조국을 잃고 떠도는 칼라프 왕자도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성곽 위에 나타나 페르시아 왕자의 사형 집행을 명령하는 투란도트에게 첫 눈에 반했기 때문이다. 칼라프의 아버지 티무르와 노예 류는 결사반대한다. 칼라프를 사랑하는 류는 애절한 아리아 ‘나의 말을 들어주오’를 부르며 호소하지만 소용이 없다.
익살스럽게 생긴 관리 핀, 판, 폰과 군중도 만류한다. 그러나 칼라프는 투란도트를 부르며 결연하게 징을 두드린다.
투란도트는 왜 그토록 남자들을 혐오하게 됐을까. 그녀의 할머니 로우링 공주가 타타르인 사내에게 겁탈당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 원한을 풀기 위해 이방인 청혼자들을 모두 죽이고 있었다.
투란도트가 낸 첫 번째 수수께끼는 ‘어둠을 비추고 다음 날 없어지는 것은?’. 정답은 ‘희망’이다. 두 번째 문제는 ‘태어날 때는 열병과 같이 뜨겁다가 죽을 때는 차가워지는 것?’. 답은 ‘피’. 마지막 문제는 ‘그대에게 불을 붙이는 얼음은?’. 정답은 ‘투란도트’.
칼라프가 세 문제를 다 풀지만 투란도트는 쉽게 용납할 수 없다. 저항하는 그녀에게 칼라프는 “동이 트기 전에 내 이름을 맞힌다면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유명한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를 호기롭게 부른다.
어떻게든 결혼을 피하려는 투란도트는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류와 티무르를 고문하게 된다. 류는 왕자를 위해 자결을 선택한다.
여기까지가 푸치니가 작곡한 대목이다. 그는 후두암 수술 후유증 때문에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결말은 제자 프랑코 알파노가 작곡했다. 류의 희생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투란도트가 칼라프와 결혼식을 올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1926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에서 이 작품이 초연될 때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류의 죽음까지만 연주한 뒤 “푸치니 선생님은 여기까지 작곡하고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지휘봉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비록 완성하지 못했지만 푸치니는 이 작품을 통해 과감한 음악적 도약을 보여준다. 그는 “이제까지 내 오페라들은 다 버려도 좋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보였다. 1920년 런던 여행 때 알게 된 중국 멜로디를 7번 사용했다. 중국 뮤직박스(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황제찬가’ 선율도 인용했다. 동양 5음계와 공(Gong), 탐탐, 종, 실로폰 등 타악기로 중국 분위기를 살려냈다.
라 보엠… 이탈리아 가극에 근대의 숨결을 불어 넣다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서정적 음악으로 ‘오페라의 대명사’가 된 푸치니는 시대를 역행한 작곡가이기도 했다. 불협화음과 반음계로 가득 찬 현대 음악이 대세를 이루던 시절, 그는 오히려 전통 낭만주의 음악 어법을 썼다. 그러나 혁신과 창조가 결여된 탓에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관객들은 열광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대중적 선율이 많았기 때문이다. 푸치니는 늘 “관객의 입맛을 맞춰야 한다. 오페라는 극장에서 성공해야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흥행을 위해 흡인력이 강한 스토리만을 선택했다. 오페라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줄 수 있는 비극적 멜로드라마로 극장을 뒤흔들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 인기는 변함없다. 국내에서도 그의 오페라 티켓이 가장 잘 팔린다.
1900년 초연된 <토스카>는 1800년 로마 전제군주 시대, 경찰청장 스카르피아의 탐욕에 희생당하는 오페라 가수 토스카와 화가 카바라도시의 비극적 사랑을 담았다. 스카르피아는 토스카를 차지하기 위해 카바라도시를 정치범으로 몰아 교수대로 보낸다. 하지만 토스카는 스카르피아를 죽이고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1896년 초연된 <라 보엠>은 푸치니의 청춘이 투영된 작품이다. 밀라노 유학 시절 가난했던 기억이 담겨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난로불도 못 켜는 시인 로돌포(라 보엠 주인공)처럼 푸치니도 궁핍했다. 장학금이 떨어져 친구 하숙집에 얹혀살았다.
졸업이 가까워지는데도 오페라 대본을 구할 돈이 없어 애가 탔다. 다행히 그의 재능을 아낀 스승 폰키엘리가 친분이 있던 작가 폰타나에게 부탁해 후불 조건으로 <요정 빌리> 대본을 받는다. 그러나 현상 공모에 낙방했다.
다행히 스승과 폰타나 덕분에 사교 모임 저녁 파티에서 이 오페라가 소개됐다. 호평이 쏟아진 덕분에 1884년 5월 달 베르메 극장에서 공연될 수 있었다. 무명의 공모 낙선자의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알려지면서 1885년 1월 <오페라 1번지>가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 올랐다. 그의 오랜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사진제공 국립오페라단, 솔오페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