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국내 수입차 시장은 역대 최고 수준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 6월까지 누적 등록 대수는 18만4032대로 전년 동기(13만 8120대) 대비 33.2% 증가했다. BMW의 ‘7시리즈’가 2675대나 팔리며 수입 대형 세단 시장을 이끌었고, 아우디의 ‘A5’(554대)는 전년 동기 대비 209%, 벤틀리는 총 227대가 판매되며 전년 동기(116대) 대비 95.7%나 성장했다.
반면 이른바 ‘포람페’로 대변되는 슈퍼카 시장의 사정은 정반대다. 올 상반기에 4322대가 신규 등록된 포르쉐는 전년 동기(5763대) 대비 25%나 하락했다. 페라리는 115대가 등록됐지만 전년 동기(184대) 대비 37.5% 감소한 수치다. 6월에만 64대가 판매된 람보르기니는 상반기에 총 215대가 팔리며 전년 동기(208대) 대비 3.4% 늘었다. 하지만 5월까지 누적 판매량은 –4.4%였다. 럭셔리 브랜드 역시 판매 감소 흐름이 뚜렷했다. 롤스로이스는 전년 동기 대비 13.1% 줄었고, 캐딜락은 2.8%, 랜드로버는 1.8%, 링컨은 54.2% 감소했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고성능 라인업도 마찬가지. 메르세데스-벤츠의 고성능 AMG 라인업의 경우 올해 상반기 1974대를 판매했지만 전년 동기(2623대) 대비 24.7%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서 “수입 하이엔드 슈퍼카 브랜드가 역성장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국내 슈퍼카 시장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게 하늘의 별 따기란 말이 돌았을 정도. 팬데믹 이후 자산가치가 급등한 슈퍼리치들의 구매욕이 오픈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24년 람보르기니의 한국 판매량(487대)이 본국인 이탈리아(479대)를 넘어선 게 이 흐름의 정점이었다. 시장이 워낙 뜨겁다 보니 람보르기니, 롤스로이스, 벤틀리, 페라리, 마세라티 등 내로라하는 슈퍼카 브랜드의 글로벌 최고경영자(CEO)가 줄줄이 방한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를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올 초 고금리 기조가 예상보다 길어지고 평균 1500원대의 고환율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리스나 할부 의존도가 높은 슈퍼카 구매층부터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수입차 딜러사의 한 관계자는 “각 수입사의 파이낸셜이 본사에서 자금을 차입하는 경우 환율이 오르면 당연히 원금과 이자 부담도 오른다”며 “환율 상승이 장기화되면 리스 비용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슈퍼카를 둘러싼 규제 환경도 한몫했다. 2024년 부터 취득가액 8000만원 이상의 법인 업무용 승용차에 연두색 번호판 부착이 의무화됐다. 지난 5월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국무회의에서 법인 명의 고가 외제차의 사적 사용 실태 점검 필요성을 언급했고, 이후 국세청이 법인 차량 사적 사용 여부를 분석해 탈세 혐의가 있는 19개 법인을 대상으로 세무조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업계에선 “수입차 시장에 태풍의 눈이 된 전동화 바람도 슈퍼카 판매량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올 상반기 수입차 판매량은 테슬라, BYD, 폴스타 등 전기차 브랜드의 성적표가 도드라졌다. 올 상반기 브랜드별 판매 순위에서 테슬라는 1위, BYD는 4위에 이름을 올렸다. 테슬라는 전년 동기 대비 192.2%, BYD는 807.9%, 폴스타는 74.0%나 판매량을 늘렸다.
슈퍼카의 판매 그래프와 달리 초고가 세단 수요층은 상대적으로 견조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오너드리븐의 실사용 목적이 상대적으로 커 구매 저항이 낮고, 법인 임원용, 의전용 수요까지 겹쳐 있어 경기 변수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다는 분석이다. 우선 BMW의 ‘7시리즈’(전기차 i7 포함)는 올 상반기 3077대를 판매하며 같은 기간 메르세데스-벤츠의 ‘S-클래스’(1839대), 볼보 ‘S90’(885대)를 제치고 수입 대형 세단 1위를 지켰다. 모델별로는 ‘740i xDrive’가 1539대, ‘740d xDrive’는 914대, 순수전기 ‘i7’이 402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750e xDrive’가 222대로 뒤를 이었다. S-클래스가 가솔린과 디젤 중심으로 라인업을 운영한 것과 달리 7시리즈는 다양한 모델로 판매를 확대했다.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둔 벤틀리도 ‘플라잉스퍼’ 80대(전년 동기 14대), ‘벤테이가’ 78대(전년 동기 55대), ‘뉴 컨티넨탈’ 69대(전년 동기 33대)로 판매 중인 3개 모델이 모두 증가했다. 벤틀리모터스코리아는 이 여세를 몰아 지난 6월 부산·영남 지역 신규 딜러로 KCC오토그룹을 선정하며 유통망을 넓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희소성과 과시적 성능을 앞세우던 슈퍼카보다 정숙함과 맞춤 제작, 개인화된 브랜드 경험을 우선시하는 이른바 ‘조용한 럭셔리’로 무게중심이 옮겨 가고 있다”고 설명하며 “이 같은 흐름이 실사용 럭셔리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하반기에는 어떨까. 페라리코리아는 판매는 줄었지만 유통망은 오히려 넓히는 중이다. 지난 6월 코오롱모빌리티그룹이 페라리코리아의 부산·영남권 공식 딜러로 선정돼 이 지역 판매와 AS를 맡게 됐다. 이로써 페라리는 국내 진출 이후 처음으로 서울과 수도권은 효성계열 FMK(포르자모터스코리아)가, 부산과 영남권은 코오롱이 담당하는 ‘복수 딜러 체제’를 갖추게 됐다. 판매량이 주춤한 시점에 오히려 지역 유통망을 재정비하는 행보에 수입차 업계에선 단기 실적 방어보다 다음 신차 사이클을 겨냥한 장기 포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탈리아 슈퍼카 3인방이라 불리는 마세라티도 스포츠 세단 ‘기블리’와 SUV ‘르반떼’ 중심이던 라인업에 슈퍼 스포츠카 ‘MC푸라’를 투입하며 반등을 노리고 있다. 전동화 모델 출시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는 나란히 전동화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우선 람보르기니는 V8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슈퍼카 ‘테메라리오’를 국내 공개한 뒤 본격적인 고객 인도를 준비하고 있다. 테메라리오는 기존 ‘우라칸’의 후속 모델로 ‘레부엘토’와 ‘우루스 SE’에 이어 람보르기니의 전동화 라인업을 완성하는 모델이다. 페라리는 지난 5월 ‘루체’를 공개했다. 페라리 최초의 4도어 5인승 순수 전기차로, 애플 최고디자인 책임자(CDO) 출신 조니 아이브가 디자인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벤틀리도 도심형 럭셔리 SUV이자 첫 순수 전기차 브랜드 ‘토르칼’을 공개했다. 벤틀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모델로 ‘컨티넨탈 GT’ ‘플라잉스퍼’ ‘벤테이가’에 이어 선보이는 네 번째 모델이다. 프랑크-슈테펜 발리저 벤틀리모터스 회장은 “벤틀리는 여유로운 퍼포먼스, 탁월한 안락함, 최고의 소재를 활용한 영국의 장인정신, 그리고 영혼이 담긴 사운드를 바탕으로 지난 107년 간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완성도를 지닌 자동차였다”며 “새로운 토르칼은 벤틀리가 추구하는 모든 영역에서 차원이 다른 기준을 제시하며, 벤틀리 역사상 가장 섬세하게 조율된 모델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BMW그룹은 아예 새로운 브랜드로 승부수를 던졌다. 지난 6월 이탈리아 콩코르소 델레간차 빌라데스테에서 콘셉트카 ‘비전 BMW 알피나’를 공개하며 기존 튜닝 브랜드였던 알피나를 독립 럭셔리 브랜드 ‘BMW 알피나’로 재편한다고 발표했다. 25년 만의 신규 브랜드 출범으로 V8 엔진과 100여 가지 외장 색상을 앞세워 마이바흐, 벤틀리가 자리 잡은 초고가 시장을 정조준한다. BMW코리아는 2027년 하반기 전국 7개 전시장에 알피나 전용 공간을 마련하고 2028년 초 국내 공식 출시에 나설 계획이다. 가격대는 마이바흐 S-클래스나 벤틀리 플라잉스퍼에 대응하는 수준으로 알려졌다.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는 지난 5월 18일부터 부분변경 ‘더 뉴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와 ‘더 뉴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클래스’의 사전 계약을 시작했다. V12 엔진을 품은 초호화 세단이 다시 등장하면서 롤스로이스, 벤틀리와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