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저 매미, 너무 시끄러워. 선생님한테 혼나야 하는데 방학이네.”
왱왱 대는 매미 소리가 거슬렸는지 앞서가던 어린 소녀가 하소연이다. 허리에 맨힙색엔 ○○유치원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함께 걷던 엄마, 아빠가 거들었다.
“그러게 수매미가 아직 암매미를 찾지 못 했나봐. 매미는 한 달 정도 사는데, 그 사이에 사랑하는 매미를 만나야 하거든.”
엄마의 설명에 소녀가 현답을 내놨다.
“사랑하는 매미? 그럼 소곤소곤 말해야지. 저렇게 큰 소리로 시끄러우면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텐데. 사랑도 도망갈걸.”
이번엔 아빠가 한마디 거든다.
“그래? 그런데 아빠, 엄만 네가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도 사랑스럽기만 하던데?”
“아빠도 참, 그건 내가 예쁘니까 그런 거지. 매미는 못생겼잖아.”
못생긴 매미 소리가 온 사방에 그득한 여름 끝자락. 한낮의 기온은 35도. 멀찌감치 물러난 입추가 무색하게도 온몸은 흠뻑 땀에 젖었다. 바닷가 몽돌해변에 펼쳐진 파아란 파라솔이 아직은 썩 잘 어울리는 계절, 하늘이 높아졌다지만 후끈한 바람은 여전하다. 그리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맴맴….
아, 그래서 감포깍지길 7코스를 소리의 길이라 했나. 에이, 설마….
경주시 감포읍에는 감포항이 있다. 지붕없는 박물관이라는 경주를 여행한 이들이 바다를 보기 위해 들르는 곳인데, 경주 도심에서 약 27㎞, 차로 40여 분만 이동하면 닿을 수 있다. 외지인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감포항은 개항한 지 100년이 넘은 경주시 최대 어항이다. 그러니까 현지인에겐 이미 훌륭한 피서지이자 바다를 바라보며 물 회 한 그릇 뚝딱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이기도 하다. 감포항 주변의 해변을 걷는 감포깍지길은 어촌마을을 관통하는 해파랑길이다. 손깍지처럼 육지와 바다가 서로 깍지를 낀 듯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았는데, 그 중 7코스는 이견대에서 출발해 댕바우전망지, 동해의비석, 등산로, 만파대, 듬북재, 동해안 탐방로를 거쳐 다시 이견대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산책로다.
사람 사는 곳 바로 코앞에 바다가 자리해 길을 걷다보면 작은 어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코스인데, 똑같은 이유로 이곳저곳에 펜션 공사가 한창이어서 수십 년의 세월이 공존하는 이색적인 둘레길이다.
길의 시작점인 이견대에선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한 신라 30대 문무왕의 수중릉(문무대왕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681년에 지었다. 그 뒤로 뻗은 욱길산은 야트막한 동산이다. 그렇다고 무리하면 늦더위에 탈나기 십상이다. 둘레길 산책의 기본은 내 몸에 맞는 적당한 속도와 물 한 병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해변을 바라보며 걷는 산길은 조화롭다. 그늘막이 시원한 대나무 숲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인데, 이곳을 지나다보면 감포깍지길 7코스가 소리의 길인 이유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낮은 산이지만 걸어야 할 거리는 약 3㎞. 이 정도 산길에선 여유로워야 한다. 서둘다보면 쉽게 지쳐 이채로운 풍경이 그림의 떡이 될 수도 있다.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동해안로가 이어지는데 여기서 부터가 바닷길이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바다 옆을 걷는 해파랑길의 일부 구간이기도 하다. 이곳 해변은 모래 대신 몽돌로 완성됐는데, 걷는 내내 파도와 몽돌이 빚어낸 소리가 경쾌하다. 다시금 소리의 길이란 게 실감나는 순간이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촘촘하게 이어진 좁다란 골목길에 세월의 더께가 그득하다. 각종 젓갈을 담은 고무다라이 뒤로 보이는 바다는 그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늦더위 기승에도 지붕 낮은 집들은 조용하다. 어제도 그제도, 아니 수십 년 전에도 그랬다는 듯 미동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다 고개 돌려 다른 골목을 바라보면 4~5층 신식 건물이 바쁘게 들썩인다. 이런 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건물 밖 에어컨 실외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도심에선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살짝 출출하다면 해안도로에 늘어선 식당가가 훌륭한 안식처다. 바다와 인접해 그날 잡은 생선을 올린 물회가 일미다. 물회를 시키면 예닐곱 개의 찬과 매운탕까지 즐길 수 있다. 대부분의 횟집에서 민박도 겸하는데, 4인 가족 기준 1인당 4만 5000~5만원을 내면 회와 매운탕, 다음날 전복죽이나 미역국으로 차려진 아침상까지 받을 수 있다. 7코스를 다 돌았다면 차로 5분 거리인 문무대왕릉이 기다린다. 이견대에서 내려다보던 바로 그곳이다. 멀리서 보던 것과는 달리 왠지 숙연해진다. 그런데 아쉽다. 2024년의 해변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낙후된 주변이 스산하다. 세련된 관광 명소로 거듭난 경주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8호 (2024년 9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