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패션계의 화두는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오래된 것이 좋아)’로 요약된다. 명품브랜드의 초기 디자인이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돼 출시되는가 하면 ‘롱샴’ ‘디젤’ ‘코치’ 등 2000년대 초반 Y2K 패션을 이끌던 브랜드가 다시금 MZ세대의 선택을 받고 있다. ‘패션은 돌고 돈다’던 유행이 레트로 열풍을 타고 증명된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브랜드는 어떨까. 돌고 돌 만큼 오래된 패션 브랜드가 있기는 할까. 1987년 탄생한 국내 토종 패션 브랜드 ‘가파치(CAPACCI)’가 돌아왔다. 성상현 회장이 설립한 기호상사에서 태동한 가파치는 1990년대 초반 중국에 진출하며 세계화를 꿈꿨던 유일한 한국 브랜드였다. 하지만 IMF의 파고는 높고 거셌다. 경기도 양평 끝자락에 자리한 자택에서 만난 성 회장은 “생산을 중단한 지 20년이 됐다”며 “이제 뜻맞는 후배와 함께 다시 꿈을 꾸고 있다”고 포부를 전했다.
194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상대를 졸업하고 경인에너지, 대한전선에서 일했다. 1977년 기호상사를 설립하고 찰스쥬르당, 니나리찌 등 라이선스 브랜드를 도입했다. 1987년 가파치 브랜드를 창안해 등록했다. 중국 진출 등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며 세계화를 꿈꿨지만 1998년 IMF사태 이후 생산이 중단됐다. 올 10월 기룡콜렉션이 라이선스를 획득해 가파치 생산을 재개했다.
Q 산세가 좋은 곳입니다. 전원생활은 언제부터.
A 만 10년 6개월 됐어요. 그때 서울에 있는 거 다 정리하고 내려왔어요. 영업이고 생산이고 다 끝내고 집 하나 달랑 짓고 몸만 내려왔습니다.
Q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A 그 때 가파치 생산을 멈췄으니 20년 전이네요. 1998년 IMF 시기에 부도가 났어요. 무리한 사업 확장이 문제가 됐고, 사람을 너무 믿은 것도 화를 불렀지요. 10년간 법적인 문제로 송사가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가파치 브랜드 하나 건졌습니다.
Q 가파치는 1993년에 중국에 진출하며 전개가 활발했던 브랜드로 기억하는데요.
A 1992년부터 중국 공장이 가동됐지요. 시장 확보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상황에 IMF 사태가 터지면서 760원 대이던 환율이 1800원대로 뛰더군요. 제품이 팔려야 하는데 환율이 두세 배로 뛰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쓸데없는 짓도 좀 했어요.
Q 쓸데없는 짓이이요?
A 가파치에만 전념했어야 하는데, 당시 건설 분야가 유망한 걸 보고 3만평이나 되는 대형 벽돌 공장을 마련했거든요. 그런데 IMF에 건설 경기가 무너지고 기름값이 서너 배나 오르니 원가 상승에 판로까지 막혀 악재가 겹치더군요. 가파치만 열심히 했다면 어찌됐을지 모르는데 국내 사업체 4개, 중국에 4개 업체를 운영하다 보니 감당을 못했습니다.
Q 그 당시 경영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면.
A 첫째는 환율, 둘째는 위축된 시장이었어요. IMF가 국제통화기금 정도로만 알았지 환율이 그렇게 변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이 없으니 공장이 돌아가더라도 적자였어요. 대부분 거래를 어음으로 했는데, 어느날 다 휴지 조각이 됐습니다. 제 기억으로 이 분야에서 신세계, 롯데 빼곤 다 부도가 났을거예요.
Q 1980년대는 대부분 OEM에 몰두하던 시기인데, 브랜드를 내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A 1980년에 처음 파리에 갔어요. 한국에선 비행기표가 비싸서 일본 도쿄에서 덤핑하는 여행사로 가 표를 구해 돌아오던 시절이었지요. 막상 파리에 갔는데 영어가 짧고 불어도 못하니 어째요. 무작정 파리에 있던 삼성물산으로 가 막내 사원에게 통역 좀 해달라고 사정해 신세를 졌습니다. 피에르가르뎅에 가서 만나자고 하니 예약도 안 하고 왔다고 타박이야. 그런데 계속 문을 두드렸더니 만나는 주더군요. 결국 그때 피에르가르뎅은 삼성이 수입하게 됐는데, 그곳에 드나들면서 아무리 잘 만들어도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Q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데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공동상표 전략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A 그때는 지갑이나 벨트도 대기업이 손을 댔던 시기였어요. 중소기업이 생존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자 비결이었던 셈이죠. 소기업이 살기 위해 가파치라는 공동 브랜드를 쓰고 공동 생산, 공동 판매하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1990년에 시작했는데, 처음엔 별 관심이 없더니 하나둘 모이기 시작해 13개 업체가 14개 품목을 생산했어요. 1996년부터 정식으로 로열티도 받아 각 업체가 생산한 제품의 이미지와 품질을 관리했습니다.
Q 가파치란 브랜드명은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A 니나리찌와 참 친하게 지냈는데 구찌, 니나리찌, 좋은 브랜드는 대부분 마지막에 ‘찌’가 들어가더군요. 가파치는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가죽신을 지어 바치던 천민인데, 쟁이죠. 그런데 발음해보니 찌도 되더라고. 나도 ‘찌’다 한 거지.(웃음)
Q 디자인 콘셉트가 중요했을텐데.
A 맞아요. 막상 만들려고 하니 콘셉트가 떠오르지 않는거야. 고민을 거듭하다 소재에 집중했습니다. 세계 여행을 다니곤 했는데, 중국에서 동파문이란 상형문자를 발견했어요. 그걸 바탕으로 중국 시장도 겨냥할 겸 연구를 거듭해 완성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고유의 색인 색동을 소재에 투영시켰어요. 수천가지 다양한 색으로 만들 수 있는 색동무늬가 나왔습니다. 가장 고민했던 건 가죽인데, 루이비통 모노그램처럼 확실한 문양이 아쉬웠어요. 프레스를 이용해 퀼팅과 메시 포인트를 강조한 기와무늬를 개발했지요. 이건 2015년 초에 시작했으니 9년 째 실험하고 있습니다.
Q 가파치의 제품 생산은 20년 전에 멈췄는데, 소재 개발은 계속되고 있는 겁니까.
A 이 전원에서 뭐 하겠어요. 홀로 색동과 기와 라인 만들면서 패브릭과 가죽에 투영하고 있습니다. 가죽에 입혀지는 기와 무늬는 지난해 특허가 나왔어요. 일본 특허까지 받았습니다. 새로운 라인업이지요.
Q 10월부터 다시 가파치 제품이 출시됐는데, 기룡콜렉션이 디자인, 개발, 유통에 나선다고 들었습니다.
A 내 나이 이제 80이 넘었어요. 이제 다음 세대가 나서서 잘 해줘야지요. 제 꿈이 이해하고 선뜻 나서준 게 기룡이에요. 아주 든든하고 미더운 기업인데, 기와무늬 소재를 사용해 지갑과 벨트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기택 기룡콜렉션 대표가 당장 생산해 수익을 내는 것보다 천천히 준비해 전개하겠다고 해서 참 고마워요.
Q 그 후배에게 바라는 바가 있을 것 같습니다.
A 피혁이 중심이 된 패션 브랜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루이비통, 구찌, 샤넬 같은 브랜드가 가죽부터 시작해 뷰티로 영역을 넓히고 있어요. 40~50년 전에 출시한 디자인이 지금도 유효해요. 지난해 루이비통 그룹 매출이 삼성전자보다 많으니 말해 뭐하겠어요. 단, 처음에 잘 만들어야 해요. 내가 해보니 알겠어. 품질 관리를 철저히 해나가면 빛이 보일 겁니다. 혼자 다하려고 하면 안 돼. 디자인, 개발, 제작 어느 분야든 필요한 건 컨설팅 받아야 합니다. 패션에 대한 제도적 지원도 아쉬운 부분인데, 세계화를 꿈꾸는 토종 브랜드에 대한 지원도 나와야 할 시기라 생각됩니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다잖아요. 100년 후 애플이 존재할 진 모르지만 샤넬이나 루이비통은 남아있을 거라고. 뜻이 있는 후배라면 도와주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0호 (2024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