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화제다. 한국 증시의 고질적인 저평가 해소를 목표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까지 공개했다. 일단 시장에서는 정부 대책이 구체적인 내용 보다는 원론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히는 수준에 그쳤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자율성에 기댄 권고 형식으로는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표명됐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도 나온다. 금융당국과 거래소는 5월 말 밸류업 가이드라인을 공개할 방침이다. 하반기부터는 밸류업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상장사를 별도로 공표하고 우수기업 선정 기준을 마련해 우수 사례를 집중 발굴한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한국 증시의 밸류업 프로그램과 함께 다시금 주목받는 부문이 바로 행동주의 펀드다. 정부가 선례로 참고하고 있는 일본 역시 정책과 함께 행동주의 펀드들의 활발한 주주제안이 증시 상승을 뒷받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매경LUXMEN’에서 한국 행동주의 펀드의 대명사인 강성부 KCGI 대표를 만난 것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강성부 대표는 “그동안 주주들은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며 “이제야 권리를 소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 증시도 아베 전 총리 시절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주주 권한을 확대한 뒤 고질적인 디스카운트(저평가)에서 벗어나 급등했다”며 “한국 주식시장은 부동산 등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저평가돼 있어 상승할 여력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강성부 대표는 15년간 증권사에서 기업 신용(크레디트) 분석 담당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그가 2005년 발간한 ‘한국 100대기업의 지배구조도’는 증권사의 첫 기업지배구조 관련 자료다. 강 대표는 한국증시 저평가(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과 해법이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에 있다고 판단했고 이후 행동주의 펀드를 운영하는 매니저가 됐다. KCGI 설립 후 한진칼과 오스템임플란트를 대상으로 주주 행동주의 활동을 폈다.
Q 대한민국 증시 밸류업이 화제입니다. 먼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실체와 정도에 대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A 흔히 얘기하는 한국 증시 저평가의 원인은 2가지 정도입니다. 첫 번째가 후진적인 기업의 거버넌스(지배구조)와 기업 성장동력 부재입니다. 당장 주요 선진국에 비해 투자자 보호 장치가 미흡합니다. 결국 투자자들이 참여하려고 하지 않고, 그 결과가 박스피 20년입니다. 자사주 매입·소각과 배당을 더한 주주환원율을 보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10년 정도 뒤처져 있어요. 여기에 일감 몰아주기나 기업 분할 합병, 상장폐지나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일반 주주들의 이익 침해 사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소액주주들의 이익이 심하게 침해당한 경우도 없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본시장 자체가 후진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요.
예전에 증권가에선 북한과의 전쟁 가능성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결국 기업가치, 증시의 저평가에는 기업 성장동력의 부재가 깔려 있습니다. 기업의 성장동력 부재 문제 역시 기업 소유구조와 지배구조에 기인한 바 큽니다. 기업의 의사결정구조가 왜곡돼 있다 보니, 기업의 이익, 주주, 종업원, 채권자,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들을 위한 의사결정이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 과정 역시 불투명하고, 핵심지배주주, 소유하고 경영하는 사람들의 이익이 앞서서 고려되는 경우도 생겨나고,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어요.
Q 일부에선 일반 주주권의 강화가 단기이익에 치중돼 장기적인 기업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폅니다. 오히려 강력한 오너십 경영이 낫다는 얘기도 합니다.
A 일반적으로 기업의 창업세대, 혹은 그다음 정도까지는 맞는 얘기일 수도 있어요.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병철 회장이 기업 부국의 기반을 닦았다면, 이건희 회장은 초격차, 초일류를 강조하며 세계 1등을 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뒀습니다. 초기 성장기에는 오너 지배주주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효율적일 수 있지만, 지금의 한국 경제는 그런 시기가 지났습니다. 지배구조 혁신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그것이 가능하게끔 채찍질해야 해요. 결국 일반주주들이 해야 할 일 입니다. 일반주주의 이익을 해치는 의사결정을 견제할 수 있는 구조가 중요합니다. 기업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이사진에 앉아 있는 게 요체예요. 애플, 테슬라를 보면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도 늘 견제받고 긴장하게끔 만들고 있어요.
Q 증시 밸류업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A 기업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다음은 투자자들이 변해야 합니다. 투자자들도 유행을 좇아가는 투자가 아니라 기업의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해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거나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투자자들, 일반주주들에게 불리하게 돼 있는 법과 제도를 고쳐나가야 합니다. 여론의 환기도 필요합니다. 사실 행동주의 펀드 활동을 해보면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을 분명하게 느낍니다. 지배주주의 편을 드는 의견들이 언론은 물론 학계에서도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외이사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세요. 단 한 명의 이사라도 주주들이 뽑을 수 있다면 당장 의사결정이 바뀌지 않더라도 여론을 환기시킬 수는 있다고 봅니다. 법 제도들도 지배주주들이 요리조리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 보호나 제재 규정이 약합니다.
강 대표는 2018년 도입된 스튜어드십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국민연금을 예로 들어 “정말 국민의 돈을 수익자라 생각하고 의결권을 행사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있다”면서 “주주로서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효율적이고 우수한 기업들은 해외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더 많은 자본을 수월하게 모으기 위해 미국 등 해외 증시로 기업 탈출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 대만과 경쟁하고 중국, 인도의 거센 도전을 받는 상황에서 한국 자본시장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Q 일본의 경우, 증시 밸류업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어떤 점을 참고로 하면 좋을까요.
A 사실 한국 정부의 밸류업 대책에 대해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밀어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본 사례를 보면 자본시장 전문가를 정부의 핵심 요직에 앉히고, 아베 총리가 직접 행동주의 펀드 관계자들을 관사로 불러 식사까지 했어요. 아주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얘기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잃어버린 30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봅니다. 결국 재팬 디스카운트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자본시장을 다시 뛰게 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 성과를 보고 있는 셈이죠. 우리도 그런 부분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습니다.
Q 정부에서 당장 추진할 수 있는 제도나 방안으로는 어떤 게 있을 수 있나요.
A 먼저 ‘이사의 충실의무(상법 제382조의 3)’와 관련한 사회적 인식 및 제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현행 상법상 이사는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돼 있고 주주들에 대한 의무는 규정에 없어요. 이사들이 주주들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려도 면죄부가 되는 것이라 해외투자자들이 한국 기업 투자에 있어 가장 우려하는 부분입니다. 투자자 보호를 위해선 이사들이 주주들에게도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충실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제도 변화와 인식 개선이 이뤄져야 합니다. 또한 자사주를 누구한테나 배정할 수 있는 금고주처럼 인식하는 것도 개선할 필요가 있어요. 미국에선 자사주를 매입하면 시가총액에서 아예 빼버립니다. 소각 목적이 아니면 자사주를 일정 기간 이상 보유할 수 없도록 제한해야 해요. 결국 기업은 투자를 해서 이익을 내야 하는데, 자사주, 현금, 부동산 등으로 가지고만 있어선 곤란하죠. 투자 안 하려면 자산을 줄이거나 주주들에게 환원해야 합니다.
강 대표는 상속과 배당세제 개편도 꼭 필요한 조치라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 상속세 제도는 주가 하락을 유도하는 이상한 세금 제도”라고 설명한다. “주가가 오를수록 대주주가 내야 할 상속세액이 많아지는데 누가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겠느냐”는 것. 그는 “일각에선 상속세 인하를 ‘부자 감세’ 프레임으로 호도하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해선 상속세 제도를 손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 오너가 자녀가 설립한 개인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고, 이 회사를 키운 뒤 매각해 상속에 필요한 세금을 확보하는 승계 방식이 나온 이유도 징벌적 상속세율 때문이라는 게 강 대표의 판단이다. 강 대표는 “상속세는 최대 60%에 달하는데, 이런 방식(일감 몰아주기)으로 하면 자본이득세 25%만 내도 된다”며 “사실상 정부가 꼼수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 강 대표는 “세율을 낮춰도 제도를 디테일하게 운영하면 세수 감수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강 대표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 미만인 회사는 주가가 아니라 순자산가치를 기준으로 과세해야 한다는 의견도 냈다. 그는 “PBR 1배 미만 회사는 일종의 ‘저성과자’인데 이들에게도 시가로 상속세를 책정하는 건 저성과자에게 더 큰 보상을 주는 제도”라고 지적했다.
배당은 금융소득종합과세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실제 투자자들의 배당을 많이 받으려면 관련 세금을 낮춰줘야 한다는 것. 강 대표는 “배당 성향이 올라가면 국민연금의 수익률도 좋아진다”면서 “투자자와 국가 재정 모두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Q 결국 정부나 투자자들의 인식 전환이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겠네요.
A 코리아 밸류업이라는 화두를 끌고 가는 게 중요합니다. 현재 개인투자자들만 1400만 명입니다. 최근 5~6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났어요. 투자자들은 깨어나고 있어요. 다행히 이번 정부의 의지가 강해 보여요. 우리나라 경제를 위해서 기업의 체질 개선이 필수입니다. 여기에 주주들이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는 국민 복지, 국가 재정의 이슈이기도 해요. 국민연금 수익률이 1% 높아지면 고갈 기한이 5.2년 늘어나요. 자사주만 소각해도 시뮬레이션상으로는 코스피가 최대 4000포인트까지 갈 수 있어요. 증시 밸류업이 1400만 투자자뿐 아니라 전 국민의 이슈인 이유입니다.
[김병수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3호 (2024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