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전 챗GPT를 사용해본 경험이 없는데, 주변에선 논문이나 글의 카피를 염려하더군요. 제 생각에 인간과 AI의 차이점은 죽음에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의 죽음에는 진화론적 관점이 있지만 AI는 배터리 방전이랄까. 분명 결이 다르죠. 수많은 철학가의 명언에 AI가 목소리를 입힐 순 있겠지만 그 선과 결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철학자에게 AI를 묻는 게 실례일까’란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AI시대에 철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우문에 죽음이 다르듯 결도 다르다고 분명한 선을 강조하는 품이라니. 2023년과 2024년을 아우르는 현재, 서점가에 쇼펜하우어 열풍을 낳게 한 철학자 강용수 교수를 만났다. 자기계발과 재테크가 휩쓴 무대에 철학서가 통할 수 있을까란 통념은 그의 저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앞에 처참히 무너졌다. 11월 이후 베스트셀러 수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한 이 책은 무려 20만 부가 팔리며 40대와 50대를 철학 수업으로 이끌었다. 그는 “쇼펜하우어는 결코 삶을 비관한 염세주의자가 아니었다”며 “삶의 고통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968년생. 고려대에서 서양 철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2014년〈쇼펜하우어의 행복론〉, 2015년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 상담을 〈실존주의 철학과 철학상담〉으로 소개했다. 2019년에 〈니체의 정의론에 대한 연구〉로 대한철학회가 수여하는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Q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일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A 방송 출연도 잦아졌고 특강도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언제까지 이럴진 모르겠는데, 짧지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Q 4개월째 베스트셀러 순위 1위에 올랐습니다. 판매부수도 20만 부를 넘겼다고 들었는데요.
A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에요. 출판사 쪽에선 좀 팔릴 것 같다곤 했어요. 하지만 전 논문을 쓰는 연구자이기 때문에 학자로 살아야 하는데, 너무 들뜨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베스트셀러 순위는 확인하고 있습니다.(웃음)
Q 집에선 뭐라고 하십니까.
A 제가 카톡이나 SNS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요. 카톡 친구도 한 10명 있나. 가족들에게도 별다른 얘길 하지 않았었죠. 알려지고 나선 아버님이 좀 섭섭해하시더군요. 서점에 갔던 아들은 아빠 책이 1위에 올랐다고 좀 놀랐던 것 같고요.
Q 인세도 많을 것 같은데요.
A 11월에 선인세를 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금액이 들어와서 놀라긴 했습니다. 제 통장에 그렇게 많은 숫자가 찍힌 적이 없었거든요. 여기저기 세금 내고 빚도 좀 갚고 했어요.
Q 쇼펜하우어도 중년 이후에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그런 면에선 과정이 비슷한데요.
A 쇼펜하우어가 60세 넘어 빛을 봤다면 전 이제 50대 중반인데 약간 알려진.(웃음)
Q 왜 하필 쇼펜하우어를 끌어들이신 겁니까.
A 사실 출판사 기획이었어요.(웃음) 제가 학부 때 쇼펜하우어의 번역본을 읽었는데, 그때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학에선 쇼펜하우어를 깊이 가르치지 않는데, 그 책을 보면서 공부도 하고 논문도 썼어요. 그러곤 니체로 넘어갔죠.
Q 독자들이 왜 이 책을 읽는다고 보십니까.
A 제가 1968년생인데, 저 또한 40대를 열심히 오래 살았어요. 인정받지 못하고 뜻대로 안 됐지만 그래도 버티며 50대가 됐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그 부분에 공감하시는 것 같아요.
Q 40대는 어땠습니까.
A 술 많이 마셨지요.(웃음) 사회생활 좀 잘해보려고 술도 많이 마시고 머리도 좀 조아리고 했습니다. 그런데 잘 보이려고 한 잔 더 마시면 “자넨 술만 먹나”그러고, 안 마시면 “무슨 일 있나” 하더군요. 실력보다 인간관계를 잘 맺으려 하면 결국 생각지도 못한 길로 빠지게 됩니다. 책 속에 그런 말들이 많아요. 제가 뼈저리게 느꼈던 일들…. 그렇다고 큰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제 생각이나 체험이 많이 녹아 있습니다.
Q ‘40대는 늦여름이 끝나고 초가을쯤 열매를 맺어야 할 때’라고 정의했는데.
A 그건 제가 지어낸 말인데, 제게 마흔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 시기였어요. 지금도 그게 너무 아쉬워요. 보통 40대가 인생의 전환점이라고들 하는데, 대부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더군요. 저는 정신없이 지나갔지만 청춘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을 제대로 겪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Q 40대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미래인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A 우리나라 40대의 가장 큰 고민은 가족 같아요. 요즘 온라인엔 ‘혼자 살아라’ 같은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끼는 글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인지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거나 가족이 해체되는, 결국 자살로 이어지는 내용들이 많더군요. ‘좀 외롭더라도 인간관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혼자 지내라.’ 이런 내용의 유튜브 영상도 많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고독을 강조했어요.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서로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간격, 그러니까 정중함과 예의를 갖춰 관계를 맺어야 한다가 핵심이에요. 자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 타인에게서 독립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 아예 맺지 말라는 게 아니죠.
Q 서로 상처 주지 말라?
A 그렇지요. ‘상처받을 바에 아예 혼자 지내라’가 아니라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말라는 거예요.
Q 그럼 마흔을 어떻게 버텨야 할까요.
A 주제가 넓은데…. 여하튼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을 좀 바꿔야 될 것 같아요. 고통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주로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일어나잖아요. 돈에 대한 갈증, 인간관계나 이성관계 등등 충족됐나 싶으면 사라지기도 하고, 그런 고민에 시달리다 40대가 되면 자존감이 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자존감이란 건 좀 깨져봐야 해요. 자존감에 금이 가면 자긍심이 생깁니다. 경제적으로도 깨져보고 사회생활에서 타인에게 상처나 무시도 받아보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 품위를 지키기 위해 과장하고 포장하다 자존감이 무너집니다. 그런 경험이 스스로의 능력을 믿는 자긍심으로 이어지죠. 저를 보세요.(웃음)
Q 구체적인 방법이라면.
A 음… 좋은 책을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책에 쇼펜하우어의 책 읽는 방식을 정리한 부분이 있는데, 첫 째는 좋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고전을 들 수 있겠지요. 둘째는 그 책을 반복해서 두 번 이상 읽어보세요. 곱씹을수록 생각이 정리됩니다. 셋째는 안 좋은 책들은 피해야 해요. 그러니까 책을 팔 목적으로 쓰인 책들, 남들 생각을 짜깁기한 카피본들, 이런 악서들이죠.
Q 인생 선배로서 마흔이 된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A 참 사는 게 힘든 것 같아요.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요. 그런데 인생이란 배의 무게를 잡아주는 건 삶의 고통인 것 같아요. 고통이 있어서 희로애락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것이죠. 고통의 경험은 크고 작은 풍파에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고통이 많을수록 무게중심이 든든해 침몰 직전의 상황을 버텨낼 수 있어요.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세상과 인생을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사상)로 알려졌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금수저에 결혼도 하려 했었어요. 쇼펜하우어의 말을 잘못 이해해 쉽게 포기하려 하지 말고 꿋꿋이 견뎌보세요. 그러다 보면 중년 혹은 말년에 쇼펜하우어처럼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안재형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