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연기엔 말이 필요 없다. <비스티 보이즈> <추격자> <황해> <멋진 하루> <국가대표>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베를린> <더 테러 라이브> <군도> <터널> <암살> <아가씨> <신과 함께-죄와 벌> <1987> <백두산> <클로젯> 등 셀 수 없이 많은 필모그래피에서 천의 얼굴을 보여준 ‘믿고 보는’ 배우 하정우(44)는 2년 만에 공개된 신작인 넷플릭스 <수리남>에서도 온몸을 던졌고, 남김없이 불태웠다.
<수리남>(감독 윤종빈)은 남미 국가 수리남을 장악한 무소불위의 마약 대부로 인해 누명을 쓴 한 민간인이 국정원의 비밀 임무를 수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수리남에서 마약 밀매 조직을 만든 한국인 마약왕 조봉행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
<용서받지 못한 자>부터 <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군도: 민란의 시작>까지 무려 네 편의 영화를 함께 한 충무로 콤비, 윤종빈 감독과 하정우의 다섯 번째 만남인데, 재미있는 점은 수리남에 한국인 마약 대부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접한 하정우가 윤종빈 감독에게 직접 연출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실화가 흥미로웠고, 윤종빈 감독은 자주 보기도 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잘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영화로 제작하려고 했는데 이건 2시간 반 안에는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감독님이 거절했죠. 영화 <공작>을 찍고 와서 시리즈물로 만들면 가능하겠다고 해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수리남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만큼 해외 로케이션 촬영이 많았는데, 녹록지 않은 환경 외에도 윤 감독 특유의 집요함과 섬세함이 더해져 촬영 현장은 더 만만치 않았다고 했다.
국내외 다양한 장소에서 촬영이 진행됐지만 도심에서 2~3시간 떨어져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은 밀림에서 진행된 도미니카공화국에서의 촬영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았단다. “화장실 한 번 가려면 차 타고 5분은 나가야 했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윤 감독 이하 스태프들의 열정을 보며, 하정우 역시 온 힘을 다했다.
▶윤종빈 감독과 오랜 호흡
윤 감독과의 호흡은 새롭지 않지만, 오랜 호흡인 만큼 더 큰 책임감으로 돌아왔다고도 했다. 그는 “윤종빈 감독은 평상시 모든 걸 귀찮아하는데 촬영할 땐 본인이 생각한 걸 끝까지 이뤄낸다. 그게 대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똑같은 걸 계속 시키면 힘들죠. 그런데 아무리 친해도 서로 봐주기도 하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런 것 때문인지 (초창기 작품인) <비스티 보이즈> 때부터 더 잘 소화해야겠다 싶었어요. 기본적으로 준비를 잘해서 다른 사람에게 오해 사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어서 다른 현장보다 어려웠어요.”
하정우는 극 중 큰돈을 벌기 위해 수리남에서 온 민간인 사업가 강인구 역을 맡아 열연했다. 강인구는 처세술에 능한 사업가인 동시에 가족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하는 부성애를 보여주는 캐릭터다. 홍어 사업을 위해 건너간 수리남에서도 아들의 성적표를 확인하는 등 K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강인구의 가족이자 가장으로서의 모습에 대해 하정우는 윤 감독에게서 자연스럽게 모티브를 얻었다고도 했다.
“윤종빈 감독과 인구 캐릭터의 자라온 환경과 자식을 키우고 가족을 책임지고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감독이 아버지, 어머니,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본인이 아버지가 되고 자식을 키워가면서 느낀 것들이 인구 캐릭터에 들어가지 않았나 싶어요. 자주 보고 생활하다 보니 윤 감독의 자라온 환경과 살아온 환경이 강인구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생각한 ‘부성애’에 대해서는 “가족을 책임지고 부양하는 것 자체인 것 같다. 과거부터 시작된 처자식을 위해 목숨 걸고 사냥을 나가고, 그런 1차원적 마음이 아닌가 싶다. 사랑보다는 책임이다. 가정을 꾸려서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거다. 저 역시도 그런 것 같다. 너무 옛날 아버지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제가 자식을 낳는다면 성적표를 확인하기보다는, 많이 놀아주고 싶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미소를 보였다.
▶캐릭터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 최선
그렇게 강인구를 ‘이해’하며 받아들인 하정우는 극 속에서 캐릭터의 특성을 실제 그 자신의 모습에 완벽하게 입혔다. 덕분에 일상적인 장면부터 감정의 절정에 달한 순간까지, 하정우가 보여주는 매 장면은 무릎을 탁 치게 할 정도의 명장면 투성이다. 하지만 명연기 뒤에는 캐릭터에 온전히 몰입한 하정우의 치열한 노력이 숨어 있었다.
“강인구를 연기하며 20대 막바지에 작업했던 영화 <비스티 보이즈>와 <멋진 하루>를 떠올렸어요. 사실 강인구는 쉽지 않은 캐릭터예요. 극을 이끄는 첫 번째 주인공이잖아요. 튀는 것보단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연기로 뭔가를 강조하긴 어렵죠. 윤 감독이 저와 <용서받지 못한 자>나 <비스티 보이즈>를 함께한 만큼 제 강점 때문에 강인구 역할을 제안한 것 같아요. 캐릭터가 식상해 보여도 극 전체를 볼 땐 안정적이란 판단이었겠죠. 제가 어릴 때 즐겨 했던 표현법이나 대사, 리액션 등을 강인구에 녹여냈어요. 감독님도 그걸 바랐고요.”
전요환 목사, 변기태 등 센 캐릭터들 사이에서 다소 밋밋하거나 존재감이 약해 보일 수 있어 가졌던 고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번 주연의 어려움인 것 같아요. 공격수 같지만, 수비수 같은? 미드필더의 느낌이죠. 주변 인물을 도와가면서 이 작품을 쭉 끌고 가는 것이 제 기능, 역할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어려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새롭고 나은 방식의 해석을 고민했습니다.”
<수리남> 촬영 전후, 하정우는 프로포폴 투약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만큼 <수리남>은 어느 작품보다 뜨겁고, 값진 작품으로 남았다. 그는 <수리남>에 대해 “초심을 돌아본 소중한 시간”이라고도 했다.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만큼은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어요. 캐릭터에 몰입하며 잠시나마 현실을 잊곤 했죠. 과거의 제가 가졌던 몰입력을 마주한 것 같았어요. 잃어버린 걸 찾은 기분이랄까. 제겐 정말 중요했던 것이죠.”
하정우는 “<수리남>을 보면 그때의 제가 가졌던 마음가짐이 보이는데 그게 참 아파서, <수리남>을 쉽사리 못 보겠더라”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지금 저는 발걸음을 다시 내딛고 있으니까, 한 걸음씩 나아가며 많은 걸 생각해보려 한다”고 담담한 마음을 내비쳤다.
[박세연 스타투데이 기자] [사진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