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3조원이 넘는 자금을 운용하며 10여 개 기업을 관리하는 사모펀드의 회장, 밤에는 빅데이터를 활용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엔지니어로 활동한다. 지킬앤하이드(?)처럼 범인이 상상하기 힘든 두 가지의 삶을 해내는 이는 여느 실리콘밸리의 천재 CEO가 아니다. 1952년생으로 올해 망팔(望八 71세)에 접어든 속칭 ‘미스터 반도체’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전 정보통신부 장관)의 이야기다.
정년을 훌쩍 지난 나이에도 그는 남다른 감각과 역동적인 에너지로 일하고 있다. ‘일일학 일일신(日日學 日日新·날마다 배워야 새로워진다)’이란 말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그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지속하고 있다. 진대제 회장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일한 후 창업투자회사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 사모펀드 1호를 설립했다. 당시 대학총장, 기업대표, 정계복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러브콜을 보냈지만 모두 물리치고 직접 ‘진대제 펀드’로 불리는 사모펀드를 설립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며 찾은 백두산에 영감을 받아 이름도 ‘스카이레이크(Sky Lake)’로 지었다.
진대제 회장은 이에 대해 “다양한 기업에 나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어려움에 처한 기업을 돕고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내는 것이 보다 국익에 부합하는 길이라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50개가 넘는 기업을 엑시트하고 현재도 10여 개의 기업을 관리하며 올해만 10여 차례 해외출장을 다녀온 진 회장은 스스로를 ‘잔소리꾼’이라 표현했다.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한 소재, 첨단장비, 부품 등 진 회장의 전문 분야라 할 수 있는 기업들의 경쟁력을 키우고 미진한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현장을 찾아 직접 나사를 조이기도 한다. 컨설팅 역할을 넘어 대표이사를 겸임하며 필드를 누비는 경우도 있다.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
도전의 연속 스타트업 창업까지
투자 대상 선정에 있어서도 새로운 도전에 거침이 없다. 스카이레이크는 2016년 580억원에 아웃백을 인수해 5년 만인 지난해 2700억원에 매각하며 산술적으로 4배 넘는 성과를 기록했다. 보유기간 이뤄진 배당금과 자본 재조정(리캡)을 포함하면 5배 이상 수익을 실현했다는 게 업계 평가다.
한편 진 회장은 잘 알려진 골프 마니아다. 그는 40년간 매진한 것은 ‘회사와 일 그리고 골프’라고 털어놨다. 오랜 기간 골프를 치며 그가 아쉬워했던 것은 그린을 읽는 기술이었다. 그린 내 오르막과 내리막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3년 전부터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취미활동으로 직접 코딩을 하고 알고리즘을 만들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바탕으로 스타트업을 창업해 올해 2월 서비스를 시작한 앱이 바로 ‘버디캐디’다. 골프장 고해상도 영상과 3차원 애니메이션 등을 활용한 수치 해석으로 개발된 버디캐디는 국내 300여 개 골프장의 디지털 코스 지도를 제공하며 그린 스피드에 따른 퍼팅 궤적, 타깃 거리, 궤적 생성 내역 등을 제공한다. 현재 버디캐디 앱은 일본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진대제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최근에도 상당히 바쁘게 지내신다고 들었다.
▷우리가 투자한 기업이 10여 개 되는데 회사를 육성하고 관리하는 일이 상당히 타이트하다. 잘하는 기업은 지켜보면 되지만 미진한 회사는 자주 찾아가 야단치기도 하고 직접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국민혈세로 이루어진 국민연금을 비롯해 다양한 기관 자금을 운용하는 입장에서 책임지고 수익을 내야 하지 않겠나. 열심히 뛰고 있다.
▶2016년 스카이레이크가 주 종목이 아닌 외식업에 투자해 상당히 화제가 됐는데? 새로운 분야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우리가 아웃백에 투자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참 신기하게 생각하긴 했다(웃음). 후일담이지만 국민연금 관계자도 IT 관련 분야가 아닌 외식업에 투자하느냐고 해서 설득의 시간이 필요했다. 제조업적인 관점으로 접근했다. 식자재를 잘 사고 좋은 레시피로 요리해 패키징(서비스)을 잘해서 시장에 내놓으면 충분히 성공하리라 봤다. 그 과정에서 정밀한 수요 예측을 주문했다. 서플라이 체인을 개선해 냉동육을 냉장육으로 바꿔 고기 맛을 올렸다. 서비스 측면에서 성공하는 식당은 직원들이 음식을 내놓으며 손님과 눈을 맞추고 인사한다. 이러한 서비스는 직원들의 기가 살아야 가능하다. 고기의 원산지인 호주 등으로 직원연수를 통해 화합을 다지는 과정도 가졌다. 30~40년 해온 경영활동의 확장이라 생각한다. 두려움은 크게 없다.
▶기업을 인수하거나 투자할 때 지키는 원칙 같은 것이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투자 기업의 시장성이다. 예를 들어 분야가 전기자동차, 스마트폰이라면 해당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지 여부다. 성장 산업에 있는 회사라면 좀 침체 상태에 있더라도 기술이나 성장동력을 투입해 키우면 되고, 유능한 인재는 모시고 오면 된다. 그런데 시장 자체가 침체 국면에 있으면 타개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런 점은 중요하게 본다.
▶경기침체 우려나 글로벌 긴축기조 등 매크로 환경이 좋지 않은데 투자한 기업들의 분위기는 어떤지?
▷한동안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 글로벌 공급망이 무너지고 수출 길도 막혔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많이 개선되고 있다. 성장 산업에 있는 경쟁력 있는 기업이라면 충분히 버틸 체력이 있다. 스카이레이크의 관점에서 보면 매크로 환경이 좋지 않아 내년 정도에는 많은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데,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1조원이 넘는 규모의 추가 펀딩을 계획하고 있다.
반도체는 결국 사람이다
진대제 회장은 1980년대 IBM왓슨연구소를 박차고 나와 조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발돋움시켜 ‘미스터 반도체’로 불린다. ‘35세 상무’, ‘준(准)천재급 인재’라는 영예로운 타이틀도 얻었다. 2000년대 초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직을 맡아 ‘참여정부 최장수 장관’으로 봉직했다. 그 과정에서 스톡옵션 80억원어치를 포기한 일화는 잘 알려졌다. 삼성전자 사장직을 내려놓고 업계를 떠난 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지만, 진 회장은 여전히 한국 반도체 산업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16MB(메가바이트), 256MB 디램(DRAM)은 오늘날의 삼성 반도체를 있게 한 밑거름이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 들어선 현재 진 회장은 결국 ‘사람이 전부’라고 진단했다.
▶1994년 ‘삼성 반도체가 망하는 2가지 시나리오’로 첫째, 미국의 반도체 강자(强者) 인텔이 사업에 뛰어든다. 둘째, 일본이 한국 견제를 위해 반도체 장비의 한국 수출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이뤄졌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위기라고 할 수 있을까?
▷인텔이 비메모리 사업은 아니지만 최근 팹리스에 뛰어들었고, 일본의 수출 금지 조치가 나타났는데 지금도 이러한 명제는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반도체 굴기라고 해서 글로벌 연합체가 등장하고 수출 금지도 이뤄지는 등 견제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사실 항상 그래왔다. 전쟁터와 같은 경쟁에 있어 이러한 견제는 늘 있었다.
▶국내 기업들이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지만, 최근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글로벌 반도체 산업 시장에서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분야가 4분의 3을 차지하는데 아직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2~3%에 불과하다. 메모리 반도체는 설계 인력이 100~200명만 있어도 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는 1000명을 넘어 1만 명의 인력을 필요로 한다. 그만큼 많은 인력이 투입돼야만 앞서나갈 수 있는 영역이다. 특히 설계능력을 갖춘 경력 20년이 넘는 고급인재가 필요한데 현시점에서 인재 유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 각 국가들이 대학 교육과정을 신설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다. 고급인재 영역은 또 다른 경쟁이 있을 텐데, 복안은 무엇인가?
▷반도체 인력 부족 문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현실적으로 고급인력을 국내 기업으로 유치하기 어려운 환경인 것이 분명하다. 반도체 기업들만의 경쟁이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유수한 글로벌 IT 기업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애플, 구글의 스카우트 인력은 하버드 MIT의 예비졸업생 명단을 꿰차고 있다. 국가정책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들이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부분이다. 뉴욕이나 실리콘밸리 등에 반도체 설계기지를 만들어 인력을 몇 만 명 늘려 충원하는 것도 방법이다.
▶본업 외에 골프 앱을 개발해 출시하셨는데 상당히 이채롭다. 계기가 무엇인가.
▷2018년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4m 정도 거리에서 버디 기회를 아깝게 놓쳤다. 낯선 코스와 잔디를 접한 골퍼가 의존하게 되는 캐디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그린을 읽어주는 기기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머릿속으로 상상한 모습은 기기를 대면 3차원으로 그린 등고선을 분석하는 모습이었다. 이후 ‘그린 리더기’ 연구개발에만 4년이 흘렀다.
▶단순히 지도 모양을 통해 그린을 읽기 어려울 것 같은데?
▷AI, 빅데이터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봤다. 결과적으로 GPS와 3차원 지형구조 외에 자율주행 자동차에 적용되는 기술을 합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자율주행 자동차에도 적용되는 비전(vision) 인식 기술을 통해 근거리 그린을 읽는 기술은 어렵지 않게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여 m만 떨어져도 정확도가 많이 떨어졌다. 골프는 20여 m 밖에서도 10㎝ 이내 홀 컵까지의 거리와 크기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한다. 기존 기술보다 정밀한 기술이 필요하다. 골프장의 고해상도 영상과 3차원 지도, 뉴턴의 운동역학 법칙과 지면 마찰력, 중력을 적용, 퍼팅 궤적을 계산해 그린 위에서 볼이 굴러가는 걸 구현했고 필드 테스트를 거친 뒤 지난 2월 버디캐디를 출시했다.
▶잠잘 시간도 부족할 것 같다.
▷프로그램 개발은 주로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 집에서 혼자 했다. 하루에 5시간 정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취미생활로 집에서 하나씩 장비를 사서 시험해보면서 시작했는데, 점점 욕심이 생기고 정확성에 확신이 생겨 스타트업까지 차리게 됐다.
▶새롭게 계획하고 있는 분야가 있을까?
▷자율주행 특장차에 쓰이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흔히 자율주행하면 상용차에 적용되는 기술을 생각하는데 일례로 쓰레기차나 미세먼지를 제거하는 자동차는 다른 영역의 정밀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빨리 달릴 필요는 없지만 작은 물체를 인식하고 쓰레기를 인지하는 정밀한 센서 기술이 필요하다.
He is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1호 국비 유학생’이다. 미국 휴렛팩커드와 IBM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대학 선배가 있는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겼다.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진대제 펀드’로 유명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를 세우고 투자 전문가로 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