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미국 대선 승리가 확실시된 지난 10월 6일. 닛케이225지수는 2만4325.23에 거래를 마쳤다. 1991년 11월 13일 이후 최고치다.
이후로도 글로벌 증시의 순항과 함께 닛케이225지수는 2만5000선을 역시나 29년 만에 회복하는 등 순항했다. 근 3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한 셈이니 사회가 들썩거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영 시큰둥한 분위기 속에서 무덤덤하게 지나갔다.
닛케이225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지난 1989년 12월 29일의 3만8915.87엔에 비해서는 여전히 낮은 점도 한몫했지만 더 큰 이유는 주가 상승을 체감하기 힘들어서다. 넘쳐나는 유동성으로 실물경기와 증시가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일본만의 얘기는 아니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무덤덤하다. 시장이 좋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투자자가 많은 데다 언제 어느 때든 하락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비관론이 커서다. 지난 수년간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등이 주식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하면서 시장 왜곡이 심각해진 결과다.
11월 11일 도쿄 주식시장에서 닛케이225 평균주가지수는 7일 연속 상승하며
전일비 444.01엔(1.78%) 오른 2만5349.60엔으로 거래를 마쳤다.
전임 아베 신조 내각에서 내건 아베노믹스에 보조를 맞추겠다며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무제한 양적완화에 나섰다. 시중에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의 하나로 일본은행이 택한 것이 자국 주식시장 투자란 전대미문의 방법이다.
한국은행을 비롯해 중앙은행이 해외 주식을 보유하는 경우는 있지만 자국 증시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일본은행 역시 이 같은 비판을 고려해 개별종목이 아닌 상장지수펀드(ETF) 형태로 투자에 나서고 있다.
문제는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일본은행의 ETF 매입은 지난 2010년 시작돼 올해 10월로 10년을 맞았다. 처음엔 연간 4500억엔(약 4조7567억원) 수준이었다. 당시에도 많다는 지적이 빗발쳤지만 구로다 총재는 2013년 취임 후 투자 상한을 연 6조엔으로 늘렸다. 올해 3월에는 비상상황이라며 투자한도를 배인 12조엔으로 더 늘려 잡았다.
상한인 탓에 매년 12조엔을 투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장기간에 걸친 공격적인 매입으로 인해 이미 일본은행의 보유 자산이 과도하게 높아졌다. 일본은행 보유 ETF는 올해 6월 말 시점에 장부가로 32조7584억엔에 달했다. 작년 말(28조2508억엔)에 비해 반년 새 4조5000억엔이 늘었다. 한국의 코스피처럼 대형 우량기업 중심인 도쿄증시1부 시가총액의 5.5%에 달한다. 하반기에도 비슷한 수준으로 매입을 이어가면 올 연말께엔 일본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해당하는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보다 보유 금액이 더 많아진다. GPIF는 운용자산 규모가 올 9월 말 기준으로 167조5358억엔으로 세계 최대 연기금이다.
최근 수년간 이어진 일본 증시 상승에 대해 ‘관제’ 버블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덩치가 커지면서 황당한 일들도 잇따르고 있다. 닛세이기초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의 회계연도가 끝나는 3월 말 기준으로 일본은행과 GPIF가 최대주주로 이름을 올린 기업이 도쿄증시 1부 상장기업 2166사 중 1830사에 달한다. 일본은행과 GPIF가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곳만 630개사에 달한다. 대표적인 예가 유니클로를 생산하는 패스트리테일링과 소프트뱅크, 도요타자동차, 일 최대 항공사인 ANA(전일본공수)홀딩스, 일본 최대 금융사인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 등이다. 패스트리테일링의 경우 일본은행과 GPIF가 보유한 지분만 22.1%에 달한다. 패스트리테일링의 경우 유통주식 수 자체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두 기관이 집중적으로 사들이면서 이제는 시장에서 거래가 쉽지 않다는 비판이 쏟아질 정도다.
연못 속 고래란 표현이 나올 정도로 일본은행의 존재감이 커지다보니 이제 시장의 시선은 출구전략에 쏠리고 있다. 올 연말께엔 일본 주식시장에서 가장 큰 투자자가 될 일본은행이 계속 주식을 보유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일본은행 역시 시장의 충격을 최소화할 방안을 찾고 있지만 매각이 시작되면 주가 하락은 불가피할 것이란 게 일반적 관측이다. 일본 사회가 29년 만의 주가 최고치 경신에도 마냥 웃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방식은 지난 1998년 홍콩 정부가 채택한 국민공모 방식이다. 홍콩 정부에서는 1998년 8월 14일부터 28일까지 2주간 헤지펀드의 공격에 대응하겠다며 외환보유고를 활용해 주식을 사들였다. 당시 매입규모가 1181억홍콩달러(약 20조원 규모)였다.
막대한 주식을 떠안게 된 홍콩 정부는 사들인 주식으로 ETF를 만들어 이를 국민들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택했다. 국민들의 참여와 장기 보유를 유도하기 위해 ‘로열티 보너스’라는 인센티브도 도입했다. 1년 이상 보유할 경우 20유닛당 1유닛을 더 주고, 2년 이상 팔지 않을 경우엔 15유닛당 1유닛을 주는 식이다. 대량의 주식이 한번에 매물로 쏟아지는 상황을 막기 위한 대책이었다. 홍콩 정부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국민들의 주식 투자를 늘리는 예상 외 성과도 있었다.
일본 주식시장의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성장가능성이 높은 기업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 수는 현재 20년 전에 비해 400사 이상 늘어난 3800사에 달한다. 같은 기간 미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 수가 7000사에서 4000사로 줄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상장기업 수가 증가한 것은 일본 주식시장의 신진대사가 멈춰있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참고로 한국의 상장기업 수는 20년 전과 비교해 코스피 시장은 거의 그대로다. 코스닥 시장까지 포함하면 상장기업 수는 1100사에서 2100개사로 약 1000여 개사가 늘었다.
경쟁력을 상실해 주식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기업들이 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방은행이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도 취임 후 기자회견에서 “지방은행이 너무 많다”는 발언을 했을 정도다. 이 발언 후 지방은행의 주가가 급등했을 정도로 시장에서 퇴출을 희망하고 있다. 도쿄1부에 상장된 지방은행은 단 한 곳도 빠짐없이 시가총액 대비 자산가치의 비율을 나타내는 PBR(주가순자산비율)가 1배 이하다. PBR가 1배 이하란 것은 회사를 청산한 가치가 시가총액보다 많다는 것이다.
사실상 해당 기업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다. 대상을 일본기업 전체로 확대할 경우에도 PBR 1배 이하의 기업이 전체의 50%에 달한다. 상장 기업의 절반이 시장에서 미래가 없다는 선고를 받은 셈이다. 지난 10월 1일 도쿄증시가 하루 종일 거래가 중단되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했지만 한국을 비롯해 미국, 유럽의 주요 경제지 등에서도 이를 간단하게 다룬 것만 봐도 일본 증권시장의 존재감이 얼마나 미약한지 드러난다.
남의 나라 일 같지 않다. 코스피는 최근 많이 올랐다지만 여전히 2000선 수준에서 움직이고 있다. 오죽했으면 천수답이란 말까지 붙었을까 싶어지지만 2020년이라고 달라진 것이 없다.